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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체르니우치 코튼 성
 우크라이나 체르니우치 코튼 성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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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 삼등석이지."

일등석은 언감생심이고. 이등석을 뭐하러 타? 돈 아깝게. 하룻밤 조금 편하자고 괜한 돈을 더 쓸 수는 없는 게 배낭여행자 팔자 아니겠니. 아니 팔자라기보다는…. 마음가짐? 1억 원 복권에 당첨됐다고 해도 우리의 마음가짐은 늘 삼등석 기차를 향해 있으리오. 남은 몇천 원으로 맥주를 두 잔 더 사 마시고 말지. 그렇지, 더스틴?

"그래, 삼등석 타자. 슬리핑으로 할 거지?"


우크라이나 리비우에서 체르니우치로 가는 밤 기차에는 선택사항이 있었다. 선택. 내가 제일 싫어하는 선택. 여행이라는 건 끊임없는 선택, 선택, 선택의 연속이다. 어디로 갈 건지를 정했다면 다음으로 무엇을 타고 갈지 정해야 한다. 기차를 타고 가기로 했으면 몇 시에 갈지, 이등석을 탈지 삼등석을 탈지, 슬리핑(Sleeping, 침대칸)을 탈지 시팅(Sitting, 좌석칸)을 탈지를 정해야 한다. 선택이 어렵다면 기준을 하나 설정하면 된다. 우리에게도 기준이 있다. 가격. 그냥, 제일 싼 거.

"시팅도 있는데? 시팅이 20히브리나 싸."


더스틴보다는 살짝 더 짠 내가 욕심을 부렸다.

"야, 좀 심했다. 시팅에서 어떻게 자."


아무 데서나 잠을 잘 수 없는 더스틴에게는 20히브리나 보다 잠이 소중하다.

"여긴 인도가 아니고 우크라이나야. 시팅도 웬만큼 편할 걸. 20히브리나면 한 사람에 맥주 두 잔씩이야. 그리고 네가 눕는다고 해서 기차에서 잘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민감해가지고. 너 누워서 갈래, 맥주 두 잔 마실래?"
"음…. 맥주 두 잔."


역시 내 남편. 마음에 든다. 편안함보다는 맥주지. 우리는 인당 3천 원 돈 하는 밤 기차표를 끊고 호스텔에서 하룻밤 묵는 것보다 절반이 싸다며 신이 나서 맥줏집으로 달려갔다. 이 맛이지. 여행의 맛. 말도 안 되게 싼 기차표를 사고 아낀 돈으로 맥주 한 잔 사 마시는 이 맛.

우크라이나 리비우에서 체르니우치로 가는 밤 기차
 우크라이나 리비우에서 체르니우치로 가는 밤 기차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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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틴 눈이 퀭하다. 역시 한숨도 못 잔 거야?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잠이 와? 그렇게 시끄러운데?"
"시끄러워? 뭐가?"


20히브리나 아끼겠다고 시팅 표를 끊은 건 대단한 불찰이었다. 삼등석 슬리핑과 시팅은 마치 VIP와 화물칸 사이만큼의 큰 차이가 있었다. 깨끗하고 아늑한 침대칸과 확연히 대비되는 시팅칸은 버려진 유흥가의 새벽 3시를 연상 시켰다.

의자는 나무벤치. 그러니까, 공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긴 나무를 열 개 정도 연결해서 만든 그 나무 벤치. 벤치 위에는 자정이 넘은 시각 어둑한 도심 공원 벤치에 앉아있을 만한 취객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달리는 기차 안에서 보드카 병나발을 불고 있는 얼굴 뻘건 아저씨들. 취객은 둘째 치고, 이 딱딱한 나무 벤치에서 6시간을 어떻게 앉아 있나. 나무 벤치 같은 건 산책하다가 10분 정도 앉아 있으라고 만든 물건 아닌가. 나무 벤치. 아, 나무 벤치라니. 야간 기차에 나무 벤치라니!

앉을 수 없으니 누웠다. 얼굴이 돌아갈 정도로 잔인하게 딱딱하지만, 그래도 누우니 잠이 온다. 일어나니 한 시간 정도의 여정과 벤치에 눌려 납작해진 내 오른쪽 볼과, 퀭한 더스틴의 두 눈이 남아 있다.

"달리는 기차 안에서, 다른 것도 아니고 러시아 보드카에 취한 남자들이 육탄전을 벌이고 있는 마당에 그 딱딱한 벤치에 누워서 자다니. 취객들 싸움도 싸움이었지만 그 상황에서 넋 놓고 자는 네 얼굴이 제일 볼 만하더라."


이런. 자느라 재밌는 구경을 놓쳤다.

체르니우치 대학의 토요일, 결혼식이 한창


체르니우치는 대학가다. 우크라이나의 여느 도시 못지않게 조용한 분위기이지만, 젊은 대학생들 탓인지 활기가 돋는다. 졸업 이후 대하는 대학생들은 뭐랄까…. 햇볕 같다. 음울한 삼등석 기차 시팅칸, 아니 벤치 칸에서 밤새 고통을 당하다 기차역에서 나와 처음 마주한 눈 부신 햇살.

좋은 건 알겠는데 찡그리게 되는. 피곤해 죽겠는데 왜 이렇게 뜨겁고 밝아. 혼자 눈부실 것이지. 혼자 어릴 것이지. 가진 거 없어도 어리다는 가능성만으로 눈부신. 이 질투 나는 존재들. 흥. 아. 햇살은 왜 이렇게 밝나. 세수도 못해서 얼굴에 기름만 잔뜩 끼었는데.

체르니우치 거리. 우크라이나의 여느 도시 못지않게 조용한 분위기이지만, 젊은 대학생들 탓인지 활기가 돋는다.
 체르니우치 거리. 우크라이나의 여느 도시 못지않게 조용한 분위기이지만, 젊은 대학생들 탓인지 활기가 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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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약한 호스텔까지는 걸어서 30분이 걸렸다. 도대체 사그라질 줄 모르는 햇살이 꽁무니를 쫓아온다. 호스텔은 (다행히) 햇살이 잘 들지 않는 음울한 골목 한구석 건물 3층이다. 초인종을 누르고 그늘진 계단을 따라 올랐다.

가정집 방 한 개에 2인용 벙커 침대 세 개를 놓은 작은 호스텔이다. 호스텔 주인은 쉰 살의 영국인 마크. 재혼한 지 얼마 되지 않는 30대 초반의 새 아내 소피아와 호스텔을 운영한다. 영국에서 함께 온 마크의 18살 아들 데럴도 함께 산다. 5평 남짓 되는 부엌 딸린 작은 거실 한가운데는, 마치 어제 갓 세상에 나온 것 같이 작은 마크와 소피아의 새아기가 잠들어 있다.

"마크라고 해요. 잘 왔어요. 잘 왔어. 우리 호스텔에 오신 건 행운이에요."
"아, 네…."


평범하고 소박한 가정식 호스텔이라 며칠 지내기에는 무리가 없겠지만…. 뭐 행운까지야.

"난 영국 출신인데, 체르니우치로 와서 호스텔을 차린 지는 2년 정도가 됐어요. 그전에는 우크라이나 전역의 관광 사업을 관장했죠. 이 우크라이나에 여행, 관광 관련된 일은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되는 일이 없다고. 론리플래닛 작가들이 저번 주에도 전화했어. 나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거든."

허풍스러운 타입이군. 그냥 맞춰주자.

"그러시구나…. 체르니우치에서는 뭘 해야 하죠?"
"여기는 대학가예요. 일단 오늘은 체르니우치 대학에 가보고. 내일은 내일 저랑 코투(Kothu) 성곽 투어에 갑시다."
"코투요?"
"투어 비싸다고 내 도움 없이 자기들끼리 성을 찾으러 간 배낭여행자들이 몇 있었어요. 거의 다 못 찾고 그냥 돌아왔지. 돈 몇 푼 아끼자고 여행을 그렇게 하면 안 돼. 코투 성은 구멍 아래 지어져 있어서 찾기가 힘들거든."


돈 몇 푼 아끼자고 밤새 나무 벤치에 앉아 기차를 타고 온 우리는 매우 찔렸다. 그러고 보니 이 아저씨 꼰대 끼도 좀 있네. 남 여행에 이래라저래라. 여행은 이래야 한다, 삶은 저래야 한다.

"저희는 개별적으로 다니는걸 좋…."
"투어하면 아주 좋아요. 거기 가서 바비큐도 구워 먹고."
"바비큐요?"
"내 시간 여유 되면 그릴 가져가서 성 옆에서 바비큐도 구워 주고 그러거든."
"갈게요."

고성 옆 야외 바비큐라는 말에 훅 간 우리는 형편에 맞지 않는 투어를 예약해 버렸다. 됐어. 오늘 덜 쓰면 되지. 우리는 월급날을 기념하여 평소에 가지 않는 조금 비싼 식당을 예약해 버린 가난한 신혼부부 같은 뿌듯한 기분이 되어 숙소를 나왔다. 30분 정도를 걸으니 체르니우치 대학이다. 이 도시에서 제일 볼 만하다는 명소로, 유네스코 세계 유산이다.

체르니우치 대학의 토요일. 결혼식이 한창이다. 신혼여행 대기 중인 꽃마차만 열대가 넘는다.
 체르니우치 대학의 토요일. 결혼식이 한창이다. 신혼여행 대기 중인 꽃마차만 열대가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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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니우치 대학.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대의 산물이다.
 체르니우치 대학.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대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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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니우치는 우크라이나와 루마니아 국경 근처에 있다. 전쟁으로 허리가 뚝 끊어진 한반도의 자손인 나에게 육로로 연결된 국경 도시란 언제나 신선하다. 하지만 그건 내 환상일 뿐. 대부분의 국경 도시는 더럽고, 매력 없고, 조잡하다. 체르니우치는 내 머릿속 상상의 국경도시에 가까운 곳이다. 깔끔하고, 매력적이다. 한껏 유럽답다.

체르니우치는 우크라이나이기 전에 루마니아였다. 13세기 몽골제국의 침략을 시작으로, 체르니우치는 차례로 폴란드, 몰도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20세기에는 루마니아의 영토였다가 소련으로 귀속되었고, 소련 해체 후에야 우크라이나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복잡한 역사를 따라 흘러들어온 인구 구성도 복잡하다. 체르니우치에는 65개의 다양한 민족들이 함께 살아간다. 우크라이나인, 러시아인, 루마니아인, 몰도바인, 폴란드인, 유대인. 그리고 마크같이 사업차 들어온 서유럽 사람들. 성인이 되기 전에는 한국인 그리고 한국인 또 한국인만 마주하고 살아온 나에게는 생소한 역사와 문화다.

체르니우치 대학은 도시의 복잡한 역사 중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대의 산물이다. 대학 건물은 1882년 지어졌는데, 당시에는 동방정교 지도자들이었던 부코비나 지역의 행정관 궁전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대학 건물로 영속된 건 소련 때의 일이다.

우아한 궁전 같은 자태를 뽐내는 체르니우치 대학이라 그런지 결혼식 장소로 인기가 많은 모양이다. 토요일인 오늘, 결혼식이 한창이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신부. 신부보다 조금 덜 화려하지만 아름답게 꾸민 파란 원피스의 신부 들러리들. 꽃으로 장식한 신혼 차.

오늘 결혼식을 치르는 커플만 해도 열 팀은 본 것 같다. 커플은 우크라이나인일까. 독일인일까. 루마니아인일까. 아니, 체르니우치인이라고 해야 맞는 말이려나. 우크라이나에서도 젊음은 눈부시다. 폴란드였던, 몰도바이고 오스트리아이고 루마니아였던, 그리고 소련이었던 도시. 과거는 그렇다. 과거가 이루어 낸 대학가 궁전 안에서 오늘, 젊은 커플들은 개개인의 작은 역사를 쓴다.

포르셰와 맞바꾼 고물 트럭을 타고, 코투 성으로


"체르니우치가 아내분 고향인가요? 왜 하필 여기다 호스텔을 내셨는지…."
"왜냐고요? 아름답잖아요! 내가 한때는 우크라이나의 관광 사업을 다 장악했다고, 어제 말했죠? 그렇게 살다 보니 너무 바쁘지 않겠어요? 그래서 좀 단순한 삶을 살아보려고, 다 정리하고 새 아내랑 체르니우치로 왔어요. 내 한때는 포르셰를 몰았는데, 여기 오면서 포르셰고 뭐고 다 팔았어. 우크라이나에 포르셰를 모는 사람이 없었거든. 나 하나였어."


마크는 영국 억양으로 포르셰의 'P'를 강하게 내뱉었다. 팔아치웠다는 포르셰 대신 중고 트럭을 타고 코투 성으로 향하는 길이다. 떨어져 나간 트럭 옆구리는 노란 덕트 테이프가 겨우 지탱하고 있었다. 차를 탈 때는 뒷좌석 문이 말썽이었다. 마크는 당황한 우리를 안심시키며 운전석으로 들어가 안에서 문을 벌컥 열어주었다. 이 상태 안 좋은 트럭은 뭐지. 마크는 포르셰를 대체 얼마나 헐값에 판 거야?

"다 왔어요."

성에 다 왔다는데, 주위엔 아무것도 없다.

"어디 한 번 찾아봐요, 성 어디 있는지."
"…. 안 보이는데요."


마크의 뻔한 수작에 짜증이 났다. 데리고 온 사람마다 물어봤겠지. 성을 찾아보라고. 그렇게 바보 취급을 한 후, 지금처럼 이렇게 말했겠지.

"안 보이죠? 하하하하! 내가 말했잖아. 내 도움 없이 오면 길 잃는다고."
"…."
"코투 성은 골짜기 아래 지어졌거든요. 방어를 위해서. 이런 지형에 지어진 성은 전 세계에 17개밖에 없어요."


코튼 성. 방어를 위해 움푹 파인 골짜기 아래 지어졌다. 골짜기 위에서 보면 성이 보이지 않는데, 이런 지형에 지어진 성은 전 세계에 17개다.
 코튼 성. 방어를 위해 움푹 파인 골짜기 아래 지어졌다. 골짜기 위에서 보면 성이 보이지 않는데, 이런 지형에 지어진 성은 전 세계에 17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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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튼 성. 마녀 모자처럼 뾰족한 성 지붕이 동화같다.
 코튼 성. 마녀 모자처럼 뾰족한 성 지붕이 동화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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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베이거스에서 온 제이크 아저씨가 덧붙였다. 마크의 뻔한 작전에 약이 오르긴 했지만, 코투 성은 예뻤다. 동화 같은 동유럽이라더니. 마녀의 모자처럼 삐죽한 성곽 지붕. 성곽을 둘러싼 녹지와 강물. 이런 데구나.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책에 나오는, 묘지를 지키는 머리를 단발로 자른 희한한 머리 스타일의 집사들이 사는 곳.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라푼젤과 잠자는 숲 속의 미녀와 백설공주가 모두 숨어 있을 것 같은 분위기다. 작은 난쟁이들과 영악한 묘지 관리원들과 아름다운 미녀가 잠들어있는 곳. 이런 곳에서라면, 새로운 동화 속 이야기들이 저절로 떠오를 것만 같다.

코튼 성. 이런 곳에서라면 새로운 동화 속 이야기들이 저절로 떠오를 것만 같다.
 코튼 성. 이런 곳에서라면 새로운 동화 속 이야기들이 저절로 떠오를 것만 같다.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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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튼성은 예뻤다. 동화 같은 동유럽이라더니. 마녀의 모자처럼 삐죽한 성곽 지붕. 성곽을 둘러싼 녹지와 강물. 이런 데구나.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책에 나오는, 묘지를 지키는 머리를 단발로 자른 희한한 머리스타일의 집사들이 사는 곳. 이런 곳에서라면 새로운 동화 속 이야기들이 저절로 떠오를 것만 같다.
 코튼성은 예뻤다. 동화 같은 동유럽이라더니. 마녀의 모자처럼 삐죽한 성곽 지붕. 성곽을 둘러싼 녹지와 강물. 이런 데구나.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책에 나오는, 묘지를 지키는 머리를 단발로 자른 희한한 머리스타일의 집사들이 사는 곳. 이런 곳에서라면 새로운 동화 속 이야기들이 저절로 떠오를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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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마크의 고물 트럭을 타고 카미아넷-포딜스키(Kamyanets-Podilsky)로 향했다. 우크라이나와 몰도바, 루마니아 국경이 접하는 도시다. 능구렁이 등허리처럼 굽어 흐르는 스모트리치 강을 잇는 다리를 건너면 올드타운이다.

카미아넷-포딜스키 성은 우리가 방금 건넌 다리, 즉 100년간 육지를 연결하는 유일한 다리였던 교량을 보호할 목적으로 세워진 성곽이다. 코투보다 웅장하고 아름답다. 뾰족하고 기다란 성곽의 지붕들 아래에는 마녀들이 살 것만 같다. 실제로는 마녀가 아닌 수녀들이 살았단다.

카미아넷-포딜스키
 카미아넷-포딜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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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아넷-포딜스키(Kamyanets-Podilsky). 우크라이나와 몰도바, 루마니아 국경이 접하는 곳으로 같은 건물이 교회로 쓰였다가 모스크로 쓰이기도 했다. 십자가 앞에 회교도 미나렛이 서 있는 모습. 

로 향했다. 우크라이나와 몰도바, 루마니아 국경이 접하는 도시다. 능구렁이 등허리처럼
 카미아넷-포딜스키(Kamyanets-Podilsky). 우크라이나와 몰도바, 루마니아 국경이 접하는 곳으로 같은 건물이 교회로 쓰였다가 모스크로 쓰이기도 했다. 십자가 앞에 회교도 미나렛이 서 있는 모습. 로 향했다. 우크라이나와 몰도바, 루마니아 국경이 접하는 도시다. 능구렁이 등허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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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물은 수녀원이었는데, 금욕적인 생활을 해야 했던 수녀들을 가둬 놓았던 곳이죠."

마크가 주머니에서 꺼낸 선글라스를 쓰며 설명을 시작했다.

"근데 한 수녀가 임신한 거예요. 성곽에 가둬놨는데 어떻게 임신을 했을까? 마을에 소문이 났죠. 성령의 기적이라고. 동정녀 마리아처럼 성령으로 잉태한 거라고. 근데 나중에 이 앞 건물과 수녀원을 연결하는 땅굴이 발견됐어요. 수도사들이 땅굴을 파서 수녀들이 사는 이 건물로 들어간 거지."
"땅굴? 여기서 저 건물까지 100m는 족히 넘어 보이는데요?"
"건너편 성에 여자들이 우글거린다는데 그런 게 문제가 되나."


하여간 남자들이란. 감옥에서 탈출해 자유를 찾자는 것도 아니고, 살아남자는 것도 아니고, 수녀랑 하룻밤 자자고 100m 넘는 땅굴을 파? 몇 주, 몇 달이 걸렸을까. 의지의 성욕이다, 정말.

카미아넷-포딜스키 성은 우리가 방금 건넌 다리, 즉 100년간 육지를 연결하는 유일한 다리였던 교량을 보호할 목적으로 세워진 성곽이다.
 카미아넷-포딜스키 성은 우리가 방금 건넌 다리, 즉 100년간 육지를 연결하는 유일한 다리였던 교량을 보호할 목적으로 세워진 성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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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난아기, 술 취한 퇴역 군인, 여성 혐오자... 귀곡산장?

"저녁 뭐 먹을래?"
"오늘 투어하느라 돈 많이 썼으니까…. 마트나 가자."

가난한 우리는 마트로 가서 냉장고를 뒤적거렸다. 10히브리나짜리 냉동 피자를 하나 샀다. 투어를 따라가면 해 준다던 바비큐는 별말도 없이 흐지부지됐다. 흥. 그래도 성욕 끓는 수도사와 수녀의 로맨스(?) 얘기도 해줬으니 봐준다. 우리는 냉동 피자를 사 들고 호스텔로 돌아갔다. 거실에는 여전히 테리가 앉아있다. 어제 호스텔에 도착했을 무렵부터 지금까지, 거실 테이블에 꼼짝없이 앉아 화이트 와인을 마시는 아저씨 테리.

"케헴…. 케, 케헴!"

화이트 와인 한 모금에, 목을 두 번 가다듬는 것이 테리의 방식이다.

"투어 어땠나?"
"뭐, 좋았어요. 동화 같고 예쁘던데요."
"좋은 곳이지. 좋은 곳이야. 난 체르니우치가 마음에 들어. 난 퇴역 군인이라 시간이 많거든. 늘 이 호스텔에 와서 석 달씩 머물곤 하지. 그리고 석 달 미국 집에 갔다가 다시 오고. 일 년의 반을 여기서 지내는 거야."
"아, 네…."
"케헴! 케, 케헴!"
"마크, 오븐 좀 써도 돼요? 냉동 피자 사 왔는데…."
"냉동 피자? 그런 건 뭐하러 샀어요. 식당에서 먹어도 10히브리나인데. 뭐 정 사 왔으면 써요."

비닐봉지에서 차가운 피자를 꺼내 오븐에 넣었다. 유난히 가슴이 큰 마크의 젊은 부인은 우리가 부엌을 쓰는 게 마음에 안 드는지 소파에 앉아 우리를 힐끔댔다. 테리는 여전히 식탁에 앉아 화이트 와인을 홀짝이고 있다. 거실 중앙 흔들 요람에는 마크의 새아기가 잠들어있다. 이거 뭔가, 굉장히 불편하다.

"말세라고, 말세. 여자가 투표권을 갖는 건 내가 모는 말이 투표권을 갖는 거나 다름없다고!"

피자가 구워지는 동안 불편한 거실을 빠져나와 도미토리 룸에 누웠다. 거실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난다. 억양을 보아 하니 미국 사람이다. 젊은 미국 남자가 하나 묵고 있다더니 그 사람인가.

"자네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여성도 투표권을 갖는 게 당연하지. 같은 사람인데."
"하! 제 말 못 들었습니까? 여자는 말, 제가 모는 말 같은 존재란 말입니다. 여자한테 투표를 시키는 건 아무 생각 없는 말이 투표하는 거랑 똑같다고요!"


카미아넷-포딜스키(Kamyanets-Podilsky). 우크라이나와 몰도바, 루마니아 국경이 접하는 도시다.
 카미아넷-포딜스키(Kamyanets-Podilsky). 우크라이나와 몰도바, 루마니아 국경이 접하는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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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남자와 논쟁 중인 사람은 스코틀랜드에서 온 말콤 할아버지다. 둘은 말도 안 되는 논쟁을 삼십 분 동안 이어가더니 급기야 밖으로 나갔다. 나는 잠잠해지길 기다렸다가 거실로 나갔다. 호스텔에는 새로운 손님이 와 있었다. 미국에서 온 매튜와 크리스. 신혼여행으로 세계 일주를 하는, 우리보다 나이가 한 살씩 많은 신혼부부다. 죽이 맞은 우리는 서로의 여행과 앞으로의 여행계획에 관해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러시아에서 시작했는데, 비자 때문에 준비가 힘들었어. 러시아 말고 다른 데서 시작할 걸 그랬어. 러시아는 뭐랄까…. 나중에 돈 많을 때 편하게 여행하면 좋을, 그런 곳이었어."

매튜가 말했다.

"우리는 세계여행까지는 아니고. 원래 동남아를 돌려다가 인도로 방향을 바꿨다가. 그냥 갑자기 동유럽으로 넘어왔어. 뭔가 새로운 게 보고 싶어서."
"준비는 얼마나 오래 했어? 우리는 3년 전부터…."


매튜와 크리스는 철저하고 성실한 여행가들이다. 여행 계획은 3년 전부터 잡았고, 여행 기록을 위해 GPS 기계와 휴대용 노트북까지 새로 구매했다. 여행자 보험은 당연하고, 세계 어디서나 수수료 없이 ATM을 사용할 수 있는 신용카드도 가지고 있다. 고국인 미국으로 무료 연결이 가능한 통신사를 이용한다. 더스틴과 나의 가방보다 10L씩 큰 매튜와 크리스 가방에는 비상약부터 기능성 속옷까지, 종류대로 분류된 짐들이 차곡차곡 들어있다. 그래. 신혼여행으로 세계여행을 하려면 이 정도는 돼야지. 우리는 완전 허당이야.

"대단하다. 우린 정말 아무것도 없는데. 여행자 보험은 어차피 3개월밖에 안 된다고 해서 가입도 안 했고. ATM은 그냥 수수료 내고 쓰고…. GPS 같은 건 생각도 못 했네. 비상약도 없고 보험도 없어서 급하면 약도 얻어먹고…."
"그래도 여기까지 왔잖아? 우리는 이제 시작이라 배울 게 많아. 인도도 갈 건데 얘기 많이 해줘."

크리스틴이 말했다. 상냥하다, 는 그녀의 첫인상이 머릿속에 새겨졌다.

코튼 성.
 코튼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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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다음으로는 어디로 가? 우리는 루마니아로 가. 차를 빌려보려고. 루마니아 북쪽 지역에 유네스코 유산들이 많아서 차로 돌아보는 게 좋다고 하는데. 둘이 빌리기에는 좀 부담스러워서 일행을 찾아볼까 생각 중이야."

매튜가 말했다. 로드 트립이라니. 역시 준비 많고 규모가 큰 여행은 방식도 다르구나.

"케헴! 케헴!"
"소피아, 시트 다 말랐는데 어디에…."
"뭘 맨날 묻니, 넌? 가서 침대에 잘 끼워놔. 화장실 쓰레기통 비우라니까 왜 안 했어?"

테리의 기침. 데럴의 질문. 소피아의 짜증이 순서대로 이어졌다. 창백한 데럴의 얼굴은 이제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려 있다. 갓난아기 요람 옆에 선 데럴의 모습은 애초에 너무 깡마른 나머지 뭔가 비현실적인 데가 있다. 밖에서 돌아온 말콤은 여성 혐오자인 젊은 미국 남자와의 논쟁에서 졌는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다.

50대 주인 마크. 주인의 젊은 새 부인 소피아. 병적으로 마른 십 대 아들. 거실 한가운데 요람에 놓인 갓난아기의 울음. 온종일 구석에 앉아 화이트 와인을 들이키는, 일 년의 반은 이 호스텔에서 지낸다는 퇴역 군인. 여성 혐오자. 주위 상황을 종합해 보면 이렇다. 약간 소름이 돋는다. 여기 좀, 프란체스카가 사는 귀곡 산장 같지 않아?

매튜와 크리스틴, 더스틴과 나는 거실에 흐르는 이상한 공기를 피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모두 같은 생각이다. 그치? 여기, 좀 귀곡 산장 같지?

더스틴은 오래간만에 만난 마음 맞는 또래 미국 친구들에 사로잡혔다. 두세 시간의 수다 끝에, 매튜와 크리스틴이 찾던 루마니아 마라무레슈 로드 트립의 동행자는 결국 우리 둘이 되었다. 내일 같이 국경을 넘는다. 새로운 여행이다. 새로운 국가. 새로운 동행자다.

"루마니아 별거 없어요. 루마니아는 우크라이나와 달리 EU 가입국이라 물가만 두 배로 비싸고. 여기 체르노비치보다 싼 곳은 없다고. 렌트카? 말썽 많을 걸…."

마크는 루마니아로 가서 차를 빌리겠다는 우리의 계획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나는 내심 기뻤다. 무조건 마크가 하는 충고 반대로 하고 싶으니까.

"야, 너! 어따대고! …. 꺼억. 야!"
"멍청한 겁쟁이 주제에 씨O, 난 말이야! 겁나는 게 없는 사람이야! 나한테 덤비지 말라고!"
"끄억. 꺼억."


귀곡 산장의 밤은 무섭다. 무서운 건 둘째치고, 너무 시끄럽다. 딱 하나 있는 도미토리 방에는 온종일 와인을 마시고 잔뜩 취한 테리와, 미국 남자와의 논쟁에 져서 분한 말콤과, 마크의 깡마른 아들 데런이 누워 자고 있다. 테리와 말콤은 서로 대화라도 하듯, 트림 한 번에 욕설 한 번씩을 주고받으며 잠꼬대를 이어갔다.

"미국인이라고! 미국 대환영!"


테리가 외쳤다. 오늘은 밤이 길다.

카미아넷-포딜스키. 뾰족하고 기다란 성곽의 지붕들 아래에는 마녀들이 살 것만 같다. 실제로는 마녀가 아닌 수녀들이 살았단다.
 카미아넷-포딜스키. 뾰족하고 기다란 성곽의 지붕들 아래에는 마녀들이 살 것만 같다. 실제로는 마녀가 아닌 수녀들이 살았단다.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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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ㅣ김준수 기자



태그:#체르니우치, #우크라이나, #동유럽, #코투 성, #카미아넷-포딜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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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한 부부의 히말라야 여행,'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 인도편'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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