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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는 노나라 수도 취푸의 고풍스러운 멋을 더한다.
▲ 취푸 시내의 마차 마차는 노나라 수도 취푸의 고풍스러운 멋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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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림을 보고 다시 취푸로 돌아오는데 갑자기 하늘이 흐려지더니 소나기가 거세게 쏟아진다. 비에 씻긴 고도의 모습이 한결 맑고 깨끗해 보인다. 취푸 시내에는 스무 대 남짓의 마차가 운행되는데, 그 마차를 타고 공자의 3000 제자, 72 현자 중에서도 가장 사랑을 받았던, 공자의 애제자 안회(顔回, BC521-BC481)를 모신 사당 안묘(顔廟)를 찾았다.

안묘 근처에서 내려 안회가 살았다는 좁고 더러운 거리라는 뜻의 누항(陋巷)을 가로지르자 돌로 된 누항 패방이 보인다. 13살에 공자의 제자가 된 안회는 누항의 가난한 집과 공자의 사숙을 오가며 공부를 했을 것이다. 가난하지만 즐겁게 공부하는 안회의 모습을 공자는 <논어>에서 "한 주먹 도시락밥과 한 쪽박의 물을 마시고, 누추한 골목에 살면 사람들은 다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거늘, 안회만은 그렇게 사는 즐거움을 버리지 않는구나(一單食,一瓢飮,在陋巷,人不堪其憂,回也不改其樂)"라고 적고 있다.

안회는 이 누항의 가난한 집과 공자의 사숙을 오가며 공부를 했을 것이다.
▲ 누항 패방 안회는 이 누항의 가난한 집과 공자의 사숙을 오가며 공부를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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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항이 적힌 패방 맞은편으로 돌로 된 복성묘(複聖廟) 패방과 안묘의 정문인 복성문이 보이는데, 무슨 이유인지 문이 굳게 닫혀 있어, 돌아서 매표소가 있는 약예문(約禮門)으로 향한다. 3공을 관람할 때는 <논어> 다섯 구절을 외워서 공짜로 관람할 수 있었는데, 안묘는 하는 수 없이 50위안 입장권을 살 수밖에 없다. 약예문을 들어서자 고목이 우거진 정원이 펼쳐진다. 그 맞은편에 박학문(博學門)이 있는데 "예로써 자신을 구속하고, 만물의 이치를 알고자 널리 학문을 구하라"는 <논어>의 구절에서 따온 이름들이다.

정원에는 500년 이상의 고목과 함께 안회의 인품과 학문을 칭송하는 비석들이 도처에 놓여 있다. 정원을 조금 걷자 누항고지(陋巷故址) 라는 표지석이 보이고, 그 옆에 누항정(陋巷井) 우물이 있다. 안회는 당나라 때 선사(先師)로 불리다가, 원나라 때는 연국복성공(兗國復聖公)에 봉해졌다. 1317년 누항정을 근거로 이곳에 안묘를 건설해, 안묘는 복성묘로도 불리니, 안회가 마셨다는 우물인 누항정이 안묘 건설의 좌표 역할을 했던 셈이다.

안회가 금방이라도 달려올 것 같은 우물

일단사, 일표음의 고사로 유명한 안회의 우물 누항정이다.
▲ 누항정 일단사, 일표음의 고사로 유명한 안회의 우물 누항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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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안묘 건축물은 1597년 만력 연간에 개수된 것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안회가 금방이라도 달려와 표주박으로 물을 마시고 갈 것만 같다. 안회가 살던 옛 거리의 모습은 이미 사라졌지만, 안회가 마셨다는 이 우물만은 마르지 않고 그 자리에 아직도 안빈낙도(安貧樂道)의 군자를 기다린다.

우물을 지나자 귀인문(歸仁門)이다. 그 오른쪽에 극기문, 왼쪽에는 복례문이 자리해 있다. 안회가 공자에게 인(仁)에 대해서 묻자, 자신을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는데, <논어>의 극기복례(克己復禮)가 문으로 일으켜 세워져 있다. 원나라 때는 귀인문이 안묘의 정문이었으며 명, 청대에 보수된 것이다. 사당이 역사적으로 증축되며 문이 늘어나고 규모가 커진 것은 공묘, 맹묘, 안묘가 다 비슷하다.

귀인문 안 쪽으로 명 6대조 영종의 세운 정통비정(正統碑亭)과 명 10대조 무종의 정덕비정(正德碑亭)이 나란히 자리해 있다. 크기나 비정의 정교함 등이 공자 공덕비 못지않다. 공자의 제자인 안회에 대한 평가가 역사적으로 이렇게 높았나 하고 새삼 놀란다. 안묘에는 모두 60여 개의 비석이 있는데 안회와 안회의 부모에 관한 행적이 적혀 있다.

가난한 가운데서도 즐겁게 학문을 구했던 안회의 안빈낙도가 떠오르는 곳이다.
▲ 낙정 가난한 가운데서도 즐겁게 학문을 구했던 안회의 안빈낙도가 떠오르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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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회야말로 학문을 즐기는 낙지자(樂之者)가 아니었을까.
▲ 낙정 안회야말로 학문을 즐기는 낙지자(樂之者)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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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회 죽음에 예법까지 어겼던 공자

두 비정을 지나자 높은 산처럼 우러른다는 <시경>의 '고산앙지(高山仰止)'에서 따온 앙성문(仰聖門)이 나온다. 앙성문을 지나자 낙정(樂亭)이라는 정자가 고목 속에 예쁘게 자리해 있다. 검은 비석에 붉은 글씨로 새겨진 '낙정'이라는 비석 앞을 한참 서성인다.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고 하는데, 안회야말로 학문을 즐기는 낙지자(樂之者)였던 모양이다. <논어> 전반에 공자의 안회에 대한 칭찬이 넘치는데 안빈낙도와 함께 최고의 찬사가 아닐 수 없다. 공자 또한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聞一知十) 제자 안회가 있어 얼마나 즐거웠을까.

그런 안회가 죽었을 때 공자는 "하늘이 나를 버리셨도다(天喪予)!" 하며 자신이 만든 예법을 어기면서까지 슬퍼하며 통곡했다. 그리고 "안회를 위해 통곡하지 않으면 내가 누구를 위해 통곡한단 말이냐(非夫人之爲慟而誰爲)!" 하며 안회의 죽음을 육친의 죽음처럼 안타까워했다. "선생님이 계신데, 어찌 제가 감히 먼저 죽겠습니까(子在, 回何敢死)?"라고 했던 안회는 공자에게 군자삼락의 즐거움과 동시에 커다란 슬픔을 안겼던 셈이다. 기쁨이 넘치면 슬픔도 크고 깊은 법이리라. 낙정 근처에서 이런 저런 생각들이 오간다.

복성전은 원대에 건축되고, 명대에 개수되었다.
▲ 원대의 파스파 문자로 된 비각 복성전은 원대에 건축되고, 명대에 개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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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성전은 규모면에서 공자의 대성전보다 작고 맹자의 아성전보다는 크다.
▲ 복성전 복성전은 규모면에서 공자의 대성전보다 작고 맹자의 아성전보다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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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정을 벗어나자 바로 앞에 복성전(復聖殿)이 자리해 있다. 중앙의 계단 양 옆으로 공덕비가 서 있는데 원대 건설된 것인지 위에 파스파문자가, 아래에 한자가 적혀 있다. 원대 건축되고 명대 증축된 복성전은 가로 31m, 세로 17m, 높이 17.5m로 공자의 대성전보다 작고 맹자의 아성전보다는 크다.

앞에 선 기둥도 4개는 대성전처럼 구름 위를 노니는 용이 양각되어 있는데 가운데 두 개는 원대, 그 양옆 두 개는 명대에 추가된 것으로 명대 추가된 기둥은 아랫부분에 받침을 보강한 흔적이 보인다. 4개의 기둥에 양각된 용의 발톱은 네 개이고, 나머지 기둥에는 맹묘의 기둥처럼 은은하게 용, 연꽃, 목단 등이 음각으로 수놓아져 있다.

복성전 안에는 건륭제가 쓴 순수하게 성인의 모습을 재현했다는 뜻의 '수연체성(粹然體聖)' 글귀가 안회상 위에 붙어 있고, 그 주변으로 <논어>에 언급된 공자와 안회의 일화들이 목각으로 빙 둘러쳐져 조각돼 있다. <논어>에서 공자는 늘 자신을 낮추면서 제자 안회를 치켜세우며 격려한다. 인(仁)을 공자 자신은 한 달 지키지만, 안회는 세 달을 실천한다며 '후생가외(後生可畏)'라고 너스레를 떤다. 화를 다른 사람에게 옮기지 않고, 같은 잘못을 두 번 범하지 않는다(不遷怒, 不貳過)는 칭찬도 안회의 몫이었다.

<논어>의 구절구절들이 복성전 안에 새겨져 있는 셈이다. 목조 건물인지라 번개로 인한 화재가 자주 발생했던지 천정에는 물을 뿜는 용이 한 가운데 똬리를 틀고 있다. 아름다운 조각으로 천정을 장식한 것을 조정(藻井)이라고 하는데 복성전 안의 용 문양이 예사롭지 않다. 안회처럼 크게 두드러지지 않지만, 묵묵히 실력을 키우는 와호장룡의 풍모가 느껴진다.   

공묘와 맹묘의 중간자적 위치를 확인시켜 주는 듯하다.
▲ 양각과 음각이 조화를 이룬 돌기둥 공묘와 맹묘의 중간자적 위치를 확인시켜 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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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회처럼 크게 두드러지지 않지만, 묵묵히 실력을 키우는 와호장룡의 풍모가 느껴진다.
▲ 조정(藻井) 안회처럼 크게 두드러지지 않지만, 묵묵히 실력을 키우는 와호장룡의 풍모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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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회 부인에게 제사 지내던 침전

복성전 뒤로 침전(寢殿)이다. 안회의 아내인 대부인(戴夫人)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지금은 중국의 건축 양식을 소개하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중국 고대 건축물에 대해 이해하기 좋도록 실물과 사진을 곁들인 안내문이 친절하게 붙어 있다.

나오는 길에 복성전 좌측의 서무(西廡)에 들렀더니 안회의 후손이 소개되어 있는데, <삼국지>에 나오는 안량(顔良)과 당대의 서예가 안진경이 익숙한 이름이다.

<논어>에서 안회는 거의 자신의 목소리가 없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배움의 즐거움을 즐기며, 스승의 가르침을 묵묵히 실천하는 모습이다. 행동이 말을 이긴다는 '행승어언(行勝於言)'의 진리를 몸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유교정신은 공자의 입에서 나와 안회에 의해 실천되었다고 할 만큼 안회는 스승의 가르침을 몸으로 체현한 뛰어난 제자이자, 성인의 모습을 다시 재현해낸 복성(復聖)으로 자리매김 된 셈이다. 안묘를 둘러보고 새삼 안회가 공자의 제자의 반열에서 벗어나 이미 성인의 반열에 올랐음을, 그 크고 높은 위상을 확인한다.

그만두고자 하나 그만 둘 수 없게(欲罷不能) 제자의 분발을 이끄는 스승과 그 스승을 쫓아 겸손하게 노력하는 제자, 아름다운 사제의 훈훈한 정이 묻은 안묘를 거니는 것은 그래서 더 행복하다. 비에 씻긴 안묘가 유월의 햇살 아래 초록으로 빛난다.


태그:#안회, #안묘, #복성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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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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