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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
▲ 허삼관 매혈기 허삼관 매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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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이렇게 화두였던 적이 있던가. 소설가 신경숙의 표절 논란이 한창이다. 언어를 발명해야 하는 소설가에겐 치욕적인 사건이다. 표절에 대한 논쟁은 다양한 문제제기로 이어졌다. 그중에서 새롭게 떠오른 화두는 과연 최근의 문학에 '진심'이 있냐는 것이다. 이에 나아가 그간 문단 권력을 행사하던 '포스트 모던' 문학의 진실성에도 문제제기가 이어졌다. 경향신문에 기고된 김규항의 칼럼이 대표적이다.

표절에 대한 논쟁이 진심으로 확장된 것은 비평가 이응준의 역할이 컸다. 그는 허핑턴포스트에 신경숙의 표절 논란을 수면 위로 끌어 올렸다. 그의 언어는 거칠었다. 하지만 글은 대중의 마음을 울렸다. 그는 자신의 소명에 대해 '나는 나의 이 글이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우리 사회와 문화에 악영향을 끼칠 어떤 악한 일을 바로잡는 선한 일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라고 언급했다. 그가 고민한 문장, 단어는 문단 권력의 최정점에 선 소설가에게서는 볼 수 없던 혼신의 힘이었다.

신경숙 사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건 단순히 표절때문은 아닐 것이다. 이응준의 글이 진심을 담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일까. 아무리 한국 소설 시장이 권력화 되고 카르텔로 불릴지라도, 여전히 대중들은 문장이 갖는 진심에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치 80년 전, 조지 오웰이 저서 <왜 나는 쓰는가>에서 언급한 '글은 삶으로 쓰는 것이다'가 여전히 유효한 것처럼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는 삶으로 쓴,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허삼관의 맥락없는 진심

<허삼관 매혈기>는 삶을 그린 이야기이다. 소설은 피를 팔아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 지는 허삼관의 일생을 그린다. 허삼관은 누에고치 공장의 노동자다. 그의 임금은 박해 큰 돈을 구할 수 없었다. 그는 우연한 계기로 피를 팔게 된다. 그에게 피는 큰 돈이 필요할 때마다 어김없이 도움이 됐다. 그는 결혼을 위해 피를 처음 팔았다. 첫째 아들의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두 번째 피를 팔았다. 간음한 임분방의 보양식을 사기 위해 세 번째 피를 팔았다. 둘째 아들의 상사를 대접하기 위해 네 번째 피를 팔았다. 첫째 아들의 중병을 고치기 위해 셀 수 없는 피를 팔았다. 세 번째 매혈은 의심스럽지만 대개 가족들을 위해 피를 팔았다.

허삼관의 헌신을 방해하는 다양한 '맥락'들이 존재했다. 그는 허옥란과 결혼해 3명의 아들을 낳았다. 원래 허옥란은 하소용과 연인이었다. 하지만 허삼관은 피를 팔아, 허옥란과 결혼에 성공했다. 마을에는 이들 부부에 대한 안좋은 소문이 돌았다. 첫째 아들인 일락이 남의 자식이라는 것이다. 마을사람들은 첫째 아들이 하소용과 닮았다는 이유로 허옥란의 행실을 의심했다. 게다가 허옥란은 하소용과의 동침(끝내 사실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을 자백했다.

소문을 들을 당시 허삼관은 일락과 허옥란에게 분노했다. 아들을 인정하지 않았고, 부인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는 일락을 빼놓고 가족들과 국수를 먹으러 간다. 일락은 이에 분노하여 "그래, 난 당신의 친아들이 아니야, 당신 역시 내 친아버지가 아니라구"(181쪽)라 말하며 가출을 감행한다. 허삼관을 일락에게 무관심한 척 그의 가출에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지만, 결국 일락을 찾는다.

"이 쪼그만 자식, 개 같은 자식, 밥통 같은 자식...... 오늘 완전히 날 미쳐 죽게 만들어놓고...... 가고 싶으면 가, 이 자식아. 사람들이 보면 내가 널 업신여기고, 만날 욕하고, 두들켜 패고 그런줄 알 거 아니냐. 널 십일 년이나 키워줬는데, 난 고작 계부밖에 안되는 거 아니냐. 그 개 같은 놈의 하소용은 단돈 일 월도 안 들이고 네 친아비인데 말이다. 나만큼 재수 옴 붙은 놈도 없을 거다. 내세는 죽어도 네 아비 노릇 안 하련다. 나중에는 네가 내 계부 노릇 좀 해라. 내세에는 내가 널 죽을 때까지 고생시킬테니......"
승리반점의 환한 불빛이 보이자 일락이가 허심관에게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버지, 우리 지금 국수 먹으러 가는 거예요?"
허삼관은 문득 욕을 멈추고 온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191-192쪽)

외도의 결과인 첫째 아들뿐만 아니라 외도의 당사자인 허옥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기근이 일어나고, 무근별한 폭로와 처벌이 이어졌다. 누군가 허옥란에게 '화냥년'이라는 소문을 대자보로 실었다. 허옥란은 인민재판을 받고 자아비판을 강요당했다. 그녀는 머리의 반을 삭발당했고, 대중들의 괄시를 받았다. 허삼관은 그녀를 보살핀다. 그리곤 자신의 집에서 자아비판을 하는 비판투쟁대회를 개최한다. 사실 허삼관이 연 자아비판은 자신에 대한 비판이고, 부인에 대한 사랑이었다.

"나하고 임분방은 딱 한 번뿐이었다. 너희 엄마하고 하소용도 마찬가지고. 오늘 내가 너희한테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나도 엄마하고 똑같은 죄를 저질렀다는 걸 너희가 알았으면 해서다. 그러니 엄마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237쪽)

허삼관은 가족들에게 자신도 다른 여자와 통정한 사실을 말한다. 자신도 허옥란과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문화대혁명 기간의 비난들이 자신의 마음과는 무방하다는 것을 말한다.

허삼관에게 맥락은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아들이 계부의 아들이라고 손가락질 했다. 그는 처음엔 일락을 비난했다. 일락을 친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아들과 화해를 한다. 마음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욕을 해도, "만약에 네가 내 아들이었으면 널 제일 좋아했을 거다"(174쪽)가 그의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부인은 대중 앞에서 '화냥녀'라고 비난 받았다. 그는 이데올로기라는 맥락의 허구성을 간파했다. 문화대혁명은 비난과 살육이 뒤섞인 야만의 시대였다. 그는 자아비판을 강요하는 시대의 요구를 부응한다. 다만 그가 비판하는 것은 화냥녀인 허옥란이 아닌, 좀 더 솔직하지 못한 자기 자신이었다. 사람들의 손가락질, 거대한 이데올로기의 명령, 이런 맥락은 허삼관이 가진 진심에 아무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진짜 삶이기에 가능한 진심

삶은 다채롭다. 만약 허삼관의 사랑이 일관적이고 아가페와 같다면 우리는 그의 이야기를 소설이라 치부할 것이다. 삶은 그렇지 않다. 질투하고, 증오하고, 미안해하며, 사랑한다. 삶은 가끔은 모순적이다. 허삼관의 모든 매혈이 가족을 위한 것이라면 '소설'이겠지만, 허삼관의 매혈에는 내연녀를 위한 선물도 포함되지 않았는가. 그의 '삶'에는 온갖 희비극이 녹아있다.

허삼관의 삶의 기저에는 비극이 깔려있다. 그는 가족에게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해결사를 자처했다. 그가 가진 건강한 몸을 가지고 피를 팔러 나갔다. 피를 팔 때 물을 많이 마시면 피를 많이 팔 수 있다며 우물가에 가 물을 연거푸 마셨다. 터질 것 같은 오줌보를 부여잡고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 브로커 혈두에겐 배급받은 설탕을 쥐어주며 피를 팔았다. 첫째 아들인 일락이 몸이 아프자 3달에 한 번씩 팔 수 있는 피를 10일 동안 4번이나 팔았다. 혈두는 그가 죽을까봐 매혈을 거부했다. 그는 다른 도시를 옮겨다니며 병원을 다녔다. 피를 너무 많이 팔아 그는 죽을 위기까지 겪는다. 절망적인 상황이다.

그럼에도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도리어 긍정했다. 그는 동네사람들에게 피를 팔 수 있는 건강한 몸이라며 자랑했다. 그는 피를 뽑는 절망적인 상황에도 피를 뽑고 먹는 돼지간볶음과 황주를 생각하며 웃었다. 도시를 떠돌면서 피를 팔면서도 "그저 두 다리 힘이 쪽 빠지는 것뿐이야. 여자 배에서 막 내려올 때하고 똑같지"(301쪽)라 말하며 자신만만해 했다.

이런 긍정이 마냥 즐거운 것이 아니다. 현실의 무게감을 갖는 긍정이다. 그렇기에 허삼관의 태도는 루쉰의 소설 <아Q정전>의 아Q식의 긍정과는 다르다. 아Q의 긍정은 '정신승리'에 가깝다. 아Q는 자신이 받은 억압을 자신보다 열등한 사람을 찾아 전가한다. 그리곤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비현실적인 상황에 만족한다. 아Q와 허삼관의 차이는 삶과 얼마나 맞닿아 있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아Q가 자신이 처한 삶에 관계없이 자신을 긍정했다면, 허삼관은 삶의 쓴맛을 겪은 뒤 내지를 수 있는 긍정인 셈이다.

가족들의 절망은 모두 끝났다. 그는 그럼에도 피를 뽑으려 한다. 이는 오직 자신을 위한 것이다. 그는 돼지간볶음과 황주를 마시고 싶었다. 그는 늙었다는 이유로 매혈을 거절당했다. 거리를 배회하며 울고있는 그에게 가족들이 찾아온다. 가족들은 그를 음식점으로 데리고 가 생애 최고의 돼지간볶음과 황주를 대접한다. 삶이 진하게 녹아있는 그의 투정에서 우리는 진심을 느낀다.

문학의 질문, 허삼관의 대답

<허삼관 매혈기>에서 보여준 진심은 현재 한국 문학의 질문에 하나의 답이 될 수 있다. 신경숙의 표절 논란으로 시작한 논쟁은 이제 '문학은 어디로 가야하는가'의 질문으로 확장됐다. 신경숙이라는 인물 보다 신경숙이 의미하는 한국문학의 대표성에 방점이 찍힌 셈이다. 과감히 말하자면 과거부터 이어진 한국 문학의 쇠락은 어쩌면 지금의 질문에 답을 못내렸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 아닐까. 주례사식 문학 비평, 포스트 모던에 세례를 받은 현학적인 이야기들, 모두 '진심'이 없기 때문에 벌어진 결과였다.

허삼관은 진심으로 삶을 마주했다. 그렇기에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가족을 사랑했고, 이 사랑에는 희노애락이 담겨있다. 허삼관이 대안이 될 수 있던 건 이응준의 비평일지 모른다. 주류 한국 문학 소설가들이 어떤 글을 탈고해도 대중들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문학 생산자들은 '이제 대중들은 독서를 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OECD 국가 중 최하위 독서량을 운운했다. 하지만 이응준의 글은 대중을 울렸다. 그리고 이 진심은 '문학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확장됐다. 그동안 대중들은 책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진심없음을 거부한 것이다. 

"글쓰기와 독서는 기억의 문을 두드리는 일 혹은 이미 지나가버린 삶을 다시 한번 살아보려는 뜨거운 욕망과도 같은 것이다."(13쪽)

위화가 <허삼관 매혈기>의 서문에 적은 문구다. 뜨거운 욕망, 그리고 삶과 마주하기 그리고 진심. 한국 문학에겐 간절한 것들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이진혁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leejin5165.blog.me)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푸른숲(2007)


태그:#허삼관 매혈기, #신경숙, #위화, #허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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