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스 히딩크 네덜란드 축구 국가 대표팀 감독이 결국 사임했다. 네덜란드축구협회는 지난달 30일(한국 시각)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히딩크 감독의 사임을 발표했다.

2014년 브라질월드컵 3위의 호성적을 기록한 루이스 판 할(맨유) 감독의 후임으로 네덜란드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았던 히딩크 감독은 2016년 유럽축구연맹(UEFA) 선수권대회(아래 유로 2016)까지였던 계약 기간을 1년도 채우지 못하고 중도 하차하게 됐다.

히딩크 감독은 부임 후 치른 10경기서 4승 1무 5패의 성적을 기록했다. 승률도 40%에 불과했지만 유로 2016 예선에서 부진이 결정타였다. A조에 속한 네덜란드는 3승 1무 2패로 3위에 올라 있다. 선두 아이슬란드에 승점 5점, 2위 체코에 3점 뒤져 있다. 현재로서는 본선 직행이 불투명하다.

히딩크 감독은 전임 판 할 감독이 남긴 선수단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네덜란드의 선수 구성은 지난 브라질월드컵 때와 비교하면 큰 폭의 변화는 없다.

하지만 내부적으로 보면 네덜란드는 이미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히딩크 감독이 처음 지휘봉을 잡았던 1990년대 중후반만 하더라도 네덜란드 대표팀은 데니스 베르캄프, 파트릭 클루이베르트, 에드가 다비즈, 클라렌스 셰도르프, 에드윈 판 데 사르 등 유럽 축구계를 풍미한 전설들이 즐비한 올스타급 팀이었다. 네덜란드 자국 리그의 경쟁력도 지금보다 더 높았고 우수한 선수들이 끊임없이 배출돼왔다.

추락한 네덜란드 축구 위상

 거스 히딩크 감독의 사임을 발표하는 네덜란드 축구협회 공식 홈페이지 갈무리.

거스 히딩크 감독의 사임을 발표하는 네덜란드 축구협회 공식 홈페이지 갈무리. ⓒ 네덜란드 축구협회


하지만 현재 네덜란드 축구의 위상은 많이 떨어졌다. 아약스, PSV 등 한때 네덜란드 축구를 대표하는 명문 클럽들의 위상도 예전 같지 않다. 빅클럽들의 경쟁 무대인 챔피언스리그에서도 네덜란드 클럽들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자연히 네덜란드 선수들의 주가도 많이 떨어졌다. 현재 네덜란드 대표팀에 월드클래스급 지명도를 가진 선수는 아르연 로번과 로빈 판 페르시, 베슬리 스네이더르 정도다. 하지만 이들 3인방도 이미 30대를 훌쩍 넘긴 베테랑들로 전성기에서 내려오는 시점이다. 멤피스 데파이나 바스 도스트같은 젊은 선수들이 성장하고 있지만 아직은 완성형이 아니다.

2014 브라질월드컵은 네덜란드에 있어 세대 교체의 과도기에 가까웠다. 당시 개막 전 만해도 네덜란드 대표팀의 전력에 대한 평가는 그리 높지 않았지만, 정작 본선에서 디펜딩챔피언 스페인과 개최국 브라질을 대파하는 등 기대 이상의 경기력으로 호평을 받았다.

전술가 판 할 감독은 수비와 역습 위주의 실리 축구로 네덜란드 대표팀의 전력을 극대화했다. 로번이 대회 내내 공격에서는 팀을 혼자 이끌었다고 할 만큼 절정의 컨디션을 보여줬고, 수비에서는 이름값보다 네덜란드 리그에서 뛰고 있는 유망주들을 대거 발탁해 폭발적인 활동량과 변칙적인 스리백 전술로 대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판 할감독이 높여놓은 눈높이와 기대치는 히딩크 감독에게는 오히려 독으로 돌아왔다. 브라질월드컵을 기점으로 베테랑 선수들의 기량하락과 노쇠화가 두드러지는 가운데, 히딩크 감독은 이들의 자리를 대체하는데 실패했다. 새로운 선수들도 기용해보고 여러 가지 포메이션도 실험해봤지만 별다른 소득을 거두지 못했다.

물론 히딩크 감독 역시 책임을 피할 수는 없는 대목이다. 유럽 축구가 날로 평준화되고 있고 네덜란드의 전력이 이전만 못하다고는 하지만, 선수 구성으로는 아직 아이슬란드나 체코에 뒤지는 수준은 아니다. 그만큼 히딩크 감독의 축구가 시대의 흐름을 따라오지 못하는 느낌이 강했다.

히딩크의 축구, 시대의 흐름을 놓치다

히딩크 감독이 한국 대표팀을 이끌던 2002년만 해도 압박과 점유율 중심의 토탈 사커는 현대 축구의 대세처럼 여겼지만, 오늘날에는 더 이상 참신한 개념이 아니다. 히딩크 감독은 네덜란드 대표팀에 맞는 새로운 전술적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데 실패했다. 사실 히딩크 감독은 국내에서의 완벽한 감독 이미지와는 달리, 전성기에도 정작 유럽 축구계에서는 심리전이나 카리스마형 감독으로 평가받았고 전술가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는 편이었다.

자연히 네덜란드 축구계에서도 히딩크 감독에 대한 비난 여론이 높아졌다. 심지어 히딩크 감독의 과거 제자이기도 한 프랑크 데부어 아약스 감독은 히딩크 감독의 전술이 '구식'이라며 "그의 시대는 지났다"고 독설을 날리기도 했다. 네덜란드 언론사에서 자국 팬들을 상대로 진행했던 설문 조사에서도 히딩크 감독의 경질을 지지하는 여론이 80% 이상을 상회할 정도였다.

히딩크 감독은 유럽과 아시아, 오세니아를 넘나들며 전 세계적으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았다. 특히 상대적으로 약체 평가를 받는 한국(한일월드컵 4강), 호주(독일월드컵 16강), 러시아(유로 2008 결승)를 이끌고 남긴 성과는 히딩크 감독을 전설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2009년 첼시에서의 FA컵 우승을 끝으로 히딩크 감독은 더 이상 뚜렷한 발자국을 남기지 못했다. 러시아의 2010 남아공월드컵 본선 진출 실패를 시작으로, 터키 대표팀과 러시아 안지 마하치칼라의 지휘봉을 잡기도 했으나 모두 기대 만큼의 성적을 거두지 못하고 중도 하차했다. 이미 은퇴설이 나돌던 히딩크 감독이 지난해 네덜란드 사령탑에 선임됐을 때도 이미 자국 축구계 내부에서는 부정적인 여론이 적지 않던 상황이었다.

지도자로서 황혼기에 접어든 히딩크 감독에게 두 번째 네덜란드 대표팀 감독직은 사실상 명예회복을 위한 마지막 기회로 여겨졌다. 그러나 히딩크 감독은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고 어쩌면 가장 불명예스러운 모습으로 자국 대표팀에서 하차하게 됐다.

1946년생으로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를 감안할 때 실질적으로 히딩크 감독의 지도자 인생에 마지막 퇴장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여전히 한국 축구계에서는 국민적 영웅으로 높은 지지와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시대의 흐름에 밀려난 히딩크 감독의 초라한 퇴장은 격세지감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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