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에서는 종종 벤치클리어링이 벌어진다. 흔히 볼썽사나운 감정싸움으로 비치기 쉽지만 어떤 의미에서 벤치클리어링은 팀의 단합과 집중력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신경전이 벌어졌을 때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팀원들이 모두 그라운드에 뛰쳐나가 동료를 보호하는 것은 야구의 오랜 불문율이다. 때로는 벤치클리어링이 경기흐름을 바꾸고 승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적지않다.

잠실 라이벌 두산과 LG의 시즌 10번째 맞대결에서도 벤치클리어링이 승부의 흐름에 미묘한 영향을 끼쳤다. 두산은 1일 잠실에서 열린 LG와의 경기에서 초반 열세를 뒤집고 8-4로 화끈한 역전승을 거뒀다.

3-3 동점 상황에서 벌어진 벤치클리어링

3회말 벌어진 LG 우규민과 두산 오재원의 벤치클리어링이 분수령이었다. 양팀이 3-3으로 팽팽히 맞선 가운데 LG 선발 우규민은 2사 후 타석에 들어선 오재원과 풀카운트 접전끝에 머리 쪽으로 향하는 실투성 공을 날렸다. 고의성은 보이지 않았지만 자칫하면 오재원의 머리에 맞을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오재원이 재빨리 몸을 숙이면서 공은 등쪽을 스쳐 뒤로 빠졌지만 다행히 큰 부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깜짝 놀란 오재원은 우규민을 잠시 응시하더니 손가락으로 제스처를 취하며 불만을 드러냈지만 이내 1루로 걸어나갔다. 그런데 오재원이 1루로 가는 과정에서 다시 우규민과 언쟁이 벌어졌다.

우규민은 공이 몸에 맞지 않았다고 따졌고 오재원은 자신의 등쪽을 가리키며 맞았다고 맞서면서 다시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두 선수가 언쟁을 주고받으며 거리가 가까워지는 상황에서 LG 포수 최경철이 중간에서 이를 말리려고 달려나오다가 오히려 오재원을 다소 과격하게 밀치는 모양새가 됐다. 이는 결국 양팀 선수들을 모두 자극하는 빌미가 됐고 벤치클리어링으로 이어졌다. 양팀 선수들은 잠시 신경전을 벌였지만 베테랑들의 만류와 중재로 다행히 더이상의 마찰없이 상황은 곧 진정됐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이 벤치클리어링은 두산에게는 전화위복이, LG에게는 혹 떼려다가 혹 붙인 꼴이 됐다. 일단 충돌의 직접적인 빌미가 된 우규민의 대응은 현명하지 못했다. 어차피 풀카운트였고 몸에 맞지 않았더라도 오재원은 볼넷으로 1루에 걸어나가는 상황이었다.

본인은 고의성이 없는 실투였다고 할지 몰라도, 타자 입장에서는 머리 쪽으로 공이 날아왔다는 것만으로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다. 명백히 몸쪽으로 날아온 공에 대하여 실투를 던진 투수가 '안 맞았잖아?' 하고 타자에게 따지는 것은 불필요한 행동이었다.

방송 리플레이 결과 우규민의 공은 오재원에게 정통으로 맞지는 않았지만 등쪽을 스치면서 살짝 굴절되는 모습이 잡혔다. 어쨌든 오재원은 이미 1루로 걸어나가는 상황이었고, 투수 입장에서는 앞선 장면을 두고 주자와 일일이 실랑이를 벌이기보다는 빨리 마음을 추스르고 다음 타자와의 대결에만 집중했어야 했다.

우규민, 다음 타자와의 대결에 집중했어야...

우규민의 대응은 심리적으로 먼저 평정심을 잃은 데서 비롯됐다. 우규민은 벤치클리어링이 발생하기 전에 두산 타선에 7피안타를 허용한 상황이었고, 3회말에는 3-1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로메로에게 투런 홈런을 내주면서 3-3 동점까지 따라잡혔다.

초반부터 경기가 풀리지 않는 상황에서 오재원과의 쓸데없는 신경전과 벤치클리어링은 결과적으로 우규민의 투구 리듬을 더욱 흐트러뜨리는 빌미가 되고 말았다. 결국 우규민은 4이닝 9피안타 4실점이라는 성적을 남긴 채 5회를 버티지 못하고 조기강판됐다. 우규민의 올시즌 최소 이닝이었다.

반면 두산은 한창 상승세를 타고 있던 흐름에다가 벤치클리어링 이후 선수들의 집중력이 무섭게 높아지는 모습을 보였다. 두산은 5회 우규민을 조기 강판시킨 데 이어 로메로의 좌전 적시타로 기어코 역전에 성공했다. 두산은 6회에도 1사 1, 3루에서 상대 2번째 투수 임정우의 폭투와 김현수와 로메로의 연속 안타로 3점을 추가하며 승기를 잡았다.

마운드에서도 첫 3이닝 동안 3점을 내주며 험난한 출발을 보였던 두산 선발 앤서니 스와잭은 이후 3이닝을 피안타 2개 무실점으로 틀어막고 6이닝 3실점(1자책)의 퀄리티스타트를 달성했다. 두산은 이날 실책을 4개나 기록했는데 공교롭게도 벤치클리어링 이후로는 수비가 집중력을 급속도로 회복하며 안정감있는 모습을 보였다.

두산은 올 시즌 LG와의 상대전적 6승 4패로 우위를 유지했다. 벤치클리어링이 다소 침체되어있는 선수단의 긴장감을 자극하고 승부욕을 끌어올리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해보였다. LG의 패배는 결국 심리전에서 두산보다 먼저 평정심을 잃은 데서 결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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