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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정의의 여신을 형상화한 대법원 CI(자료사진).
 정의의 여신을 형상화한 대법원 CI(자료사진).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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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법원의 상징(CI·Corporate Identity)은 정의의 여신이다. 한 손에 법전을 든 여신의 다른 손에는 '엄정한 정의'를 상징하는 저울이 쥐어져있다. 대법원 홈페이지는 이 CI가 "정의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표현했다"고 소개한다. 그만큼 정의는 사법부가 지켜야 할 가치이고, 마땅히 해야 할 기본으로 꼽힌다.

하지만 22일 오후 서울시 중구 프란치스코회관에서 열린 대법원 긴급조치 국가배상판결 규탄토론회에 모인 사람들은 대한민국 법원에게 정의를 되물었다. 그들은 대법원이 "민주주의의 무덤"이 됐다고 말했다. 몇몇은 1970년대 유신독재시절 대통령 긴급조치(아래 긴급조치) 위반 유죄 판결로 젊음을 빼앗긴 인물들이었다.

그때 그 시절 그들은 정의의 여신을, 법원을 믿지 못했다. 2010년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긴급조치 위헌 판결과 2013년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이 나온 뒤에야 불신의 무게는 조금 가벼워졌다.

☞ 유신시대 긴급조치 1호 '위헌' 판결
☞ 유신헌법-긴급조치, 40년 만에 공식 사망

40년 만에 되찾은 '엄정한 정의', 다시 흔들

22일 오후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회관에서 대법원긴급조치국가배상 판결 규탄 토론회가 열리고 있다.
 22일 오후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회관에서 대법원긴급조치국가배상 판결 규탄 토론회가 열리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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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0년이 채 지나지도 않아 믿음은 다시 흩어졌다. 과거사 청산은커녕 국가에 면죄부를 주는 판결을 잇달아 내놓던 대법원은 3월 26일 쐐기를 박았다. 이날 대법원 3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긴급조치가 나중에 위헌으로 판명나긴 했지만 당시 유신헌법에 근거한 긴급조치권 행사는 문제가 없다고 했다. 여기에는 국가가 피해자에게 배상할 책임 역시 없다는 결론이 더해졌다.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행사는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행위로, 이 일은 국민 전체에 대한 관계에서 정치적 책임을 질 뿐, 국민 개개인의 권리에 대응해 법적 의무를 지지 않는다."

☞ 과거사 피해자들, 헌재에선 웃고 대법원에선 울고

22일 한상희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교수는 이 판결을 두고 "너무나 문제가 많아서 무엇부터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입을 뗐다. 그는 "대법원과 헌재 모두 긴급조치를 위헌이라고 하고선 대통령이 긴급조치를 선언하는 행위는 통치행위라 법원이 판단하면 안 된다고 한다"며 "제가 주먹을 뻗어서 앞에 있는 사람을 치는 것은 잘못됐지만 손을 뻗은 것은 잘못이 아니라는 희한한 얘기"라고 했다.

문병효 강원대 로스쿨 교수는 "긴급조치 발동은 대통령이 고의로 명백히 헌법에 반하는 조치를 한 것"이라며 "(국가가) 법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대법원의) 해괴한 논리는 어디서 나왔냐"고 비판했다. 그는 1996년 헌재가 김영삼 정부의 금융실명제를, 2004년 대법원이 김대중 정부의 대북송금을 통치행위라면서도 국민의 기본권을 지나치게 침해했다고 판단했다며 대법원 판결은 이 선례에도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재승 건국대 로스쿨 교수 역시 "대법원의 긴급조치 판결은 판사들이 유신시대로 돌아가서 유신 판사 역할을 충실히 한 결과"라고 혹평했다. 그는 이 판결뿐만 아니라 과거사 피해자들이 국가배상금을 청구할 시효기간을 '재심 무죄판결 확정일로부터 3년 내'에서 별 다른 근거 없이 '6개월'로 줄여버린 일을 두고도 "법원이 권리의 조력자가 아닌 봉쇄자가 됐다"고 꼬집었다. 이어 "(국가배상금 청구)시효가 6개월인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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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뾰족한 수가 없는 현실이다. 과거사 청산은커녕 퇴행하는 대법원 판결이 잇따르자 하급심 판사들의 고민이 깊어졌다. 몇몇 판사들은 대법원의 법리를 파고들어 국가의 배상책임을 인정하려고 힘썼고, 그 노력은 판결로 이어졌다. 하지만 지금의 대법원에서 그 판결들이 유지될까? 전망은 밝지 않다. 현재의 사법체계 안에선 대법원의 최종 결론을 뒤집을 절차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토론회 참석자들은 '입법'으로 길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2012년 새누리당 하태경 의원과 새정치민주연합 전해철·정청래 의원이 각각 만든 긴급조치 피해자 구제법안도 있다. 그런데 세 법안은 3년째 국회에서 잠자고 있다. 그나마 전해철 의원안은 소관상임위 심사가 진행 중이지만, 언제 결론이 날지 모른다. 이 법안들은 내년 4월 19대 국회 임기가 끝나면 자동으로 폐기된다.

눈 감은 사법부, 손 놓은 정부·국회... "민주주의 힘 잃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후보시절 기자회견을 자청, "5·16과 유신, 인혁당 재건위 사건 등은 헌법 가치가 훼손되고 대한민국의 정치 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며 사과했다. 하지만 당선 후 그는 과거사 청산을 위해 별 다른 노력을 보이지 않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후보시절 기자회견을 자청, "5·16과 유신, 인혁당 재건위 사건 등은 헌법 가치가 훼손되고 대한민국의 정치 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며 사과했다. 하지만 당선 후 그는 과거사 청산을 위해 별 다른 노력을 보이지 않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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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정치가 필요하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과거사 청산작업 일부가 이뤄진 것은 행정부의 추진력에 국회의 문제의식이 합해졌기 때문이다. 대선 후보 시절,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독재를 사과하며 "과거의 아픔을 가진 분들을 만나고 더 이상 상처로 남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약속한 박근혜 대통령을 보며 과거사 피해자들이 조금은 기대했던 일이기도 했다.

☞ 고개 숙인 박근혜 "5·16, 유신, 인혁당사건 헌법가치 훼손"

3년 뒤, 그 기대는 실망은커녕 그들을 공격하는 무기로 돌변해버렸다. 토론회 당일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 축하행사 현장을 찾은 박 대통령은 "(한일 간) 과거사의 무거운 짐을 화해와 상생의 마음으로 내려놓을 수 있도록 만들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정작 자신과 아버지의 짐을 내려놓는 일에는 침묵을 유지하고 있다. 정의의 여신이 눈을 감아버리고 정부와 국회는 손 놓고 있는 오늘, "우리는 민주주의의 힘을 잃었다"는 이상희 변호사의 한 마디가 가슴을 때릴 뿐이다.

○ 편집ㅣ최은경 기자



태그:#박근혜, #박정희, #과거사, #대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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