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새벽 5시 30분, 침대에서 주무시던 할머니(친정엄마)가 일어나셨는지 뒤척이십니다. 그 바람에 할머니 옆에서 자던 손녀부터 침대 밑에서 자던 딸들과 다른 손녀들까지 모두 다 눈을 떴습니다.

"할머니 화장실 가시나 보다. 다들 길 비켜요!"

주무시다가 가끔 한 번 그리고 일어나시면 어김없이 화장실에 가시는 할머니의 '소변길'을 할머니 손으로 7살까지 키운 막내손녀가 뚫어줍니다.

"에이그, 아니 다른 방 놔두고 얘들은 왜 이방으로 우르르 몰려와서 이렇게 피난민들처럼 찡겨 자느라고 그러냐구. 그러니까 남 볼일 보러 가는데두 이렇게 다 일어나지. 다 딴방으로 가서 더 자!"

엄마의 침대 밑에서 말그대로 찡겨 자던 딸들과 손녀들이 바닷물 갈라지듯 일제히 양옆으로 비켜나 만든 길을 지나던 엄마는 혹시라도 아이들을 밟을까 싶어 천천히 발을 내딛습니다. 구시렁거리시지만, 싫지 않으신 느낌입니다.

이상하게도, 누가 그러자고 약속도 안 했는데 친정집에 와서 잠을 잘 때면 딸 셋 모두 친정엄마가 주무시는 침대 밑에 이불을 깔고 눕습니다. 그러면 아이들도 그 곁에 나란히 와 눕고... 그러다 보면 침대 밑에는 사람 지나다닐 길조차 없이 빽빽하게 누워 자게 됩니다. 아이들은 하룻밤이든 이틀밤이든 그렇게들 잡니다. 구겨져서 자다 새벽 '소변길'을 터야하고, 또 새벽같이 일어나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외할머니의 특명 '새벽 감자캐기'

아무튼, 지난 일요일(28일)에는 그 시간에 아무도 군말 없이 일어났습니다. 할아버지부터 7살 손녀까지 모두 일어나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는데요. 바로 엄마의 야심찬 프로젝트가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매년 이맘때, 엄마는 전화로 '야, 택배로 감자 부쳤으니까 애들 해줘라!'라고 하셨지만 이번에는 특별히 '너희들 내려오면 직접 캐서 가져가라'고 하셨습니다. 시골에서 자랐지만, 밭일이라고는 해보지도 않은 자식들과 도시에서만 자란 손녀들이 혹여나 감자에 상처를 낼까봐 노심초사 하시면서도 직접 캐봐야 이 맛을 제대로 안다는 게 엄마 생각이십니다. 해 뜨기 전에 해치워야 한다는 엄마 이야기에, '새벽부터 해야하나' 투덜거리면서도 아이들 모두 밭으로 나갔습니다.

우선 감자 잎을 낫으로 치고, 밭위에 덮인 비닐을 파란 런닝셔츠의 할아버지가 치우며 나가십니다. 그러면 그 뒤를 엄마와 딸, 그리고 손녀들이 뒤따르며 감자를 캐 모았습니다. 엄마의 호미가 한 번 훑고 간 자리에 덩그러니 몸을 드러내는 감자가 마치 보물이라도 되듯 아이들은 할머니 곁에 쪼르르 앉아 기다리다 그 감자들을 주워 담습니다.

할아버지부터 손녀까지 모두 함께합니다.
▲ 감자캐기 할아버지부터 손녀까지 모두 함께합니다.
ⓒ dong3247

관련사진보기


"이것봐라, 내가 이 놈들 말라 죽을까봐 아침저녁으로 물주고 해서 이렇게 알이 굵게 들었네."

친정 엄마는 감자를 캐면서도 연신 감탄합니다. 유독 가뭄이 심해 혹시 알이 작은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제법 굵직하게 알을 키운 감자가 무척이나 대견한가 봅니다. 엄마는 알아듣지도 못할 감자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심어놓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물주고, 그리고 캐내면서까지 사랑과 칭찬을 듬뿍 받은 감자. 감자농사는 이런 노란 바구니 몇 개를 채울 정도로 잘 되었습니다.  

작은 밭에서 이런바구니로 여러개를 캤습니다.
▲ 캐낸 감자들 작은 밭에서 이런바구니로 여러개를 캤습니다.
ⓒ dong3247

관련사진보기


얼마나 되었을까? 해도 제법 뜨거워지고 아이들의 관심이 감자보다 밭에서 잡은 다슬기에 집중돼 밭에는 엄마와 저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니들은 엄마 고생한다고 아파트로 옮기자고들 하지만, 야 봐라 이렇게 수확하는 재미가 솔솔한 이 밭을 두고 어떻게 가니? 그리고 난 젊어서 니네 할머니 시집살이 심할 때, 어디 가서 말 할 데도 없고 이 밭으로 나와서 죽어라 일하면서 참고 잊어먹고 그랬다. 그런데 이 밭을 떠나 어떻게 사냐!" 

순간,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집앞에 딸린 밭이라 크지 않은 텃밭수준이긴 하지만, 이 밭이 엄마를 평생 고생시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렸을 적부터 엄마가 더운 여름날에도 하루종일 웅크리고 앉아 풀을 매고, 뙤약볕에 땀범벅이 되어 고추를 따던 이 밭이 괜히 싫었습니다. 최근에는 연세도 있으시고, 힘도 부쳐 밭에 나가 일을 하고 온 날은 이틀은 고생하시는 모습에 '차라리 밭을 팔고 아파트로 옮기자'고 여러 번 말씀드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굳이 이 새벽부터 자식들, 손녀들을 불러모아 흙을 만지시게 했는지 엄마의 마음이 헤아려졌습니다. 엄마는 자식들에게 '그녀의 밭'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이었습니다.    

"밭에 심은 곡식들은 거짓말을 하는 적이 없어. 가꾼만큼 주거든. 그리고 속상한 일이 있어 가슴이 터질 것 같을 때 여기 나와 풀을 매고 저것들을 가꾸면 어느샌가 내 걱정이 뭐였나 싶게 잊어버리기도 하고."

감자가 담긴 바구니를 들어서 옮기며 엄마가 하신 말씀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태그:#감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