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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갈수록 극심해지는 청년층의 취업난이 사회적 문제로 조명되면서 일부 기업들은 '탈 스펙' 채용 방식을 시행하고 있다. 이러한 '탈 스펙 채용 제도'는 구직자들의 과도한 스펙 경쟁을 방지해 사회적 낭비를 막기 위해 도입되었다. 또한 구직자들의 스펙이 이미 상향평준화 되어 변별력이 없기 때문에 이보다는 다른 요소들을 평가해 직무에 적합한 인재를 선발하겠다는 취지로 시작됐다.

SK그룹은 지난해 처음으로 실시한 탈 스펙 채용 제도인 '바이킹 챌린지'와 더불어 올해 상반기부터 모든 지원자들의 어학능력과 해외경험, 자격증 등 스펙을 보지 않는 채용 방식을 시행했다. 포스코는 지원서에 학력과 어학능력 기재 란을 삭제했고, 롯데그룹 또한 계열사 별로 채용 지원 시 어학능력과 자격증 기재 란을 없앴고, 학력에 관계없이 지원 가능한 탈 스펙 채용제도인 '스펙태클' 전형을 함께 시행하는 등 채용전형에 있어 스펙을 초월한 탈 스펙 방식이 현재의 트렌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탈 스펙'이 오기까지... 채용제도는 어떻게 변해왔나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기업들은 방만한 경영실태를 해소하고자 구조조정을 통해 인력규모를 축소했고, 신규 채용을 줄여왔다. 이로 인해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졌고 저성장과 경기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재까지 그 현상은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불안정한 현실은 비교적 안정된 일자리라 여겨지는 공무원 및 공공기관, 주요 대기업에 많은 취업 준비생들이 몰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외환위기 이후 민간 기업에서는 '공개채용' 방식을 도입했다. 4년제 학사 졸업예정 등 특정 요건을 갖춘 이들의 지원을 받아 공개경쟁을 통해 신입사원을 선발하는 방식을 마련한 것이다. 이러한 취업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고자 대학생들은 학점, 공인영어성적(TOEIC) 등 다른 경쟁자들과 차별화 되는 '스펙'을 만들기 시작했다.

구직자들의 스펙 경쟁이 심화됨에 따라 기업에서 요구하는 역량 또한 계속해서 변해왔다. 공인영어성적에서 나아가 외국어 회화 가능자와 제2외국어를 구사하는 지원자를 우대하거나 일정 점수 이상 보유를 지원 자격 요건으로 정했다. 더불어 인턴 경험 등 실무 경험을 통해 능력을 갖춘 지원자를 선호하는 등 구직자들의 스펙 경쟁이 가열될수록 기업에서 요구하는 역량은 늘어갔고 이에 따라 스펙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는 순환을 반복했다.

취업난이 심해질수록 기업에서 선호하지 않는 인문학 등의 기초 학문 전공학과가 수험생들로부터 외면 받는 현상이 나타났다. 해당 학과 졸업생들의 취업률이 낮다는 이유로 일부 대학에서는 대외경쟁력 강화를 명목으로 인문학 전공 학과를 폐지하기도 했다. 이런 현상으로 인해 취업 준비생들의 스펙 경쟁 과열 현상에 대한 사회적 목소리가 더욱 커져갔다.

이춘우 서울시립대 경영학과 교수는 지난 3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영어 점수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구직자들에게 토익 점수를 요구하는 기업 때문에 사회적 낭비가 크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에 주요 기업에서는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선발하겠다고 밝히며 '스펙보다는 스토리'라는 키워드로 지원자들의 '자기소개서'에 중점을 둔 채용을 하겠다는 방침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 또한 취업 준비생에게는 부담으로 다가온 측면이 존재한다.

취업 준비생 임규종(27)씨는 "평범하게 대학생활을 하고 졸업을 앞둔 대다수 취업 준비생이 남과 다른 자신만의 스토리가 있으려면 지어내지 않고서야 가능한지 의문이 든다"면서 "기업에서 '스토리' 있는 자기소개서를 선호하면서 국토 대장정이나 해외 봉사활동 등의 경험을 하나의 스펙으로 쌓는 친구들이 많아졌지만 이미 그것도 보편화됐기 때문에 식상해졌다는 것이 취준생 사이에서는 정설이다. 아예 취업을 위해 경험삼아 창업을 고려하는 친구들도 있다"고 밝혔다.

'탈 스펙'은 정말로 스펙을 초월하는가

일부 기업들이 탈 스펙 채용방식을 도입함에 따라 탈 스펙이 현재의 채용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채용 제도에 대해 당사자인 구직자들 사이에는 학력과 성별, 연령에 제한을 두지 않는 열린 채용 방식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이라는 의견과 명목상의 탈 스펙일 뿐이라는 부정적 의견이 공존한다.

지난 3월 시장조사전문기업 마크로밀엠브레인의 트렌드모니터가 취업준비 경험이 있는 전국 만 19~59세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전체의 51.3%가 '탈 스펙 채용방식이 마음에 든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채용 과정에서 스펙을 고려치 않겠다는 방침에 신뢰가 간다는 응답자는 30.3% 뿐인 것으로 나타났다.

취업 준비생 최형주(28)씨는 "지방대 학생인 입장에서 탈 스펙이 학력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부담감이 덜 하다"고 밝힌 반면 취업 준비생 지수현(25)씨는 "서류 전형에서는 몰라도 어차피 면접에 가서는 스펙을 볼 것 같아서 진정한 의미의 탈 스펙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탈 스펙 채용방식이 오히려 또 다른 스펙 쌓기로 전락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 모 기업 탈 스펙 채용 전형에 지원한 경험이 있는 취업 준비생 이연우(26)씨는 "현재 시행되고 있는 탈 스펙 방식은 개념도 모호할뿐더러 탈 스펙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더 남다른 역량을 요구하는 것 같다"면서 "오히려 스펙을 안 따진다고 하니 외적으로 드러나는 요인을 더 많이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밝혔다.

지난해 AK그룹은 지원자가 사진이나 동영상 등을 SNS에 업로드 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소개하는 '열정 캐스팅'을 실시했다. 취업 준비생 박지훈(27)씨는 "기업에서는 지원자가 가진 열정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지만, 열정의 개념도 추상적일뿐더러 결국 실제로 가지고 있는 열정의 크기 보다는 외적으로 보이는 것만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견을 밝혔다.

덧붙여 "스펙을 쌓는 것은 노력을 바탕으로 가능하다는 점에서 성실성의 지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스펙은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 가능하지만 지금의 탈 스펙이 요구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으로 갖춰지는 것이 아닌 것 같다"고 밝혔다.

누구를 위한 탈 스펙인가

트렌드모니터의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57.5%가 '탈 스펙 채용방식으로 채용하는 기업은 혁신적인 기업'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실제로 탈 스펙 채용을 시행하고 있는 일부 기업에서는 이를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등 기업 이미지 개선에 이용하기도 한다. 한 기업의 인사담당자는 "기업 입장에서 탈 스펙 방식의 채용은 하나의 모험이기도 하고 비용도 많이 든다"면서 "그럼에도 이를 감수하고 사회에 공헌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면을 홍보에 이용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실제로 탈 스펙 방식의 채용이 이뤄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부정적 의견이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앞선 설문조사에서 현행 탈 스펙 채용제도에 대해 응답자의 58.2%가 '제대로 시행하고 있지 않을 것'이라는 반응을 보였으며 구직자가 가장 많은 20대의 68.2%가 이와 같이 부정적 의견을 나타냈다. 지난해 탈 스펙 채용제도로 신입사원을 선발한 SK그룹의 경우 전체 지원자 2000여 명 가운데 최종 합격한 인원은 단 4명뿐이었다.

현재 시행중인 탈 스펙 채용 방식의 발전 가능성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도 있었다. 설문조사에서 향후 탈 스펙 채용방식의 정착 가능성에 대해 응답자 83.9%가 '제대로 시행하는 기업은 많지 않을 것'이라는 부정적 의견을 보였다. 반면 '잘 시행될 것'이라는 응답은 7.1% 에 그쳤다.

제조업계 중소기업 인사담당자는 "탈 스펙 방식의 채용은 지원자가 많고 시행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대기업에서나 가능한 것"이라며 "그럴만한 여유가 없는 중소기업의 처지에서는 시행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탈 스펙'이 또 하나의 스펙이 되지 않도록

3년간의 취업준비 끝에 올해 상반기 취업에 성공한 김영민(31)씨는 "몇 년 사이에도 기업에서 요구하는 것이 수시로 변해서 이것저것 준비만 하다가 제대로 이룬 것 없이 시간만 낭비했다"면서 "지금 유행하는 탈 스펙도 기준이 애매하다고 생각한다. 기업에서 정말로 열린 채용을 하겠다고 한다면 단순히 서류 전형에서 학력과 자격증 등을 따지지 않는 방식 보다는 불필요한 인적성 검사 등의 절차를 축소하고 면접 과정에서 심층적인 평가가 가능하도록 하는 방법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밝혔다.

스펙 경쟁으로 모두가 지치고 포기해야 할 것만 자꾸만 늘어나는 청년층에게 현재의 탈 스펙 채용 방식의 취지 자체는 긍정적이며 바람직한 방향으로의 변화인 것은 분명하다. 박주신 인하대 교육대학원 교수는 지난 3월 한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최근 공기업, 금융권, 민간기업 등 여러 곳에서 신입사원 채용 시 탈스펙을 고려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라며 "역량 및 직무 중심으로 인재를 발굴하는 최근의 기조가 계속해서 확대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탈 스펙 채용 제도가 취업준비생에게 또 다른 스펙 쌓기를 요구하거나 유행처럼 바뀌는 등 더 큰 부담을 줘선 안 된다. 기업은 '탈 스펙'이라는 말 자체가 갖는 의미처럼 스펙에 제약받지 않는 열린 기회를 제공하고 공정한 심사를 통해 인재를 선발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강덕원 시민기자는 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http://seoulyg.net) 대학생기자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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