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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8일 광복 70주년 기념 창작 뮤지컬 <덕혜옹주>가 3개월간(4월 3일~6월 28일)의 대장정을 마쳤다. 2013년 첫 공연을 시작으로 올해 세 번째 공연이다. 필자는 이 공연을 보기 전까지 덕혜옹주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또한 뮤지컬을 처음 경험한 필자에게 아름다운 음악과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와 노래가 그려내는 덕혜옹주의 비극적인 삶은 난생 처음 칼날에 베인 경험을 했던 그 순간처럼 강렬하게 다가왔다. 이 리뷰는 덕혜옹주를 영원히 기억하겠다는 다짐이며, <덕혜옹주>라는 훌륭한 예술 작품에 대한 찬사다.

다케유키의 선택

뮤지컬 <덕혜옹주>는 다케유키가 처음 정혜가 실종된 이유를 알지 못하다가 자기 자신과 덕혜와 정혜에 대한 기억들을 더듬으며 결국 그 이유를 찾게 된다는 이야기다. 그는 두 가지 선택을 한다.

하나는 덕혜와의 결혼이고 다른 하나는 그녀를 정신 병원에 보내는 것이다. 스스로 최선의 선택이라고 믿었지만 딸을 잃은 이후 "아내를 놓는 순간 내 딸도 놓아버린 것"이라며 후회한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그의 아내는 없었다. 가족은 어떠한 때라도 늘 함께해야 한다는 것을 그는 뒤늦게 깨닫는다.

덕혜와 정혜

이 뮤지컬의 가장 큰 특징은 덕혜의 삶과 그의 딸 정혜의 삶을 절묘하게 교차한다는 것이다. 이 점은 이 작품의 메인 넘버라고 할 수 있는 <two name>에서도 잘 나타난다.

정혜 - "내 이름은 소 마사에, 또 다른 이름 정혜. 조선 왕실의 딸 일본 귀족의 딸. 사람들은 나를 아는데 나는 나를 모르겠어. 나는 누구지?"

덕혜 - "내 이름 이덕혜 내나라 조선의 옹주 난 나를 알고 있는데 저들은 나를 모른척해... 내 이름은 이덕혜 잊지 말아. 혼자란 게 너무 힘들어 버텨내기 힘들겠지만 버텨내야 해."

정혜는 자신이 누군지 사람들은 알고 있는데 정작 자신이 누군지 혼란스럽다. 반면 덕혜는 자신이 누군지 정확히 알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녀를 모른 척한다. 정혜는 '조센진'의 피가 흐른다는 이유로 아이들에게 왕따를 당해 기억을 잃고 길을 헤매는 끔찍한 경험을 한다. 덕혜도 자신이 버려졌다는 것을 인정하려는 마음과 이 두려움을 버텨내야 한다는 두 마음 사이에서 극심한 갈등을 겪는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좌절하고 만다. 그러는 사이 정혜 역시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오는 두려움과 어머니 덕혜의 부재에서 오는 외로움으로 차츰차츰 병들어간다. 그녀 역시 결국에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어머니를 놓아 버린다. 어머니에서 딸로 이어지는 비극의 전이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정혜는 어머니의 병을 그대로 물려받고 임신도 하게 된다. 어머니를 버렸다는 죄책감과 어머니의 병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이런 자신이 아기를 잘 키울 수 있을까하는 불안에 휩싸인다.

'기억 하기'라는 치유책

1956년 8월 26일 23살의 정혜는 10년 만에 어머니를 만난다. 덕혜의 병실에서 자신이 그렸던 그림들을 보고 기쁨의 눈물을 흘린다. 자신이 잊고 있던 소중한 것들을 어머니는 간직하고 있었다. "고마워 기억해 줘서. 그걸 알아. 이상해도 내 엄마라는 걸" 어린 시절 수도 없이 부정했던 어머니의 존재를 이제야 인정하는 것이다.

그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정혜는 홀연히 모습을 감춘다. 낙선재로 돌아온 초로의 덕혜는 벤치에 쓸쓸히 앉아있다. 그녀는 다시 노래한다. "들리나요? 돌아봐 주세요. 울고 있는 아이가 있으면 안아 주세요 내 딸 정혜일지 몰라요" 이 작품의 배우이자 작가인 문혜영씨는 정혜는 우리 모두라고 말한다. 비록 우리가 덕혜와 정혜처럼 불운의 역사 속에서 살고 있지 않지만 그들이 겪었을 아픔을 비슷하게 겪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어머니고 아버지며 동시에 아들이며 딸이다. 그리고 불가해한 운명의 소용돌이(갑작스런 사고, 이별, 외로움, 혼란 등)에 휩쓸리기도 하며 세상을 살아간다. 이 세상 누군가는 덕혜와 정혜가 겪었을 아픔을 혹은 그 이상의 아픔을 겪고 있을지 모른다. 작가는 덕혜가 자신의 고독과 싸우면서 가족에 대한 끈을 놓지 않음으로써 그 고통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고 그 모습에서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이 작품의 마지막 넘버는 우리 모두에게 말하고 있다. 주위를 둘러보고 누구든지 고통 받는 사람이 있다면 꼭 안아주고 기억해주고 힘내라고 말해주라고 권유하는 것이다.

애도하기

그런데 왜 덕혜옹주는 정신 질환을 앓을 수밖에 없었을까? 그녀의 삶은 상실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권을 빼앗긴 나라의 옹주로 태어나 여덟 살 때 아버지를 잃고 13살 때 조국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얼마 후 오빠인 순종이 죽고 잇따라 어머니도 죽었다.

채 20살이 되기 전에 이 모든 일을 겪어야 했다. 아마도 인간이 겪는 아픔 중 가장 큰 고통을 주는 것은 상실감일 것이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이나 가족을 잃었을 때는 그 상실감이 어마어마하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녀의 상처를 보려고 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조차도 그 슬픔을 토해내지도 못했다. 일제가 그녀에게 상복을 입는 것조차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처를 극복하는 방법은 그것을 자꾸 마주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고 무의식으로 밀려나게 되면 그것은 영원히 치료할 수 없는 트라우마가 되고 만다.

덕혜는 그런 상황 속에서도 정혜를 기억함으로써 자신의 딸을 구원하고자 했던 것일는지 모른다. 자신은 어떤 구원도 받지 못한 채 말이다. 그러나 뮤지컬 <덕혜옹주>를 통해 우리는 덕혜를 눈물로써 애도할 수 있었다. 뮤지컬이라는 유령적 공간에 3개월 동안 잠시 소환되었던 덕혜와 정혜를 보고 관객은 수 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기억할 것이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를.

글을 마치며

지난 6월 29일은 삼품백화점 참사가 일어난 지 20주년 되는 날이었다. 이날 방송된 JTBC 뉴스룸 '앵커브리핑'에 따르면, 당시 정부는 사고 보름 만에 현장 잔해 3만 4천 톤을 당시 난지도 쓰레기장에 매립했다고 한다. 실종자 상당수의 시신을 미처 찾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한 유족은 뼈 하나 찾지 못해서 지금도 눈을 감으면 눈물이 난다고 말한다.

연이은 대형 참사가 있을 때마다 국가는 그것을 마냥 덮으려했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까지 이런 일이 끊임 없이 되풀이 되는 것은 책임이 있는 정부가 빨리 잊고 싶어 하고 진정으로 애도해주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 아닐까. 세월호는 아직도 진도 해역 검은 물밑에 가라 앉아 있다. 그리고 희생자를 위로하기 위해 거리로 나온 시민에게, 위로받고자 하는 유족에게 어떤 애도의 기회도 제대로 허락하지 않고 있다. 기억해주고 진정으로 애도해주는 것, 그것은 망자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을 구원해 줄 유일한 치료책이다.

덕혜옹주는...

1912년 5월 25일 출생. 여덟 살 되던 해인 1919년 아버지 고종을 잃음. 열 세 살 되던 해인 1925년 일제의 볼모로 일본에 끌려감. 1929년 귀인 양씨의 죽음, 이 즈음 조발성치매(정신분열) 진단을 받음. 1931년 일본 귀족 소 다케유키와의 강제 결혼, 1946년 이혼과 동시에 정신병원 입원. 1956년 8월 26일 그녀의 유일한 딸 정혜(소 마사에)의 죽음. 1962년 귀국. 1989년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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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덕혜옹주, #삼품백화점, #세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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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땐 영문학 전공, 대학원땐 영화이론 전공 그런데 지금은 회사원... 이직을 고민중인 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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