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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어린 시절 즐겨 보던 소녀 판타지 만화 상당수가 일본에서 들여온 것이라는 걸 알고 상당히 실망했던 기억이 있다. 아무래도 그 당시엔 지금보다 반일감정이 심했던 시절이니 말이다.

식민지 시대 청춘들의 가슴을 울렸던 <장한몽>(이수일과 심순애)도 원래는 일본 소설 <금색야차>를 번안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장한몽을 폄훼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낼 인력이 부족했던 당시에는 일본이나, 일본을 통해 들여온 서구 작품들 밖에는 그럴싸한 볼거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장한몽>에는 한 가지 요소가 더 있었다. 가난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여인을 빼앗긴 남성의 고뇌는 식민지 시대를 살던 젊은층의 정서와 묘하게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영화 <쎄씨봉>을 통해 재조명된 1970년대 포크 음악도 대부분이 번안곡이었지만 개중에는 한국적 정서가 담긴 가사로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노래들이 적지 않다.

영화에서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하는 트윈폴리오의 <웨딩케익>은 원래 한 주부가 결혼생활에는 달콤함만 있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는 왠지 교훈적(!)인 가사다. 그런데 번안곡은 "홀로 남겨진 웨딩케익만 바라본다"는 가사로 조금은 신파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1990년대로 가보면 이번에는 드라마 리메이크가 줄을 잇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설을 드라마로 각색한 작품이지만. 이를 주도한 것은 당시 막 개국했던 SBS로 아일린 굿지의 '장미정원', 요즘 '은밀한 유혹'이라는 영화로 다시 만들어져 화제를 모으고 있는 까트린느 아를레의 '지푸라기 여자'를 각색한 단막극(탤런트 남주희씨 주연) 등이 있었다.

번안 드라마 붐에는 MBC도 편승, 시드니 샐던의 <내일이 오면> <천사의 분노> 등이 당시 최고 여배우였던 원미경씨 주연으로 만들어졌다.

일본 작품까지는 번안하는 데 큰 문제가 없었겠지만, 서구권 콘텐츠들은 제대로 한국화하는 데 한계가 있어 지금 보면 좀 우스운 설정도 많이 나오게 된다.

<장미정원>의 경우 백인인 여주인공의 생모가 히스패닉 남자와의 불륜으로 아이를 낳자, 남자를 닮아 까만 피부의 아이를 산부인과에 불이 난 틈을 타 바꿔치기 한다. 이걸 한국식으로 고치려다 보니 혈액형상 나올 수 없는 자식이라는 식으로 얼버무렸다(차라리 그냥 자기 피를 뽑아 검사하지 그러셨어요...).

<내일이 오면>이나 <천사의 분노>도 그 당시 한국에는 없던 기업형 조폭이 등장하는가 하면 여주인공 혼자서 수억 원짜리 드레스나 박물관에 보관된 보석을 훔친다는, 현실성이 떨어지는 내용들도 많이 있었다.

특히 영미권 작품을 번안한 드라마는 무대의 스케일 자체가 달랐기 때문에 그 당시 우리나라 현실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고, 시청자들도 이를 재미로만 받아들였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일본 드라마 리메이크가 봇물을 이루기 시작했다. 이미숙과 이나영 등이 열연한 SBS의 <퀸>(원작 : 여자들의 지하드)을 비롯해 다양한 작품들이 리메이크 됐지만 개중 독보적인 존재감을 발휘한 것은 2007년 방영된 <하얀 거탑>이다.

출처:imbc 홈페이
▲ 드라마 '하얀거탑' 포스터 출처:imbc 홈페이
ⓒ 정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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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드라마의 미덕은 한국인에게는 지루하고 재미없을 장면들을 너무나 적절하게 바꾸어 놓은 데 있다. 뭔가 암호 같은 제스처만 주고 받았던 원작의 인물들과는 달리 한국판 하얀거탐의 유필상은 상대방의 목을 확 조르며 "우리가 남이가!"식의 대사를 내뱉는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소 언어생활에 맞게 수정된 말과 행동, 그밖에 세세한 디테일들이 이 드라마를 끝까지 성공하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특히 일본판 자이젠(장준혁)의 죽음이 인과응보처럼 묘사되는 반면 명인대병원의 장준혁 과장은 죽어 가면서 많은 이들의 눈물을 이끌어낸다. 분수대로 살아야 한다는 일본인의 사고방식이 아니라 아직 개천에서 용이 태어날 수 있다고 믿는 한국인의 정서를 반영한 것이다. 

어차피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고 한다. 그리고 이젠 한국 드라마들도 몽골이나 아랍권, 일본 등에 수출될 정도로 상당한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그 저력은 일본을 비롯한 남의 콘텐츠를 그저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뛰어 넘겠다는 의지에 있었을 것이다.

다만 뛰어 넘으려는 의지 없이 시청률 때문에 '날로 먹으려는' 심보가 문제다. 원작과 리메이크작의 차이를 치밀하게 분석하는, 매의 눈을 가진 네티즌들이 포진하고 있다 보니 어설픈 리메이크로는 오히려 쪽박을 내기 일쑤인 것이다. 그만큼 시청자들의 눈은 높아졌다.


태그:#리메이크, #번안, #드라마, #하얀거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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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과 관련하여 식생활 문화 전반에 대해 다루는 푸드 저널리스트가 되고 싶습니다. 대학가의 음식문화, 패스트푸드의 범람, 그리운 고향 음식 등 다양한 소재들로 글을 쓰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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