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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군산중앙초등학교 천막교실
 1950년대 군산중앙초등학교 천막교실
ⓒ 군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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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급당 80~90명, 그야말로 콩나물교실. 그래도 교실이 부족해 오전·오후반으로 나누고, 3부제 수업까지 했던 시절이 있었다. 천막 교실에서 수업하는가 하면, 교실을 반으로 나눠 중간을 광목천으로 가리고 두 학급이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다 보니 한 반은 책걸상을 놓을 공간이 없어 바닥에 엎드려 공부하였고, 한 반은 맨 앞줄 어린이가 칠판과 거의 맞대어 앉게 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1962년 당시 군산 시내 초등학교 얘기다. 

학부모들은 사랑하는 자녀들이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에서 책걸상 싸움에 시달리는 모습을 시린 마음으로 지켜봐야만 했다. 안팎으로 시달리던 그해 가을쯤 주부들 가슴을 설레게 하는 소식이 입소문을 타고 골목을 누빈다. 군산에도 내년쯤 사립학교(군산제일초등학교)가 세워진다는 것. 시민 모두의 관심 대상이었던 사범부속국민학교가 폐교된 해여서 학무모들 귀를 더욱 솔깃하게 했다. 

과목 전담제, 시청각 교육 등 자녀의 미래 교육이 보장되는 희소식임에도 서민들에게는 '강 건너 불'이나 다름없었다. 매월 중학교 수준의 회비를 내야 했던 것. 경제적 빈곤을 이유로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는 초등학교 졸업반 학생이 70% 가까이 되던 시절, 매월 회비를 낸다는 그 자체가 부담될 수밖에 없었다. 사립학교 설립에 대해 시민들 반응은 '필요한 시기다'. '시기상조다' 등 반응이 엇갈렸다. 설왕설래 속에서도 입학원서는 속속 접수된다.

군산 제일초등학교는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탄생한다. 1963년 2월 21일 설립인가를 받고, 그해 3월 8일 첫 입학식이 열린다. 가슴에 예쁜 이름표를 달고 나들이 가는 병아리들처럼 부모를 따라 입학식에 참석한 학생은 43명, 초대 교장은 정찬홍이었다. 그는 1948년 9월 '동산학원'을 설립하고 군산여상, 중앙여중, 동고등학교, 동중학교 등을 세운 사학경영자였다. 

전에는 못 느꼈는데 폐교 후 더욱 애틋하게 다가와

소주잔을 부딪치며 끈끈한 정을 나누는 군산제일초교 동문들
 소주잔을 부딪치며 끈끈한 정을 나누는 군산제일초교 동문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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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는 군산시 나운동 모 식당에서 군산제일초등학교 동문들과 자리를 함께했다. 이날 모임에 참석한 1회 졸업생과 8회 졸업생들의 아련한 학창시절 추억담을 들어본다.

"저는 1회 인데요. 처음엔 군산여상 교실을 빌려 수업하다가 3학년 때 본관 건물이 완공되어 이사했어요. 선생님들은 벽돌을 찍어내고 우리는 나르고 그랬죠. 그때는 일하다가 다쳐도 즐거웠습니다. 교복도 처음엔 감색 세일러복이었고 양복 차림이었다가 1970년대 초(8회)부터 노란색으로 바뀌죠. 1학년 때 매점에 가면 군산여상 누나들이 빵이랑 과자랑 사주면서 무척 예뻐했어요. 거기에 재미 붙여 날마다 매점에 가는 놈도 있었죠. (웃음)"

최낙만 총동문회장 추억담이다. 최 회장은 "학교 설립자인 정찬홍 교장 선생님은 무척 소탈하셨다"며 "학생들 등하교 때, 청소할 때 도와주기도 하는 등 따뜻하고 다정다감해서 어린 마음에도 이웃집 아저씨나 외할아버지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다"고 회상한다. 그는 "전에는 못 느꼈는데, 정든 교정이 사라지니까 작은 추억도 애틋하게 다가온다"고 덧붙인다.  

최태근(1회): "스쿨버스로 등하교를 했는데, 말이 스쿨버스지 7인승 구형 택시였죠. 아무튼, 대단했습니다. 정찬홍 선생님이 제일택시회사를 운영하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겁니다. 그때 선생님이 회사 택시로 아이들을 등하교시켰죠. 7인승 택시라고 하지만, 아이들은 10명도 넘게 탈 수 있었으니까요. 그때는 택시를 얼마나 타고 싶었던지 아이들이 모두 내릴 때까지 시내를 한 바퀴 돌고, 다시 학교로 돌아오면 그때야 내려서 집까지 걸어갔습니다.(웃음)"

옛 추억을 떠올리는 이승주(오른쪽), 여진구(왼쪽) 동문
 옛 추억을 떠올리는 이승주(오른쪽), 여진구(왼쪽) 동문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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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주(8회): "제가 다닐 때는 북, 손풍금 등으로 구성된 고적대랑 합주부도 있었죠. 악기 하나씩은 다룰 줄 알아야 했거든요. 시 차원의 행사 때는 전교생이 시가행진에 참여했죠. 잊지 못할 추억 두 개가 있는데 수업 중간에 있었던 놀이시간입니다. 두 시간 수업이 끝나면 운동장에 나와 고무줄놀이, 팔방 등을 하면서 놀았거든요. 또 하나는 옥수수빵을 배급 받아먹는 다른 학교 아이들을 부러워하던 일입니다. 우리 학교는 배급 자체가 없었거든요."

이종남(8회): "저는 둔율동 성심유치원에 다녔는데요. 그때는 집에서 가까운 중앙초등학교만 알았지. 제일초등학교는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랐어요. 그런데 유치원을 졸업하고 어느 봄날 부모님 손을 잡고 따라갔더니 제일초등학교 입학식장인 겁니다. 뭣도 모르고 입학한 거죠.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몰랐던 게 더욱 아련한 추억으로 다가옵니다. 동창 숫자가 적어서 그런지 동문 한 사람 한 사람이 유달리 반갑고 끈끈한 정을 느낍니다."

설립 초기에는 회의적, 1970년 이후 입학열기 높아져

군산시 중앙로를 행진하는 제일초교 고적대(1970년대)
 군산시 중앙로를 행진하는 제일초교 고적대(1970년대)
ⓒ 군산제일초등학교 동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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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되고 씩씩하고 서로 정답게'라는 교훈으로 힘차게 닻을 올린 제일초등학교는 소규모 학교 특성을 살리면서 지역의 명문 사학으로 발돋움한다. 교과 담임제 도입, 가정학습지 발간, 학생 능력에 맞는 학급 내 모둠 편성, 특기 교육 등 학생 수준에 맞는 맞춤형 교육을 펼친 것. 가정학습지 발간은 학부모들 사교육비 부담을 덜어주는 효과도 있었다.

학급 담임제가 보편화했던 1970년대 초. 제일초등학교가 교과 담임제를 실행한다고 발표하자 반대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학생들이 정서적으로 혼란을 일으키고 생활지도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대부분 학부모는 한 교사가 9개 전 교과를 가르칠 경우 교습의 전문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의견에 공감했다. 교과 담임제는 1년 후부터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개교 초기에는 사립 초등학교에 회의적인 시각으로 관망하는 시민이 많았으나 학교가 성장을 거듭하자 지지와 성원을 보냈다. 1970년대 중반 이후에는 입학원서 접수 기간이면 진풍경이 벌어질 정도로 완전히 뒤바뀐다. 자녀를 제일초교에 입학시키려는 학부모들 경쟁이 치열했기 때문이었다. 입학원서 접수 당일에는 교문에서 학교 앞 골목 여관까지 길게 대열을 이루었다. 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앉아 순번을 기다리는 학부형도 많았다고 한다. 

모교 역사 35년 정리한 책자도 만들어

군산제일초등학교 건물(1980년대). 한옥과 서양식 건축양식이 합해져 이채롭다.
 군산제일초등학교 건물(1980년대). 한옥과 서양식 건축양식이 합해져 이채롭다.
ⓒ 군산제일초등학교 동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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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에 출간한 <영원한 개나리동산 제일초등학교> 시작 페이지.
 지난 4월에 출간한 <영원한 개나리동산 제일초등학교> 시작 페이지.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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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지원자가 몰렸던 제일초등학교는 1998년 2월 폐교된다. 공립화 과정에서 군여상, 중앙여중, 동·중고 등 4개 학교는 존속하고 제일초교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그 후 동문들은 그 옛날 노란색 교정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지내왔다. 동화 나라에 들어온 것처럼 느껴졌던 교사도, 화단도, 미끄럼틀도, 경비실도 모두 사라지고, 세월의 부침을 수십 년 견뎌낸 교문 옆 은행나무만이 애틋한 추억들을 바람에 실어 들려줄 뿐이다.

우정과 모교 사랑으로 다져진 제일초교 동문 모임은 폐교 이후에도 이어졌다. 기수별로 모임을 갖고, 주소록과 조기(弔旗)를 제작하는 등 끈끈한 정을 과시했다. 은사님 생일을 기억했다가 스승의 날 찾아뵈었다. 개교 40주년 행사도 치렀다. 지난 4월에는 모교 역사 35년을 정리한 책자(<영원한 개나리동산 제일초등학교>)도 출간했다. 총동문회도 결성됐다. 모교에 대한 그리움과 간절함이 책 편찬의 동력이 됐다. 아래는 최낙만 회장 소감이다.

"학교사 편찬 작업은 8회가 주도했어요. 저희(1회)가 할 일을 후배들이 찾아와 사업추진 과정을 설명하는데 미안하고, 고맙기도 했습니다.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고 했죠. 후배들이 모든 준비를 마쳐서 우리가 할 게 없었어요. 총동문회는 1회에서 30회 졸업생까지 모입니다. 25회~30회 졸업생들은 우리(1회)에게 자식뻘이죠. 그래서 더욱 애틋한 정이 오갈 것 같습니다."

<영원한 개나리동산 제일초등학교>는 '서른 번 졸업식 치른 군산 제일초등학교의 서른 가지 이야기'라는 부제로 동산학원 발족부터 기수별 동문들의 최근 소식까지 담았다. 이종남씨는 "폐교된 지 20년이 되어가지만 3060여 동문의 뜻을 모으는 데는 어렵지 않았다"며 "총동문회 역시 단순한 동문 모임 차원을 넘어 작으나마 지역사회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다양한 사업을 펼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정회상 '매촌의숙 장학재단' 이사장은 "영원히 존재할 것으로 알았던 동산학원 건물이 모두 사라져 안타까워하던 차에 35년 역사를 정리한 책자 발간과 총동문회가 출범했다는 소식을 듣고 설립자 후손 입장에서, 선배 입장에서 뿌듯하고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조부(정찬홍)님이 제일초교를 설립하고 남긴 '대학을 세운 것보다 더 만족스럽다'는 말이 지금도 생생하다"며 "그분의 설립 정신이 동문들을 통해 이어지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농암 정찬홍(1905~1996)은 누구?
농암 정찬홍은 1905년 지금의 군산시 조촌동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동산학원(東山學園) 설립자 매촌 정만채이다. 농암은 중앙초등학교, 중동학교, 연희전문 상과 중퇴, 일본대 상과를 졸업한 뒤 관료가 되어 근무하다가 큰 뜻을 품고 고향에 내려와 영동에 '천양사'(天陽社)란 포목상을 개업해서 크게 번창하였다.

조카딸이 일본 여성 오따(太田)가 흙벽돌을 쌓아 설립한 '가정여학교'에 다녔고, 그 인연으로 학교 후원회장이 된다. 광복이 되고 본국으로 돌아가야 할 오따가 농암에게 학교를 맡아달라고 부탁한다. 농암은 아버지(매촌)를 설득했고, 자식의 뜻을 받아들인 매촌은 쌀 1000석을 쾌척, 학교를 인수하고 1948년 9월 동산학원을 설립한다.

동산학원 실제 운영자는 농암이었다. 학교 운영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1949년 10월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절(寺)을 개보수하여 교사(校舍)로 사용했으나 한국전쟁 때 파괴된다. 그럼에도 동산학원은 군산여상, 중앙여중, 동중학교, 동고등학교, 제일초등학교, 여자기술학교 등 6개 학교(재학생 7000여 명)를 이끄는 대규모 사학으로 성장 발전한다.
  
1948년 10월 김구 선생이 학교 현판을 쓰고, 1955년 4월 이승만 대통령이 학교를 방문했으며, 철기 이범석과 교류한 기록 등으로 미루어 당시 매촌과 농암 두 부자(父子)의 영향력이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학계의 큰 인물로 평가 받는 농암은 전라북도 교육위원회 의장과 중앙교육위원을 역임했고, 1996년 노환으로 타계하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군산제일초등학교, #총동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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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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