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숫자세기와 구구단

숫자세기와 구구단에 절망한 아이들
▲ 너무 어려워 아빠 숫자세기와 구구단에 절망한 아이들
ⓒ 이희동

관련사진보기


나들이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둘째 산들이가 창밖으로 무언가를 보더니 하나, 둘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기려는데 문득 들어보니 그 숫자의 순서가 가관이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일곱, 아홉, 스물!"
"응? 산들아, 숫자 다시 한 번 세어 볼래?"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아홉, 백!"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산들이 나이 어느덧 다섯 살. 어렴풋한 기억에 까꿍이는 저 나이에 숫자를 알아서 깨친 것 같은데 이 녀석은 왜 이 모양인가. 물론 난 다섯 살 때야 비로소 말을 하기 시작했다지만 어디 요즘 시대가 나 어릴 때와 같던가. 설마 하는 마음에 다시 숫자 세기를 시켜봤지만 녀석은 그대로였다. 결코 농담이 아니었다.

답답한 마음에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 중인데 옆에서 까꿍이가 그런 산들이를 보며 낄낄 웃어대기 시작했다. 어쨌든 자신은 별다른 도움 없이 숫자를 깨쳤는데 산들이는 아직 그것도 모르냐며 놀리는 것이었다.

괘씸한 생각에 까꿍이에게 그렇게 동생을 놀리면 안 된다고, 너도 지금은 숫자를 잘 알지만 학교를 들어가게 되면 지금 네가 아는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걸 배우고 외워야 된다며 꾸짖었다. 그리고 예를 든다며 구구단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이 일은 이, 이 이 사, 이 삼 육, 이 사 팔...

내가 구구단을 외워야 한다고?
▲ 좌절한 까꿍이 내가 구구단을 외워야 한다고?
ⓒ 이희동

관련사진보기


아이는 3단쯤 듣고 나서 얼굴이 사색이 되더니 4단쯤 듣더니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아빠 입에서 쉴 새 없이 나오는 숫자들의 향연에 기겁을 한 것이다. '저렇게 긴 숫자놀음을 학교에 가면 외워야 한다니, 이제 난 곧 1학년인데, 할 수 있을까?' 아마도 녀석의 눈물에는 이런 두려움이 묻어 있었을 것이다.

결국 까꿍이는 산들이에게 사과했다. 그리고 그 엄청난 구구단의 위압감에 좌절했는지 창밖 베란다에 누워 혼자 끙끙 앓았다. 아빠로서 그런 모습이 안쓰럽기도 했지만 언젠가 한 번은 겪을 일이려니 하고 두고 볼 뿐이었다.

그래도 사교육은 지양한다, 뭘 믿고?

까꿍이만 글씨를 안다는 게 함정
▲ 누나 따라 독서 삼매경 까꿍이만 글씨를 안다는 게 함정
ⓒ 정가람

관련사진보기


다섯 살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열까지 숫자도 제대로 세지 못하는 산들이에 대한 충격은 오래가지 않았다. 설마 녀석이 커서까지도 숫자를 못 세겠나.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겠지. 까꿍이도 자기 스스로 숫자며 한글까지 거의 다 뗐는데 산들이도 그렇게 되겠거니.

혹자는 이와 같은 나의 태도를 힐난하며, 하루빨리 아이들을 교육시켜야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아내와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무엇보다 사교육 시장에 아이들을 일찍 노출시키기 싫었다.

어차피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그때부터 놀 시간도 얼마 없을 텐데, 그 전까지는 재미있게 노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책을 봐도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사회성을 기르고, 삶을 살아가는 기본적인 자세를 배운다고 하지 않는가. 어쩌면 지금 우리 사회가 기본부터 흔들리는 건 아이들이 놀면서 세상을 인지하는 시기에 심성을 가꾸는 대신 과다한 경쟁에 내몰려 약육강식의 삶을 강요받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제 제법 글을 쓰는 아이
▲ 까꿍이의 글씨 이제 제법 글을 쓰는 아이
ⓒ 정가람

관련사진보기


자기 전 편지를 써 놓는 까꿍이
▲ 까꿍이와의 필담 자기 전 편지를 써 놓는 까꿍이
ⓒ 이희동

관련사진보기


그러나 이런 생각만으로 현재 우리 사회에 만연한 사교육 광풍을 이겨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나의 의견이 옳다고 하더라도 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아이들에게 사교육을 시킨다면 나 역시 '그래서 우리 아이들만 뒤떨어지면 어떡하지?'라는 죄수의 딜레마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이들을 우리의 생각대로 놀리면서 키우려면 위와 같은 철학 이외에 또 하나의 전제가 필요하다. 아이들에 대한 믿음이 그것이다. 모든 아이들은 무궁한 발전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이 발전은 스스로 동기부여를 할 때 극대화되며, 그 동기부여는 결코 억지로 할 수 없다는 믿음.

다행히 나의 경우는 이와 같은 신념이 강한 편이었다. 나의 성장과정을 되돌아보며 '그래도 내 자식인데'라는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최소한의 사교육을 하더라도 자기만 노력하면 좋은 대학을 갈 수 있고, 혹여 좋은 대학을 가지 못하더라도 열심히 자신이 하고 싶은 바를 추구하면 결국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지금까지 내가 삶을 살아온 방식이었고, 아이들이 그렇게 컸으면 하는 바람이기도 했다.

글씨 쓰기는 재미없어
▲ 소리에 민감한 아이 글씨 쓰기는 재미없어
ⓒ 이희동

관련사진보기


아내는 내가 진담 반 농담 반으로 아이들에게 건네는 '얘들아, 최소한 아빠 나온 대학은 가야 된다'라는 말이 아이들에게 나중에 스트레스가 된다며 핀잔을 주기도 하지만, 그건 스스로에 대한 하나의 최면이었다. 이렇게 아이들을 키워도 잘 키울 수 있다는. 

하지만 최근 우리 사회 분위기는 이와 같은 나의 낙관적인 사고방식을 거세게 흔들고 있다. 사회의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이런 나의 생각이 엄청난 착각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더 이상의 계층 이동 사다리는 없다

이제 더 이상 계층 이동 사다리는 없다
 이제 더 이상 계층 이동 사다리는 없다
ⓒ JTBC

관련사진보기


지난달 22일 서울대 로스쿨 교수팀이 발표한 논문 '로스쿨 출신 법률가, 그들은 누구인가?'는 우리 사회의 민낯을 제대로 보여주는 연구 결과였다. 내용인 즉 최근 법조인이 된 사람들 중 고소득층·고학력 집안 자녀의 비율이 과거보다 늘어났다는 것인데 이는 사법고시나 로스쿨 제도 모두 '개천에서 용 나는' 가능성을 높이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사실 이와 같은 연구 결과가 새삼스러운 건 아니다. 그동안 우리는 사회가 양극화 되면서 수많은 '계층 이동 사다리'가 걷어차이는 것을 봐왔다. 소위 SKY 대학 안에서도 서울 강남출신의 비율은 꾸준히 높아져 오지 않았던가. 이번의 로스쿨 출신 관련 발표도 결국 그와 같은 맥락일 뿐이었다. 다만 문제는 그와 같은 뉴스를 받아들이는 나의 입장이었는데, 그게 예전 같지 않았다.

예전에 나는 위와 같은 뉴스를 접하면 으레 그러려니 할 뿐이었다. 급격한 산업화가 끝나고 사회구조가 안정되면서 벌어지는 계급 고착화는 당연한 현상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신자유주의 이후 너무 심각하게 벌어진 계급 간 격차는 문제점으로 인식하고 있었지만, 소위 명문대를 졸업하고 대기업까지 다녔던 내게 그 문제는 사회적인 고민이지, 개인적인 고민이 아니었다. 내가 노력만 하면 그 격차는 언제든지 극복할 수 있다는 자만이 있었다.

아직 '이'자가 녀석이 아는 전부다
▲ 산들이의 도전 아직 '이'자가 녀석이 아는 전부다
ⓒ 정가람

관련사진보기


그러나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학교에 갈 때쯤이 되고 나니 위와 같은 뉴스가 허투루 들리지 않았다. 결국 그것은 우리 아이 이야기였고, 또한 그 아이를 키우는 나의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과연 우리 아이들은 계층 이동 사다리를 탈 수 있을까?

돌이켜 보건대 30대 후반인 우리 세대는 스스로가 노력을 하면 소위 명문대까지는 갈 수 있었던 세대였다. 물론 그 명문대를 나와 어디에 취직하느냐는 것은 IMF 이전 취업원서로 종이비행기를 날렸다는 선배들과 비교하여 전혀 다른 문제였지만, 어쨌든 당시 학교 안에는 다양한 지역의, 다양한 계층의 학생들이 섞여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자유로운 상상을 하며 다양성의 중요성을 체득했었다.

반면 나의 아이 세대는 어떨까. 과연 많은 자본을 투입하지 않더라도 개인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명문대를 갈 수 있고, 계층 간 이동의 가능성을 높일 수 있을까? 지금까지 나는 우리 세대의 사례에 비추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는 통계 숫자들은 이제 우리 사회가 그런 사회가 아님을, 이미 닫힌 사회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수많은 아이들이 연예인 되기에 목매다는 것은 결국 남아있는 사다리가 그것뿐이기 때문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갑갑해졌다. 과연 지금처럼 아이들을 놀리면서 키우는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워졌다. 내가 아는 정답은 끊임없이 아이의 잠재력을 믿고 기다리라고 했지만, 지금 같은 극한 경쟁 시대에, 그리고 계급 간 이동이 거의 불가능해진 시대에 이런 교육방식이 옳은지 확신할 수 없었다.

게다가 더 큰 비극은 그래서 사교육을 시킨다고 하더라도 현재 우리의 능력 상 아이들이 계급 간 격차를 뛰어넘을 정도의 교육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아이들에게 영어교육을 시킨다며 한 달에 최소 60만~70만 원 이상의 자금을 들이는 집도 있었는데, 이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또한 그렇게 해서 아이가 좋은 대학교를 나왔다고 치자. 과연 그 아이의 삶이 더 나아질까? 엄청난 스펙을 가지고 있어도 청년실업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이 시대에, 든든한 집안 배경 하나 없이 많은 돈을 들여 대학교를 졸업한다고 한들 그 아이는 무슨 일을 만족스럽게 할 수 있을까?

공부보다는 아직 놀 나이
 공부보다는 아직 놀 나이
ⓒ 정가람

관련사진보기


결국 돌고 돌아 원점이다. 사교육을 시켜도 문제, 안 시켜도 문제라면 차라리 아이들의 잠재력을 믿고 안 시키는 게 차라리 낫지 않을까? 이런 아빠 마음을 아는지 어젯밤 구구단 때문에 경악을 금치 못했던 까꿍이가 슬며시 와서 귓가에 속삭인다. 

"아빠, 구구단 가르쳐줘. 어떻게 하는 거야?"

그래, 이런 배움의 의지가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이겠지. 나도 아이들을 믿으며 조금 더 지켜보기로 마음먹는다. 그나저나 산들아. 오늘밤은 아빠와 꼭 숫자 열까지 세어 보자.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 편집ㅣ홍현진 기자



태그:#육아일기
댓글10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3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