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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눈을 감지 않는다 표지
 물고기는 눈을 감지 않는다 표지
ⓒ 바다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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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고 난 후 리뷰를 보던 중 해석 불가능한 문장을 만난 적이 있다. '<인터스텔라> 안 본 눈 삽니다.' 나는 이 문장을 곱씹고 곱씹은 후에야 글쓴이의 위트와 애절함에 다가갈 수 있었다. 영화가 얼마나 인상 깊었으면, 얼마나 재미있었으면, 영화를 보기 전의 눈으로, 그러니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을까.

나 역시 에리 데 루카의 소설 <물고기는 눈을 감지 않는다>를 읽고 비슷한 생각을 했다. 이 소설을 안 본 눈을 사고 싶다는 게 아니라, 한 번도 사랑하지 않았던 그 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사랑이란 감정이 무엇인지, 사랑이 얼마나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 그 결과가 때론 얼마나 기적 같거나 참혹할 수 있는지 등등을 모르던 때로 말이다.

만약, 돌아갈 수 있다면 아마 열 살 즈음이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이 지닌 특별한 점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관심을 오로지 거기에만 집중시킬 때의 감정을. 단둘이 떨어져 있으며 깊은 대화를 나누려고 계속 애쓰는 감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 본문 중에서

소설의 주인공인 소년의 나이는 열 살이다. 처음으로 두자리 숫자로 나이를 쓸 수 있게 된 소년. 하지만 유년기가 끝난 소년에겐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소년의 몸도 마찬가지다. 소년은 여전히 유년기 아이의 몸속에 갇혀 있다. 내면은 이미 어른을 이해할 수 있는 정도로 커버렸는데.

아버지의 책을 읽으며 어른들을 알아갔다. 소년이 보기에 어른들은 "거대한 몸을 가진 기형적인 어린이들이었다." 상처도 잘 받고, 죄도 잘 짓고, 감상적이기도 한 어른들의 행동이 소년에겐 쉽게 예측되었다. 이런 어른들을 소년은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그들이 사랑하는 방식이 싫었다.

소년이 보기에 어른들의 사랑은 과장됐다. 어른들은 사랑 앞에서 쉽게 흥분했고, 흥분의 결과로 결혼을 하기도 했다. 결혼의 결과는 소년이거나 소년의 동생이거나, 싸움이거나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였다. 결과는 때로 증오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소년은 사랑에 대해 알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당시 소년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지속하다'였기 때문이다.

지속하다. 열 살 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였다. 이 말은 손을 잡는다는 약속, 지킨다는 약속을 담고 있었다. 이 말이 나에게 필요했다. - 본문 중에서

그러던 중, 여름 방학을 맞아 바닷가 근처로 여행을 온 소년의 눈에 한 소녀가 들어온다. 소녀는 추리소설을 읽고 있었는데, 주위에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소년과 비슷했다. 처음에 소년은 소녀에게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 소녀의 몸을 보아도 아무 느낌이 없었다. 그러다 그만 바다 속에서 소녀의 손을 잡게 되었다.

난 그때까지 그렇게 매끄러운 피부를 만져 본 적이 없었다.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다. 나는 그 아이의 손바닥이 조개껍데기보다 더 오목하다고 말했다. 해변으로 나와서 우리는 떨어졌다. "네가 방금 한 말이 사랑의 말이라는 거 알아?" 소녀가 파라솔 쪽으로 가면서 말했다. - 본문 중에서

물론, 소년은 소녀의 손바닥을 조개껍데기로 비유한 자신의 말이 사랑의 말이라는 걸 몰랐다. 소년은 자신이 사랑에 빠지리라곤 상상조차 한 적이 없으니까. 또한, 소년은 사랑에 대해선 알고 싶지도 않았고, 그 결과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미 사랑은 시작됐고, 이 사랑은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소녀는 정의의 이름으로 두 녀석을 처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두 녀석은 소녀를 좋아하게 된 나머지 소녀와 붙어 다니던 소년을 흠씬 두들겨 팬 녀석들이다. 소년은 만신창의가 되어 병원에 입원했다. 소년은 두 녀석을 용서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소녀는 안 된다고 했다. 누가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었다면, 그 또한 고통을 받게 해야 한다는 게 소녀의 의지였다.

소녀의 정의는 단호했고, 두 녀석은 소녀를 위해 싸워야했고, 고통 받아야 했고, 소녀가 소년에게 키스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이로써, 소녀는 정의도 사랑도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소년도 그랬을까.

소년 소녀가 처음으로 사랑을 알게 됐을 때

에리 데 루카는 서문에서 책 내용을 이렇게 설명했다. "어느 여름 사춘기 소년소녀가 정의의 문제를 통해 감정을 만들어 나갑니다. 소년과 소녀에게 정의란 법에 의한 구현이 아니라 선과 악을 몸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사춘기 시절에는 한 개인의 미래를 결정할 사건들이 벌어집니다. 소년과 소녀는 갑자기 개성이 확고하게 형성되는 지점에 도달하게 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이 될지 알게 되는 겁니다."

에리 데 루카의 말대로 그 여름 바닷가에서의 사랑은 소년과 소녀의 개성을 드러내주었고, 그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게 될 건지에 대한 지도를 흐릿하게나마 그려주었다. 그 어린 날, 정의에 대해선 소년과 소녀는 다른 입장이었다. 하지만 사랑에 대해선 같았다. 소년소녀는 처음으로 사랑을 알게 되었다.

"놀라워." 입술을 뗐을 때 느릿느릿 내가 말했다.
"이건 너를 위한 키스야. 다시 물어보는데, 사랑이 좋니?"
"이게 사랑이라면, 음, 좋아, 좋아. " - 본문 중에서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가 처음으로 내게 키스해 왔던 때, 눈을 감아야 하는지도 몰라 물고기처럼 눈을 뜬 채 그 누군가가 내게 다가오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던 때, 그 때 그게 사랑이라는 걸 알았다면, 그 때 사랑하는 일이 우리네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알고 있었다면, 난 눈을 꼭 감고 그 짧은 순간의 감정과 감동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했을 것 같다. 사랑을 모르던 때로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난 내게 올 모든 사랑을 열렬히 사랑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물고기는 눈을 감지 않는다>(에리 데 루카/바다출판사/2015년 06월 15일/1만2천원)



물고기는 눈을 감지 않는다

에리 데 루카 지음, 이현경 옮김, 바다출판사(2015)


태그:#에리 데 루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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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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