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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동부의 나이아가라 폭포.
▲ 나이아가라 폭포 미동부의 나이아가라 폭포.
ⓒ 김경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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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미국여행 날짜가 다가오니 괜히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한 달간 집을 비우면 텃밭이나 마당에 풀은 '우묵장성'이 될 것이다. 개와 닭들은 이웃에 사는 사촌에게 부탁은 했지만 기간이 너무 길다보니 미안한 마음 한가득이다.

뿐만 아니라, 14년이 된 승용차를 한 달이나 안 굴리면 나중에 시동이나 걸릴지! 이런 저런 걱정을 하는 내가 스스로 생각해도 '참 걱정도 팔자다' 싶다. 이런 나를 본 남편이 한마디 한다.

"여행은 즐겁게 해야 되는데 참 그러네. 이러니 누가 촌에 와서 살려고 하겠어, 미안해요."

그래도 가야 한다. 시동생의 미국생활 40년 만에 조카 결혼식이 있어서 처음으로 방문하는 것이다. 핑계 김에 미국 구경도 좀 하고. '집 단도리'는 별로 할 것이 없다. 시골 주택이라는 것이 헐렁한 현관문 대충 잠그고 가면 누가 왔다가도 문 흔들어 보고 잠겼으면 그냥 갈 거니까. 대문이야 원래 동네 사람이 다 맘대로 열고 들락거리는 것이고.

"미국에 좀 더 계세요"... 딸의 만류에도 나는 돌아왔다

6월 20일, 인천공항에 내리니 비행기 안에서는 볼 수 없었던 진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거의 모든 사람이 마스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부부 역시 마스크를 했다. 갈 때는 두 개였던 여행용 가방이 돌아올 때는 작은 집에서 이것저것 챙겨주는 바람에 세 개가 됐지만 불특정 다수인이 만졌을 카트를 이용하지 않고 그냥 끌고 밖으로 나왔다. 공항청사 밖으로 나와서는 생각지 못했던 고민을 잠시 해야만 했다. 택시를 탈 것인가, 리무진버스를 탈 것인가. 의논 끝에 리무진 버스를 타기로 했다.

그 이유는, 택시는 서울이나 각 처에서 어떤 사람이 이용을 했을지 모르기 때문이었고, 리무진버스는 정해진 노선만 운행을 하고, 공항에 오가는 사람들이라면 최소한 몸 아픈 사람이 비행기 여행을 하지는 않으리라는 막연한 생각에서였다. 어쩌면 너무 유별을 떤다고 나무라는 이들도 있겠지만, 내가 큰 수술 후에 아직 추적 검사를 받으며 치료 중에 있기에 더욱 신경을 썼던 것이다.

한국을 떠날 때 메르스(MERS, 중동호흡기증후군)가 한국을 강타할 줄은 감히 상상조차 못 했기에 그 충격과 황당함은 말로 표현이 안 될 정도였다.

우리는 5월 29일 미국에 도착했고, 30일에 조카 결혼식을 보고 6월 1일부터 서부여행을 시작했다. 한창 서부 여행을 하고 있는데 한국에 있는 딸아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국제 전화료가 비싸다며 제 아빠와 카톡으로만 문자나 전화를 했었는데, 카톡을 하지 않는 나에게 전화를 직접 걸었기에 속으로 불길한 예감을 가지고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일 있니?"
"엄마, 예정대로 한국으로 돌아오실 거예요?"
"어, 왜?"
"지금 한국은 메르스 때문에 야단이에요. 비자가 3개월짜리지요? 될 수 있으면 비자 만기까지 미국에 계시다가 오세요. 엄마는 환자라서 불안해요. 아빠는 연세가 많으시니 같이 작은 집에 계시다가 메르스가 잠잠해지면 오세요."

여행 도중 버스 안에서 전화를 받았다. 아무리 작은 소리로 소곤거려도 버스에 타고 있는 여행객들의 귀에 안 들릴 리가 없다. 따라서 가이드의 귀에도 들렸겠지. 가이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한국 소식이 궁금하시지요? 뉴스 좀 틀까요? 녹음 해놓은 것이긴 하지만..."

곧이어 버스의 스피커에서는 온통 메르스에 관한 뉴스가 흘러 나왔고, 모하비 사막을 지루하게 달리는 버스 타기에 지쳐서 잠들거나 졸고 있던 승객들도 정신이 들었는지 일시에 '아' 하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뉴스가 끝났지만 가이드조차 입을 열지 않는 침묵이 흘렀다.
그날 이후로 나는 짬짬이 핸드폰으로 인터넷 뉴스를 들여다보며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몸이 아픈 친지들 걱정으로 착잡한 여행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미국의 작은 집에서 큰 맘 먹고 마련해준 여행을 마다하고 한국으로 돌아올 수 도 없었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이 겁도 났고, 아직 남은 동부여행에 대한 미련도 한자리 차지했다.

6월 10일, 동부 여행의 시작이다. 나는 여행이 주는 매력과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설렘과 바쁜 여행일정 덕분에 잠시 한국에 있는 가족 걱정을 놓을 수 있었다. 우리 일행 중에는 사람을 즐겁게 하는 재주를 가진 아주머니가 한 분 계셨다. 작정하거나 계산되지 않은 밝은 성격과 순수함이 매력인 아주머니였다. 그 아주머니께 미리 양해를 구했기에 재미있는 에피소드 한 가지를 소개할까 한다.

여행 내내 밝았던 아주머니에게 온 비보... "친구가 메르스로 죽었대요"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예방을 위해 마스크를 쓴 시민들. 사진은 지난 6월 13일 서울시공무원 임용시험을 치른 응시생들의 모습.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예방을 위해 마스크를 쓴 시민들. 사진은 지난 6월 13일 서울시공무원 임용시험을 치른 응시생들의 모습.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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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주머니는 미국에 올 때 한국에서 소주 15병을 트렁크에 담아서 가지고 왔단다. 미국에는 딸 내외와 아들이 있는데 모두 소주를 좋아해서 한자리에 모이면 같이 한잔하고 싶어서였다고 했다. 드디어 비행기는 LA공항에 도착을 했고 아주머니는 마중 나왔을 자녀들을 생각하며 기분 좋게 나가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붙잡더란다. 어리둥절해서 이끄는 대로 갔더니 아주머니의 트렁크를 열고 소주병을 가리키며 영어로 마구 뭐라고 하더란다.

아주머니 짐작에 벌금을 내라고 그러는 줄로 알고 50달러를 내밀었더니 그 미국인이 손사래를 치면서 또 뭐라고 마구 영어를 쏟아내더란다. 아주머니는 아주머니대로 한국말을 하고. 한참을 바벨탑에서와 같은 대화를 하다가 아주머니 생각에, '아! 벌금이 적다는 말이구나' 싶어서 100달러를 내밀었단다. 그런데 또 미국인은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는 행동을 하더란다.

말이 안 통하니 답답하기는 서로 마찬가지. 이번에는 현금이 모자라서 '하이고, 무슨 벌금이 이래 비싸다냐' 하며 크레디트카드를 내밀었단다. 그래도 그 미국인은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며 NO를 연발했단다. 거기까지만 얘기를 듣고도 우리 일행은 박장대소를 하며 다음 얘기를 독촉했다.

"그래서요? 그럼 뭐예요?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말이 안 통하니 그 사람은 자기 일 보더라고요. 나는 멀뚱하게 한 두어 시간 앉아 있었나? 그러더니 그냥 가라고 하더라고요."
"소주는요? 소주 빼앗겼어요?"
"아니요, 소주도 그냥 주더라고요."

우리는, '한국말이 이겼다. 한국 아줌마 짱!'이라며 다시 배꼽을 잡았다. 그 아주머니는 순수함 그 자체였다. 한번은 아주 맛있어 보이는 생딸기 주스를 한 잔 사가지고 빨대를 꽂아서 마시며 걸어오고 있었다. 한 무더기 모여서 이야기를 하던 아주머니들과 나는 '참 맛있어 보인다'며 어디서 샀느냐고 물었더니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자기가 먹던 빨대를 내밀며 한 모금씩 마셔보란다. 그런다고 대여섯 명의 대한민국 아줌마들은 돌아가며 한 개의 빨대를 가지고 한 모금씩 다 맛을 보았다. 그러고는 또 박장대소하며 웃었다.

그렇게 낮 동안은 재미있게 웃고 놀다가도 저녁이 되면 잠자는 시간 아껴가며 한국 소식이 궁금해서, 조금이라도 속시원한 얘기가 있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인터넷신문을 샅샅이 뒤졌다.

동부여행이 끝나기 전날도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오전 4시에 일어나서 이른 아침을 먹고 버스를 탔다. 나는 그 아주머니와 눈을 맞추며 아침인사를 건넸는데 아주머니의 반응이 어쩐지 어딘가가 안 좋아 보였다. 저녁이 되어 호텔로 돌아왔는데도 로비에 혼자 앉아서 근심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기운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어제 밤에 남편과 통화를 했는데, 내 친구가 메르스로 죽었대요."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 일이 곧 내 주변에서 일어날 것만 같은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이제 내일이면 여행이 끝나고 작은 집에서 며칠 쉬었다가 한국으로 돌아가야 된다. 가족 걱정에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벌써 자식들 곁에 가 있다. 노파심인 줄 뻔히 알지만, 손 씻는 것도 간섭해야 될 것 같고, 마스크나 잘 하고 다니는지! 돌아가는 날이 다가오니 더욱 조급증이 들었다.

드디어 한국으로 돌아오는 6월 20일 새벽, 오전 3시 반에 시동생이 우리에게 내민 것은 마스크였다. 그는 인천공항에 내리자마자 꼭 착용하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렇게 즐거움보다 더 많은 걱정으로 여행을 마치고 자식들이 있는 서울 집에 들러 시골에 돌아오니 시골집이야 말로 한바탕 먹구름이 지나간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있었다. 텃밭과 마당에 풀이 우거진 것은 각오한 일이기에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 먹구름의 한 가지는 이유 모를 닭 두 마리의 죽음이었고 다른 한 가지는 진돗개 다리의 상처였다. 목줄이 다리에 감겨서 생긴 진돗개 다리의 상처는 그 이유가 분명했기에 치료만 해주면 될 일이지만 닭의 죽음은 몹시 불안했다. 혹시라도 어떤 전염병이라도 걸렸는가 싶은 마음이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는 식이었다.

메르스나 또 다른 전염병이 돈다고 해도 한국에 돌아오니, 집에 돌아오니 차라리 마음이 편하다. 다행히도 더 이상 닭의 희생은 없고 진돗개 다리의 상처도 아물고 있다. 자기의 잘못이 아닌데도 미안해 하는 사촌이 참 착하고 순수하다. 며칠에 걸쳐 여행의 피곤함도 뒤로하고 부지런히 움직인 결과 집안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정리했다.

뜬금없이 나라 일도 위정자들이 깨끗이 청소하고 정리해서 조용하고 안온한 국가, 서로 시비 걸지 않는 정부를 만들어 빨리 메르스나 퇴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걱정 중에 작지만 기쁜 일도 있다. 남은 닭 세 마리 중에 한 마리가 그저께부터 알을 품기 시작했다. 이제 7월 중순이면 노란 병아리가 우리 마당을 아장아장 걸어 다니며 새 생명의 신비를 체험하게 해줄 것이다. 그때쯤은 메르스로부터 해방이 됐으면 좋겠다.

처음에는 10개의 알을 넣었는데 알 품은 닭이 모이를 먹으러 나온 사이에 다른 닭이 들어가서 3개를 낳았다.
▲ 알 13개를 품은 암탉 처음에는 10개의 알을 넣었는데 알 품은 닭이 모이를 먹으러 나온 사이에 다른 닭이 들어가서 3개를 낳았다.
ⓒ 김경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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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전염병, #메리스, #암탉, #마스크,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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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는 시원한 청량제, 겨울에는 따뜻한 화로가 되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쓴 책 : 김경내 산문집<덧칠하지 말자> 김경내 동시집<난리 날 만하더라고> 김경내 단편 동화집<별이 된 까치밥> e-mail : ok_0926@daum.net 글을 써야 숨을 쉬는 글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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