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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풍백화점 유가족이 딸에게 보내는 편지
ⓒ 이규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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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 이숙귀야. 참 세월이 빠르네요. 사고 난 게 어제 같은데, 벌써 2015년 6월 29일이면 20년입니다. 예쁜 내 딸 숙귀야. 엄마가 많이 많이 보고 싶다. 그리고 우리 손자(들아…) 외할머니야. 강산이, 강토 너무 너무 보고 싶구나. 만날 때까지 기다릴게. - 할머니"

하얀 종이에 파란 색연필로 꾹꾹 눌러썼다. 천천히 읽어보니 말 못할 사연이 분명했다. 지금부터 20년 전에 발생한 참사는 그렇게 엄마와 딸을 갈라놨다. 이것은 엄마가 저 세상으로 먼저 간 딸에게 보내는 편지다. 그리고 생이별을 할 수 밖에 없었던 두 손자들을 다시 만나길 기도한다.

20년 전 삼풍백화점에서 의류매장을 운영하던 딸 이숙귀(당시 35세)씨를 잃은 이순자(76) 전 삼풍유족회 부회장의 사연이다. 숙귀씨는 어머니를 위해 정장을 만들었고, 그렇게 선물한 옷은 그녀의 유품이 됐다. 사고 이후 손자들은 미국으로 이민 가 소식을 듣기도 어렵게 됐다. 이제는 손자들이라도 보고 싶은 할머니와 딸을 기억하고 싶은 어머니의 마지막 절규다.

"1995년 6월 29일 목요일 오후 5시 55분 서초구 서초동 1675-3번지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한 층이 무너지는 데 걸린 시간은 1초에 지나지 않았다" - <삼풍백화점>(정이현 지음, 현대문학, 2006) 중에서

6월 29일은 삼풍백화점이 붕괴된 지 20주기가 되는 날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던가. 두 번이나 변했을 시간이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로 304명의 목숨을 앗아간 경험을 이미 했는데, 20년 전에는 무려 502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이런 과거를 기억하고 희생자, 유가족, 관계자의 아픔을 치유하는 전시가 열려 주목을 받고 있다. 서울시청 지하 1층 시민청에서 열리는 전시 <이젠 저도 사랑을 시작할 수 있는 나이예요>를 관람했다.

'부패의 상징'으로 기억된 '부의 상징'

삼풍백화점 붕괴 20주기 기획전시 <이젠 저도 사랑을 시작할 수 있는 나이에요>는 오는 7월 5일까지 시민청 지하 1층에서 진행된다.
▲ 삼풍백화점 붕괴 20주기 기획전시 삼풍백화점 붕괴 20주기 기획전시 <이젠 저도 사랑을 시작할 수 있는 나이에요>는 오는 7월 5일까지 시민청 지하 1층에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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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저도 사랑을 시작할 수 있는 나이에요.' 이 독특한 전시 제목은 1989년 12월 1일에 문을 연 삼풍백화점의 광고 카피 문구다. 당시 삼풍백화점은 업계에서 2위를 차지할 만큼 '풍요로운 생활'과 '중산층 신화'를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삼풍백화점은 곧 대한민국 부의 상징으로 통했다. 이런 초고속 경제성장이 무너져 내리는데에는 단 20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삼풍백화점은 '위험을 무릅쓰는 문화'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이번 전시는 한국 사회의 권력과 자본, 강남의 물질만능과 부패를 다른 각도에서 보여준다.

"단순히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를 기억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고 이전과 이후, 기록되고 재정리된 정부 간행물과 출판물을 비롯해 영상자료, 신문기사, 사진, 증언자료 등의 자료들과 소설, 영화, 애니메이션 창작물을 한자리에 모았다. 삼풍백화점 붕괴의 '사건'보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춰 20년 간의 한국사회를 되짚어보고 새로운 마음으로 미래를 준비하는 데 의미가 있다." - 엄광현 전시 기획자의 말

서울광장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면 시민들의 쉼터이자 문화광장인 '시민청'이 나온다. 워낙 넓은 공간이라 매번 올 때마다 다양한 문화행사를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삼풍백화점 붕괴 20주기를 맞아 진행되는 전시 <이젠 저도 사랑을 시작할 수 있는 나이예요>는 크게 네 가지 섹션으로 구성된다. 말하고, 듣고, 보고, 보듬는 것. 전시장에서 체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이용하면 된다.

"지금 포기하면 죽습니다..."

20년 전 삼풍백화점에서 의류 매장을 운영하던 이숙귀(당시 35살)씨의 어머니가 기증한 유품과 사진
▲ 유가족이 기증한 유품과 사진들 20년 전 삼풍백화점에서 의류 매장을 운영하던 이숙귀(당시 35살)씨의 어머니가 기증한 유품과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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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풍백화점 붕괴 당시 사고를 객관적으로 기록한 신문기사가 전시된다. 이밖에도 논평 만화, 백화점 개장 당시 광고, 각종 문서와 출판물 등도 볼 수 있다.
▲ 삼풍백화점 사고 당시 신문기록 삼풍백화점 붕괴 당시 사고를 객관적으로 기록한 신문기사가 전시된다. 이밖에도 논평 만화, 백화점 개장 당시 광고, 각종 문서와 출판물 등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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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문자로 말하는 기억'은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를 기록한 자료들을 재구성해 보여준다. 붕괴사고를 가장 잘 드러나는 역사적 사실과 기록에 초점을 맞춘 것이 특징이다. 전시장 입구에는 총 502명의 사망자 명단으로 쓰여진 삼풍백화점의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여기에는 사고를 객관적으로 기록한 당시의 신문기사를 비롯해 만평, 백화점 개장 당시 광고들을 볼 수 있다. 특히 당시 취재 기자와 유가족 등 5명이 스무 점의 물품을 기증했다. 사고 현장으로 이동하는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 이밖에도 현장에서 발견된 명함, 신분증, 사진, 옷가지들도 전시돼 있다.

두 번째, '영상으로 보는 기억'에서는 사고 당시 뉴스채널의 보도영상, 삼풍백화점을 소재로 한 영화 <가을로>(두타연 제공, 2006)의 일부, 붕괴 모습을 3D 애니메이션(이승준 작)으로 제작한 영상물이 상영된다. 무엇보다 시민청 입구에서 상시 상영되고 있는 대형 전광판이 눈에 들어온다. 사고를 기억하는 유가족과 현장에서 직접 생명을  살렸던 구조대원과 자원봉사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영상으로 볼 수 있다.

"시신을 찾았다고 방송이 나오면 그때 우리가 어떤 인사를 했냐면…, 먼저 가는 사람한테 축하한다고 이야기했어요."(유가족 김문수)
"연기라든지 그 냄새라든지 울부짖는 소리들…. 그런 것은 아직도 기억나는 거 같아요"(언론인 김희섭)

"지금 포기하면 죽습니다. 지금 집에서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포기하지 마십시오."(소방구조대 경광숙)
"작은 아이는 한 손으로 잡고, 큰 아이는 안쪽 보석전에 뛰어가서 손을 잡고 뛰어나갔어요."(생존자 민아무개씨)

전시장 입구에는 총 502명의 사망자 명단으로 쓰여진 삼풍백화점의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 502명의 사망자 명단으로 쓰여진 삼풍백화점 전경 전시장 입구에는 총 502명의 사망자 명단으로 쓰여진 삼풍백화점의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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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리인서울프로젝트 '서울의 아픔, 삼풍백화점'의 일환으로 지난 1년 동안 100여명의 기억을 채록했다. 이렇게 모인 기억을 토대로 공연과 전시 등 다양한 이차 콘텐츠로 제작하게 된다.
▲ 메모리인서울프로젝트 기억 채록 스튜디오 메모리인서울프로젝트 '서울의 아픔, 삼풍백화점'의 일환으로 지난 1년 동안 100여명의 기억을 채록했다. 이렇게 모인 기억을 토대로 공연과 전시 등 다양한 이차 콘텐츠로 제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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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증언으로 듣는 기억'은 서울문화재단이 3년째 진행하고 있는 <메모리인(人) 서울프로젝트>의 결과물이다. 이 사업은 서울의 기억을  지난해부터 '서울의 아픔, 삼풍백화점'이라는 주제로 약 100여 명의 목소리를 채록했다. 이곳에서 삼풍백화점 사고와 관련된 다양한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다. 특히 <메모리인(人) 서울프로젝트>는 지난 1년 동안 모아진 목소리를 토대로 공연과 전시 등 다양한 2차 콘텐츠를 제작해 의미를 더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희망으로 보듬는 기억'은 관람객이 단순히 보는것에만 그치지 않고 참여하고 체험하는 공간을 마련했다. 관람객들은 과거의 교훈을 통해 미래가 지향하는 우리사회의 모습을 게시판에 올리는 것이다. 현장에서 준비된 메모지에 자신만의 메세지나 그림을 그려넣으면 모니터를 통해서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그려진 메모지는 미래에 담고  싶은 사회의 게시판으로 이동해 향후 2차 콘텐츠로 활용하게 된다.

○ 편집ㅣ김지현 기자

덧붙이는 글 | 삼풍백화점 붕괴 20주기를 맞아 기획한 전시 <이젠 저도 사랑을 시작할 수 있는 나이예요>는 오는 7월 5일까지 서울시청 지하 1층 시민청에서 진행됩니다.



태그:#삼풍백화점, #메모리인서울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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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빼고 문화만 씁니다." 매주 금요일마다 한겨레신문에 예술가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는 '사람in예술' 코너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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