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늘 새로운 철학자를 소개하려 합니다. 오늘 소개할 철학자는 장자입니다. 원래 이름은 장자가 아니라 장주입니다. 장자는 장선생이라는 뜻이고요, 그는 기원전 355년에 몽나라에서 태어납니다. 기원전 355년이니 전국시대입니다. 장자는 전국시대 사람이라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노장사상의 노자와 다른 점입니다. 노자는 춘추시대 사람이니까요. 그런데 노장사상이라는 것도 공맹사상이 후대에 만들어진 것처럼 후대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공자의 책과 노자의 책을 읽다보면 공자와 노자가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강조하는 분은 강신주 박사님이죠. 그런데 저는 강신주 박사님과는 생각이 약간은 다릅니다. 일단 장자의 생애는 간단하게 정리하려 합니다. 그도 공자처럼 공무원을 잠깐 했다고 합니다. 그의 능력을 알아본 초나라 왕이 자신의 책사로 그를 부르자, 장자는 싫다고 하고 안 합니다.

약간 도인 같은 느낌이네요. 장자의 생애는 말할 것이 없습니다. 제가 많은 책들을 찾았지만 심지어 평전을 읽어도 장자에 생애는 나오지 않아요. 어떻게 태어나서 어떻게 죽었다는 게 안 나오죠.

그래도 괜찮습니다. 장자가 남긴 저작들은 사상 책이 아니라 이야기책이에요. 이런 거죠. 장자의 마누라가 어느 날 죽게 됩니다. 장자는 한동안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다가 갑자기 악기를 들고 치면서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의 친구가 와서 장자에게 '미쳤냐고, 지금 마누라가 죽었는데 노래가 하냐고'하자 장자는 '원래 왔던 길로 돌아간 것인데, 왜 슬퍼해야하냐"면서 계속 악기를 쳤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도가 무엇인지 진정으로 안 사람 같지 않나요? 생애보다 그가 남긴 이야기들로 그의 사상을 알아보죠.

먼저 가장 유명한 이야기 장주지몽부터 해보려 합니다. 장주지몽, 호접지몽 등등 이름이 있는데 장자가 어느 날 잠을 잤는데 꿈속에서 자기가 나비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잠을 깼는데 혼동이 온 거예요. '내가 나비 꿈을 꾸었는데 실상 나비가 아닐까? 나비가 꿈을 꾸고 있는 모습이 내가 아닐까?' 이렇게 말이죠.

이 이야기를 듣고 장자가 미쳤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이 이야기는 서양에서 19c 프로이드가 발견했던 무의식과 거의 비슷하게 보이기도 해요. 동양이 사상적으로 엄청 앞서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선 장자가 살았던 시기와 비교를 해봐야 해요. 장자가 살았던 시기, 학문의 기초는 유학이라고 했습니다. 유학에 맞서서 장자가 말한 것이에요. 공자의 주장은 제가 울타리 치는 학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장자는 그 울타리를 없애야 한다고 말해요. 즉, 다른 사람을 만났을 때 울타리를 없애고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자나 맹자는 정명론을 주장하면서 울타리를 만들지만 장자는 울타리를 만들지 않습니다. 확연히 유학과 장자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죠. 그런데 이 모습은 노자의 모습과도 달라요. 노자는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해요. 울타리를 낮춰야 한다고 말하죠.

조금 어려운 말로 하면 노자는 도가 원래부터 있던 것이고 그 위로 걸으면 된다고 말해요.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 기억하시죠? 도를 도라 부르면 도가 아니라는 이 말! 도는 이미 있기 때문에 그것을 말할 수는 없어요. 그런데 장자는 도가 있지만 길을 걸어간 뒤에 도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해요. 다른 어떤 것 그게 도가 될 수도 있고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단어로 보면 타자를 만났을 때 울타리를 없애고 타자와의 도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노자는 도가도비상도 하면서 도가 원래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위로 걸어가야 한다며 작은 나라 적은 백성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장자는 그렇지 않아요. 장자는 나라는 없어져야 한다고 말해요. 아나키스트, 즉 무정부주의자입니다. 왜냐하면 타자를 만나면 울타리를 없애고 길을 걸어야 하는데 이게 이전부터 있던 것도 아니고, 공자처럼 학습하거나 맹자처럼 우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장자는 여기서 울타리 없애는 것을 좌망 한다고 말합니다. 앉아서 생각하는 것이지요.

장자, 이야기만 들으면 쉽지 않나요? 그런데 내용을 살펴보면 조금 어려울 수 있어요. 갑자기 유명해진 이야기를 해보죠. 송나라에 저공이라는 사람이 있었답니다. '저'란 원숭이를 뜻하는데, 그 이름이 말해 주듯이 저공은 많은 원숭이를 기르고 있었답니다. 그는 가족의 양식까지 퍼다 먹일 정도로 원숭이를 좋아했답니다.

그래서 원숭이들은 저공을 따랐고 마음까지 알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워낙 많은 원숭이를 기르다 보니 먹이를 대는 일이 날로 어려워져서 저공은 원숭이에게 나누어 줄 먹이를 줄이기로 했어요.

그러나 먹이를 줄이면 원숭이들이 자기를 싫어할 것 같아 그는 우선 원숭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너희들에게 나누어 주는 도토리를 앞으로는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씩 줄 생각인데 어떠냐?" 그러자 원숭이들은 화를 내었는데, '아침에 도토리 세 개로는 배가 고프다'는 불만임을 안 저공은 '됐다' 싶어 이번에는 이렇게 말했답니다. "그럼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씩 주마." 그러자 원숭이들은 모두 기뻐했다고 합니다.

저희가 잘 아는 조삼모사 이야기지요? 이 이야기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원숭이의 멍청함일까요? 그것이 아니라, 타자를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여기서 타자인 원숭이를 만나기 전에 원숭이의 생각을 알 수 있었나요? 아니지요? 타자를 만나고 나서 도를 만드는 것이 장자의 핵심입니다. 여기서 장자는 원숭이의 마음을 미리 판단하는 것을 중지해야 한다는 허심을 말합니다. 허심의 반대말은 성심으로 구성된 마음, 선입견을 가진 마음이라고 합니다.

이야기를 더 해볼까요? 어느 왕이 있었는데 그 왕이 새를 너무 좋아해서 진수성찬을 매일 줬다고 합니다. 그러나 새는 날이 갈수록 여위어져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왕이 슬퍼하며 왜 죽었을까 하자 신하가 새를 새로 안 키웠기 때문이라고 알려줍니다. 무슨 말인가요? 왕은 새가 나랑 같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울타리 없애는 좌망을 안 하고 판단을 중지하는 허심을 안했기 때문입니다.

이 내용들 말고도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대붕이야기를 해보죠.  옛날 북쪽 바다에 '곤'이라는 물고기가 살았는데 그것이 변해 '붕'이라는 새가 되었다고 합니다. 등이 몇 천리인지 알지 못할 정도로 컸던 '붕'은 바다가 움직일 때만을 기다렸다가 힘껏 날아올랐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메추라기 들이 대붕을 비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아무리 날아올라도 이 숲 풀 사이인데 저 놈은 왜 구만리를 올라 남쪽으로 가지?"

바다가 움직일 정도로 큰 바람이 불 때야만 힘껏 날아오르는 대붕은 과연 무엇을 보고 경험한 것일까요? 강신주 박사는 자유로 봅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을 자유가 아니라 허심과 타자로 봅니다. 원래 곤은 정말 조그마한 물고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장자가 봤을 때는 크게 보는 것이지요. 왜 가는지 이해가 안 되지요? 그런데 원래는 안해야 하는 것입니다. 잘못하면 포스트모던으로 가는데 잘 들어보세요. 저희가 '왜 저러지?'라는 것은 이미 저희가 선입견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없애야 한다고 장자는 주장합니다.
 
장자와 가장 친한 혜시와의 대화도 재미있습니다. 혜시는 명가의 대표적인 사람인데 제가 이전에 소피스트 말하면서 소피스트가 동양의 명가와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장자와 친구 혜시가 다리 위에서 다음과 같은 논쟁을 벌였답니다.

장자: 물고기가 자유롭게 노닐고 있으니 그것이 물고기의 즐거움일세.
혜시: 자네는 물고기가 아닌데 물고기가 즐거운지 어찌 아는가?
장자: 자네는 내가 아닌데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른다는 것을 어찌 아는가?
혜시: 내가 자네가 아니니 본래 자네를 알 수 없네. 자네도 물고기가 아니니 물고기가 즐거운지 알 수 없는 게 분명하네.
장자: 처음으로 돌아가 말해 보세. 그대가 방금 말하기를 '자네가 어찌 물고기가 즐거운지 아는가?'라고 말했을 때 그대는 이미 내가 그것을 알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물은 걸세. 나는 물고기가 즐거운지를 다리 위에서도 알 수 있다네.

그렇다면 장자는 왜 이렇게 이야기만 했을까요? 제 생각에는 이미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어느 누구의 사상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을 보았기 때문이라 생각이 됩니다. 지금까지 철학인물사 하면서 그 당시 대접받은 사람이 누가 있나요? 공자, 맹자, 묵자, 노자 등등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순자는 조금 다르긴 합니다. 전국시대에 왕들은 천하제패가 목적인데 그 목적을 달성해주겠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을까요? 그런 모습들을 보고 장자는 좌망하고, 허심을 가지려 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장자는 왜 타자에 관심을 가졌을까요? 실은 역사를 조금 아셔야 하는데 춘추시대는 낭만이 있었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전쟁 전에 쳐들어간다고 적진에게 말하고, 적진은 싸울 장소를 청소하고 있었죠. 하지만 전국시대로 오면서 전쟁은 말 그대로 살육전이 됩니다. 죽이는 것이지요.

장자가 봤을 때는 이 죽이는 행위들이 말도 안 되는 것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친척이 나라가 다르다는 이유로 죽고 죽이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지요. 장자는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좌망해야 한다고 선입견을 중지하는 허심을 가져야 한다고, 그리고 나라가 없어져버려서 전쟁이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장자에게 중요했던 단어들을 한 번 더 정리하고 오늘 마치려 합니다. 타자, 앉아서 생각하는 좌망, 선입견을 없애는 마음을 비우는 허심, 허심의 반대말 구성된 마음,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마음 성심입니다.

장자는 이정도로 마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다른 철학 인물로 찾아뵙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팟캐스트, 팟빵에서 방송하는 '철학인물사'를 기사로 만든 것입니다.



태그:#팟캐스트, #팟빵, #철학, #인물, #장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