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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는 또 다른 지진 피해 현장을 찾아보기로 했다. 우리는 한 기자단체로부터 '네팔 다딩 지역과 고르카 지역으로 지진 피해를 입은 기자들을 만나러 가니 함께 가고 싶다면 같이 가자'는 제안을 받았다. 여유 있는 처지가 아니었던 우리는 때마침 잘 됐다며 동행하기로 했다.

한국에서 온 일행이 떠난 다음날인 6월 16일 오전 4시. 잠에서 깨 기자단체 일행과 함께 떠날 채비를 시작했다. 아내가 한국에서 쓴 책과 내가 쓴 동화책도 준비하고 피해 지역 기자들에게 선물할 필기구도 준비했다. 고르카 피해 지역 주민들이 함께 머물고 있는 포카라에 가서 전할 의류와 여성용품도 작은 여행가방에 가득 채웠다. 오전 5시 반, 우리는 집을 나섰다.

다딩에 지진피해지역 기자들과의 만남, 다딩은 카트만두에서 3시간이 넘게 걸렸다. 지난번 지인의 가족을 만난 다딩지역과 우리가 찾은 다딩은 매우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있었다.
▲ 다딩 기자들과의 만남 다딩에 지진피해지역 기자들과의 만남, 다딩은 카트만두에서 3시간이 넘게 걸렸다. 지난번 지인의 가족을 만난 다딩지역과 우리가 찾은 다딩은 매우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있었다.
ⓒ 김형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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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10여 분 걸었을 때부터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 부부는 카트만두 영국대사관과 인도대사관 사이 길을 빠져나가 라짐빳 엠버서더 호텔 신축공사장 앞에서 일행과 함께 타고 갈 버스 운전기사와 통화를 한 뒤 대기하고 있었다.

곧 버스를 타고 출발. 카트만두에서 출발하는 기자단과 만나기로 한 장소에 가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 네팔 전통차 찌아를 마신 후 오전 6시 50분쯤 출발했다. 우리가 있던 시기는 네팔 여름 중 무더운 때라서 카트만두에서 장거리 여정을 떠나는 이들은 가능한 오전 일찍 출발한다. 조금이라도 더운 때를 피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나는 출발 후 기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곧 잠이 들고 말았다. 8일간의 강행군에 이은 또 다른 여정의 시작인데, 휴식 없는 일정이 무리였던 걸까. 빗방울이 굵어졌다가 다시 가늘어졌을 때 도로가의 한 휴게음식점들이 즐비한 지역에서 아침 간식(Bihana Khaja)을 먹었다.

2004년 처음 네팔을 찾은 뒤 오랜 시간이 지났고, 네팔 사람들의 생활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그럼에도 오래된 식습관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네팔인들은 여전히 늦은 아침 식사를 한다. 보통은 오전 10시 전후로 아침 식사를 하고 오전 6시부터 10시 이전까지는 전통차 찌아를 곁들여 삶은 달걀을 먹거나 계란프라이 혹은 빵 조각이나 비스킷을 먹는다. 아침 간식으로 말이다.

네팔 산악 지역의 지진피해

우리 일행이 대화를 나누던 옆집도 무너져 내렸다. 건물잔해를 제거하기 위한 포크레인이 보인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포크레인의 진입도 불가능하다.
▲ 산마을에 새롭게 조성된 텐트촌 우리 일행이 대화를 나누던 옆집도 무너져 내렸다. 건물잔해를 제거하기 위한 포크레인이 보인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포크레인의 진입도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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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행은 각자 기호에 맞게 주문해 간단히 끼니를 해결하고 다시 차에 올랐다. 나는 쩌나(Jhana)라는, 익힌 콩 요리를 먹었다. 쩌나는 못 생겼지만 씹으면 단맛이 난다. 잠깐의 휴식을 취한 후 차에 올랐다. 상쾌한 느낌으로 가랑비가 내리는 창밖을 보며 멀리 산 마을을 본다. 간헐적으로 텐트가 처져 있는 모습이 마치 전봇대처럼 띄엄띄엄 거점을 형성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구불구불 산과 산을 오르내리며 3시간 30분 쯤 지나 일행이 도착한 곳은 다딩 베시였다. 다딩 베시는 다딩의 중심지 같은 곳이다. 하지만 다딩 베시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피해가 커 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곧 다딩 지역기자들을 만나고 나서 실상을 알게 됐다. 우리가 알고 있는 네팔 지진 피해 내용이 얼마나 사실과 다른지도 알게 됐다. 이번 지진에서 대부분의 인명 피해는 산악 지역에서 발생했고,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도 산악 지역이었다. 우리는 삶의 편의를 찾아 도시를 형성했다. 그리고 그곳에 중심을 두고 모든 걸을 판단하는 오류를 범했던 것이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부산스럽다. 네팔 경찰에 의해 외국인 두 사람이 동행인지 연행인지 함께 나오고 있었으며 외국인들은 거칠게 항의하기도 하였다.
▲ 사진 아래 국제식량기구가 머문 텐트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부산스럽다. 네팔 경찰에 의해 외국인 두 사람이 동행인지 연행인지 함께 나오고 있었으며 외국인들은 거칠게 항의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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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만두 기자들과 다딩 지역기자들을 만나 피해 지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뒤 피해 지역 기자들에게 책과 필기구 등 취재 편의용품을 전달했다. 그들에 의하면 다딩 지역에서도 산악 지역의 고택들이 많이 무너졌고, 그곳에서 산사태와 함께 인명 피해가 발생했단다.

그들은 "가장 큰 문제점은 접근할 수 없는 지형적 조건이었다"라면서 "그곳 마을들은 모두 훼손돼 복구가 불가능한 상태"라고 전했다. 그래서 네팔 정부에서는 헬기로 인명을 구조하고 다른 산악 지역에 그들을 이동시켜 텐트와 천막을 칠 수 있도록 지원했다고 한다. 사실은 그마저도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험한 산세 때문에 헬기의 접근이 어려웠기 때문이라는 게다.

그들과 짧은 대화를 나눈 뒤 곧장 고르카로 향했다. 다딩 베시를 떠나는데 우리가 차를 마신 근처에서 건물이 무너져 내렸다. 이 또한 지진의 여파다.

다시 구불구불 산길을 돌고 돌아 고르카 피해 지역으로 가는 길. 나는 이번에도 차에 오르자마자 곯아 떨어졌다. 다시 두 시간 정도 지나 잠에서 깼다. 늦은 식사를 위해서였다. 식사만 마친 후 다시 갈 길을 재촉했다.

고르카 지역으로 접어들었다. 멀리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다. 현장에 네팔 경찰도 나와 있었는데, 국제식량원조기구 사람들이 있는 근거지였다.

고르카에 진입하는 길에 소와 염소들이 길을 가로막았다. 아이들은 학교에 오갔고 가끔은 트렉터들이 움직였는데 그 트렉터들은 식량을 운반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했다. 도로 주변에는 건물 잔해들이 보였다.
▲ 고르카에 진입하자 건물 잔해들이 보였다. 고르카에 진입하는 길에 소와 염소들이 길을 가로막았다. 아이들은 학교에 오갔고 가끔은 트렉터들이 움직였는데 그 트렉터들은 식량을 운반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했다. 도로 주변에는 건물 잔해들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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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확한 사태를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나 일행이 기자들이라 곧 그 이유를 알게 됐다. 불과 이틀 전, 국제식량기구에서 배급한 쌀을 먹고 한 지역 주민의 몸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이다. 아마 경찰 당국에서 사실관계를 조사하기 위해 인원을 파견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이는 정확한 내용은 아니고 일부 지역에서 그런 사례들을 발생했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식량원조기구의 문제가리보다 네팔 당국이 신속한 배급을 못한 탓도 있고, 비가 오기도 해 상한 쌀이 배급됐기 때문일 듯하다. 또 지진 피해지역이 산간 오지이다 보니까 전달 과정에 시간이 많이 소요돼 발생한 문제라는 게 기자들의 대체적인 판단이었다. 누군가를 돕는 일은 선의에 의해 행해졌다고 해도 항상 좋은 평가만 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작은 데서부터 사고가 생겨서 그런 걸까.

우리는 오후 3시가 돼서야 고르카 바자르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곳 기자들은 한자리에 모이지 못했다. 그래서 지역기자 둘에게 물건을 전달한 뒤 주민들이 있는 텐트촌으로 향했다. 나는 여전히 8일 동안 못 이룬 잠을 다 자려는 사람처럼 맥없이 잠에 취했다.


태그:#최대 피해지역을 찾아서, #다딩, 고르카, #지진 피해지역 기자들과의 만남, #국제식량기구, #산마을에 텐트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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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사람의 사막에서" 이후 세권의 시집, 2007년<히말라야,안나푸르나를 걷다>, 네팔어린이동화<무나마단의 하늘>, <길 위의 순례자>출간, 전도서출판 문화발전소대표, 격월간시와혁명발행인, 대자보편집위원 현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홈페이지sisarang.com, nekonews.com운영자, 전우크라이나 예빠토리야한글학교교사, 현재 네팔한국문화센타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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