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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적사항을 목걸이처럼 달고 있는 인민군 포로들(1950. 10. 2. 인천)
 인적사항을 목걸이처럼 달고 있는 인민군 포로들(1950. 10. 2. 인천)
ⓒ NARA/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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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솔한 수기

눈빛출판사가 펴낸 송관호 수기·김종운 정리의 <전쟁포로>를 손에 잡은 즉시 거의 단번에 다 읽었다. 그 까닭은 지난 2015년 2월에 펴낸 나의 장편소설 <약속>의 주인공과 송관호씨의 삶이 비슷해 흥미가 있었기 때문이요, 또 다른 하나는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로 전혀 새로운 세계에 빠트렸기 때문이다.

이 <전쟁포로>는 2014년 11월 9일부터 2015년 2월 9일까지 <오마이뉴스>에 연재된 인민군포로 출신 송관호씨의 수기를 사위인 김종운씨가 가다듬어, 많은 독자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나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온라인 연재물은 그때 그때 시의성에 따른 신선감이 있고, 오프라인 종이책은 먹물 활자 특유의 그윽한 깊이와 전편을 한꺼번에 다 읽을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책으로 다시 읽는 <전쟁포로>는 내게 모처럼 독서 삼매경의 진수를 맛보게 했다.

나는 6.25 전쟁을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 <약속>을 쓸 때 자료 수집에 엄청 곤욕을 치렀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장군들의 회고록은 전쟁사나 자신들의 전공, 상대방에 대한 비난 일색이 대부분이어서 전쟁 중 일반인들의 처절한 삶은 찾아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또 역사 학자들의 전쟁사 역시 전쟁의 가장 피해자인 일반 서민들의 처절한 체험적 삶은 거의 읽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책의 주인공 송관호씨는 온몸으로 남과 북에서 겪은 한국전쟁을 담담히, 아주 정직하게 기록하고 있었기에, 마치 삼촌이나 큰형이 들려주는 얘기처럼 다정하고도 진솔한 목소리로 내 가슴에 다가왔다.

인민군 입대

<전쟁포로> 표지
 <전쟁포로> 표지
ⓒ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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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 18일, 나는 스물한 살의 나이로 고향인 강원도 이천군 판교면 명덕리를 떠났다. 부엌에서 일을 하고 계시는 어머님께 "어머니, 잠시 면에 다녀올게요" 하고 떠난 것이 오늘까지의 이별이 될 줄을 몰랐다. (45쪽)

우리 일행은 덕원으로 가는 도중 폭격을 서너 차례 당했는데 다행히 죽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저녁때 어느 골짜기에 모였는데 여기서 인민군 45사단을 창설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인민군 45사단 1연대 1대대 2중대 1소대가 되었다. 우리 동네 친구들은 대부분 같은 부대로 편성되었다. (51쪽)

징병된 사연을 들어 보니 동네에서 인민군이 갑자기 모두 학교로 모이라고 해서 책가방만 달랑 들고 왔다가 그 길로 끌려왔다는 것이다. 아무도 드러내고 말은 못하였지만 남쪽 고향에서 끌려와 고향이 멀어질수록 북으로 향하는 것에 대해 두렵고 걱정하는 빛이 역력해 보였다. (55쪽)

그의 인민군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뿐 아니라, 전쟁 발발 후 남에서나 북에서는 대부분 청장정들이 그렇게 마구잡이로 전쟁터에 끌려 나갔다. 심지어 길거리에서 누구에게 붙잡히느냐에 따라 인민군이 되거나 국군이 되었다.

우리 대열은 영흥읍을 빠져나와 북으로 향하였다. 길을 걷는 동안 철길에서 멀어져 고갯길로 접어들었다. 고개로 올라가는데 인민군 트럭 한 대가 전복되어 있었고,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는 도와 달라고 하였다. 우리 일행 수십 명이 달려들어 차를 밀어 바로 세웠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인민군 전사들이 차에 치어 신음하는 동료 부상병을 치료하기는커녕 바로 그 자리서 총창으로 찔러 죽이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군을 재촉하여 원산 방향으로 전투를 하러 간다고 하였다. 나는 처음에는 아군이 아군을 죽이는 모습에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였다. 이유를 들어 본즉 사랑하는 전우지만 중상을 당한 그들을 후송할 시간도 없고 그렇다고 놔두면 적군에게 포로가 될 것이므로 불가피하게 죽인 것이라고 했다. (56-57쪽)

벌거벗긴 채 두 손을 들고 유엔군에게 투항하는 인민군들(1951. 5. 29.)
 벌거벗긴 채 두 손을 들고 유엔군에게 투항하는 인민군들(1951. 5. 29.)
ⓒ NARA/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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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비정함은 적군 총에만 죽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때로는 아군에게, 때로는 아군도 적군도 없는 무차별 폭격으로 떼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내가 어린 시절 어른들에게 들은 바, 한국전쟁 기간 중 기찻길 터널에는 영아의 시체들이 더러 널려 있었는데, 빗발치는 총탄과 포탄 속에서 부모들이 삶에 지친 나머지 컴컴한 터널을 지나면서 몰래 버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말 한 마디에

얼마쯤 가니 한 동네에선 사람들이 모여 야단법석이었다. 무슨 일인가 가보니 부역자들을 잡아 처결에 대해 갑론을박하고 있었다. 누군가 "저 놈은 빨갱이로 남을 죽이고 재산을 압수하는 등 악질을 많이 했으니 저놈을 죽여라"라고 말하면 그는 곧바로 트럭에 실렸다. 또 어떤 사람은 "빨갱이지만 하고 싶어 했던 것도 아니고, 마지못해 했으니 살려 주자"라고 말하고 주위에 찬성하는 사람이 많으면 그는 놓아 주었다. 풀려난 사람은 감격해서 사람들에게 절을 대여섯 번씩이나 하며 고맙다고 하였다. 사람의 생과 사가 그 자리에서 말 한 마디에 갈렸다. (98쪽)

그가 탈출 길에서 본 마을 풍경이었다. 전쟁 중에는 말 한 마디로, 심지어는 목격자의 손가락질로 한 생명의 목숨이 이승과 저승으로 갈렸다. 전쟁 때 일반 서민들은 그저 파리 목숨이나 다름 없었다.

총구 앞에서는 사람도 짐승이 된다. 수풀속에서 기어나와 투항하는 인민군(1951. 9. 20.)
 총구 앞에서는 사람도 짐승이 된다. 수풀속에서 기어나와 투항하는 인민군(1951. 9. 20.)
ⓒ NARA/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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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천신만고 끝에 고향을 눈앞에 두고 미군에게 포로가 되었다. 미군 네 명이 내 뒤에서 총을 겨누고 날 연행하였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비행장으로 끌려갔다. 비행장에는 큰 창고가 있었다. 그 속에 들어가니 어림잡아 수백 명도 넘는 사람들이 붙잡혀 와 있었다. (115쪽)

그는 고향으로 가려다가 미군에게 잡혀 인민군 포로가 되었다. 그는 부산 포로수용소에서 머물다가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갔다.

야전병원에서는 포로수용소에 도는 전염병 탓에 하루에도 백 명이 넘게 사람이 죽어 나갔다. 한 차에 시신을 70여 구 가득 실어 어디론가 나르곤 했다. 많은 사람이 병사한 이유는 수용소의 열악한 위생 환경으로 돌림병인 이질 환자가 급증하고 의료진과 치료약 및 의료장비 모두가 턱없이 부족한 탓이었다.

천막 안 병상에서 환자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다 잠이 들었다 아침 식사 때가 되어 밥을 먹으라고 깨워도 아무 대답이 없으면 그 사람은 밤새 죽은 사람이었다. 나는 내 옆에서 이렇게 소리 소문도 없이 죽어 간 사람을 여럿 보았다. (130쪽)

철조망 밖에서는 때로는 이상한 장면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어여쁜 아가씨가 양놈들의 손을 잡고 뽀뽀를 하고 다니며 몸을 드러내고 있는 것을 얼마든지 볼 수 있었다. 포로들은 그걸 보고 희롱을 하고 욕도 종종 하였지만 나는 그런 일을 볼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그들은 자기 고향에서 아무 일도 없이 행복하게 잘살던 사람들이 아니었는가? 그러던 어느 날 전쟁으로 인해 자유를 찾아 살겠다고 이 땅으로 피난 온 피난민들이 아닌가? 땅 설고 물 설은 여기에 와서 가족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저런 생활을 하는 처지가 얼마나 가슴 아플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48쪽)

또 하나의 전쟁터

유엔군 감시병들이 거제도포로수용소 포로들에게 DDT를 살포하고 있다(1952. 8.).
 유엔군 감시병들이 거제도포로수용소 포로들에게 DDT를 살포하고 있다(1952. 8.).
ⓒ NARA/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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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수용소는 또 하나의 전쟁터였다. 이른바 포로수용소 내에서 좌우익의 암투는 제3전선으로, 그는 그 소용돌이에서 용케 살아남았다. 그는 송환을 앞두고 반공 포로로 남녘을 선택했다. 그 시절은 너나없이 태반이 무지렁이였지만, 그래도 전쟁이 오래 계속되자 어렴풋이 전쟁의 주체를 깨닫는 이도 있었다.

하루는 김 집사와 논을 바라보며 6·25 전쟁에 대해 얘기를 하였는데 인민군이 강해서 대구까지 진격한 것이 아니라 미국 정책의 작전에 말려서 대구까지 진격한 것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인민군이 무력이 강하고 사상이 강해 모든 면에서 국군보다 우월하여 초기에 남진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무슨 말이냐고 반문을 했다.

강대국은 약소국가의 민족성을 말살하고 나라를 예속시키기 위해 동족 간에 사상 싸움을 일으키어 전쟁이 나게 한 후 쌍방을 강대국에게 예속시켜 민족주의 애국자를 제거하고 자기 앞잡이들을 내세워 정권을 잡게 한 후 그를 지원하면서 동족을 죽이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숙청하여 분단을 영원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강대국의 속성이라는 것이다. (180쪽)

오늘날은 "정보는 곧 국력"인 시대로 미국은 세계 정보 제1위 국가다. 그래서 '팍스아메리카나(Pax Americana)' 미국은 지금 세계 평화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그만큼 정보는 소중하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한국전쟁의 진솔한 기록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한국의 소중한 자료는 국내보다는 미국·일본·러시아·중국 등지에 더 많이 있다.

고대사는 중국에, 근대사는 일본에, 근현대사 자료는 미국·일본·러시아·중국 등에 산재돼 있다. 우리나라의 자료를 다른 나라가 더 많이 소장하고 있다는 것은 단적으로 지난날 우리의 국력이 그만큼 약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기록을 중요시하지 않은 탓도 있고, 또 있는 자료조차도 역사의 진실을 왜곡하거나 은폐하기 위해 훼손한 일도 없지 않았다. 이러한 때 <전쟁포로>의 발간은 늦은 감이 있지만, 그래도 다행한 일이다.

한국전쟁 비망록

나는 최근 10여 년 새 항일유적답사로 이웃 중국을 네 차례 다녀왔다. 내가 중국에 갈 때마다 그네들의 놀라운 발전상에 눈을 비볐다. 지난 세기 '종이 호랑이'로 세계인의 조롱을 받았던 중국이 이즈음에는 러시아를 제치고, 미국과 맞설 정도로 초강대국이 된 것은 중국 지도자들의 대인민 역사교육에 있었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중국의 역사 현장 곳곳에는 그들 지도자들이 '물망국치(勿忘國恥, 나라의 치욕을 잊지 말자)' '전사불망후사지사(前事不忘後事之師, 지난 일을 잊지 말고 후세의 교훈으로 삼자)'라는 말을 돌로 새겨 인민들을 교육함은 물론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국운을 융성케 했다.

나는 <전쟁포로> 마지막 문장 "마침내 11시가 넘었을 때 신부가 도착하여 무사히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를 읽고 책을 덮으면서 이 책은 소중한 '한국전쟁 비망록'으로 오래 남겨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전쟁포로> 수기의 주인공 송관호는?
국군으로 복무 중, 제대 직전 송관호 씨
 국군으로 복무 중, 제대 직전 송관호 씨
ⓒ 송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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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현재 북한 지역인 강원도 이천에서 태어났다.

21세 때인 1950년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 징집 입대한 후 후퇴 중에 탈영하여 그 길로 귀가하던 도중에 유엔군에게 포로가 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1953년 6월, 반공포로석방 때 풀려났다가 정전 후 다시 국군에 입대하였다.

1956년 만가 제대 후 미군부대 군속으로 근무하다가 결혼하였다. 남과 북에서 국군과 인민군 생활을 한 반공포로 출신의 실향민으로, 대한민국에 정착하여 슬하에 1남 5녀를 두었다.

현재 자녀들의 극진한 보살핌 속에 살고 있으며 그분의 마지막 소원은 남북 통일로, 고향을 당신 발로 찾아가 보는 것이라고 한다.


○ 편집ㅣ조혜지 기자

덧붙이는 글 | <전쟁포로>(송관호 지음 / 김종운 엮음 / 눈빛출판사 펴냄 / 2015.06 / 1만3000원)



전쟁포로 - 송관호 6.25전쟁 수기

송관호 지음, 김종운 정리, 눈빛(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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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한국전쟁, #전쟁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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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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