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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소고택 솟을대문과 담장 끝으로 송정고택이 보이는 풍경
 송소고택 솟을대문과 담장 끝으로 송정고택이 보이는 풍경
ⓒ 정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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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청송은 이름 그대로 자연의 푸른 빛으로 가득 찬 깊은 산골이다. 그러나 청송 사람들의 정신은 시골에 갇혀 사는 이들 특유의 답답한 기풍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도리어 소나무처럼 곧고 생생했다.

이미 고구려 때부터 지명에 '푸를 청(靑)'을 써온 청송은 한말 의병 투쟁기에 소나무와도 같은 정신을 발휘했다. 이는 2015년 현재 국가보훈처 공훈록에 청송 의병이 88명이나 등록되어 있다는 사실로 증명된다. 전국의 기초자치단체 중 가장 많은 인원이다. 그래서 청송에는 지역만이 아니라 전국의 의병 열사를 모시는 <항일 의병 기념관>이 세워졌다.

송소고택의 소슬대문
 송소고택의 소슬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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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 의병의 고장 청송에 전국적으로 이름난 고택이 있다. 가옥을 처음 건축한 이의 호에서 집 이름을 따온 송소 고택이다. 국가 지정 중요민속자료 250호인 송소 고택은 영조 때 만석꾼 심처대의 7대손인 송소 심호택이 1880년(고종 17)에 지었다.

송소 고택에도 청송 사람들의 푸른 정신이 배어 있다. 심호택을 99칸이나 되는 거대 가옥을 신축한 단순 거부로 여겨서는 안 된다. 심호택은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을 때 청송 일대에 취지서를 돌려 나라를 구하는 일에 모두 동참하자고 호소한 지사였다. 그의 아들 심상원은 1945년 해방 이후 선구적으로 토지를 소작농들에게 나눠줌으로써 경상도 일원에 자작농이 활기를 띠는 계기를 만들었다. 청송에 거주하는 향파 심씨들의 시조 심원부는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반대하여 두문불출한 강직한 선비였다.

그림으로 그려본 송소고택 사랑채
 그림으로 그려본 송소고택 사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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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소 고택의 별칭은 심부자 집이다. 송소 고택이라는 이름보다 심부자 집이라는 칭호가 훨씬 이전부터 있었다. 심호택은 가문을 대부호로 일궈내어 진작부터 심부자 소리를 들었던 심처대의 7세손이기 때문이다. 선대가 거주해온 덕천마을을 떠나 심처대는 호박 골(파천면 지경리)에 살면서 부를 쌓았는데 심호택이 다시 세거지로 돌아오면서 새로 99칸 송소 고택을 건축했다.

송소 고택은 대문채, 안채, 별당, 큰 사랑채, 작은 사랑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놀라운 것은 건물마다 독립된 마당이 있다는 점이다. 그만큼 송소 고택은 규모가 크다. 본래 임금 아닌 사람이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주택인 99칸 집을 지었기 때문에 아직도 어마어마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송소 고택은 청송읍에서 그리 멀지 않은 파천면 덕천리에 있다. 물론 청송심씨 동족 마을인 덕천리에 송소 고택만 있을 리는 없다. 그래서 덕천마을이라면 흔히 고택 밀집지로 인식된다. 다만 송소 고택의 규모가 다른 고택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거대한 탓에 덕천마을의 총칭이 송소 고택으로 알려졌을 뿐이다.

송소고택 재실
 송소고택 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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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마을을 찾는 나그네 중에는 도로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거대 한옥을 송소 고택으로 오인하기도 한다. 앞에 개천을 두고 있고, 뒤로 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옆으로 한옥 관리동까지 붙어 있는 건축물의 풍모가 너무나 범상하지 않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리를 건너 그리로 다가가게 된다.

이 거대 한옥은 송소 고택이 아니라 조상인 심원부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청송심씨 재실이다. 따라서 보통 때에는 일반인이 들어갈 수 없다. 그러므로 이곳이 송소 고택인 줄로 여기고 찾았던 나그네들은 닫힌 문앞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아닌 줄 깨닫게 된다.

혹 행운이 찾아와 재실 경내로 들어가 본 나그네는 현판에 경의재(敬義齋)라 새겨져 있고 뜰앞 빗돌에 경충(敬忠) 두 글자가 커다랗게 박혀 있는 정경을 확인하게 된다. 그 후 나그네는 "덕천마을에서는 의와 충이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말을 사람들에게 전파할 수 있을 것이다.

송정고택
 송정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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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소 고택을 둘러보다 보면 담장에 난 작은 협문과 마주치게 된다. 보통 협문은 집 밖으로 나가기 위해 편의상 설치한 작은 문이다. 그런데 이곳 협문은 밖으로 나가도 또 집 안이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싶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송소 고택에서 협문으로 들어간 곳은 송정 고택이다. 송정 고택은 송소 심호택의 둘째 아들 심상광이 거주했던 고택으로 1914년에 지어졌다. 둘째 아들의 집인 만큼 서로 쉽게 왕래하기 위해 담장에 작은 문을 설치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나그네들도 그 문으로 드나든다.

송정 고택은 2015년 5월 18일 문화재자료 631호로 지정되었다. 어째서 그동안 송정 고택이 문화재로 지정을 받지 못했는지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본래 건축물 등이 문화재로 지정을 받으려면 100년 이상의 역사가 서려 있어야 한다. 송정 고택이 1914년생이다.

창실고택
 창실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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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에 태어나 100세를 넘긴 까닭에 송정 고택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631호의 영광을 누리게 되었지만, 그보다 불과 3년 뒤에 출생한 탓에 아직 문화재로 지정을 받지 못한 고택도 있다. 1917년에 건축된 창실고 택이 바로 그 집이다. 창실고택에는 본래 송소 심호택의 집안 동생인 심영택이 살았는데 처음 지었을 당시에는 27칸 가옥이었다.

송소 고택 뒤의 찰방공 종택도 창실 고택과 사정이 비슷하다. 이 고택은 1920년 무렵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창실 고택이 송정 고택보다 세 살 어리듯이 이 고택은 다시 창실 고택보다 세 살 어리다. 그래서 아직 문화재로 지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초전댁은 100세를 넘긴 지 아득하여 진작에 문화재로 등록되었다. 문화재자료 421호인 초전댁은 1806년(순조 6)에 지어졌다.

초전댁
 초전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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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소 고택, 송정 고택, 초전댁, 창실 고택, 찰방공 종택은 모두 택호로 인터넷에서 홈페이지가 검색된다. 따라서 청송 덕천마을에서 민박하려는 나그네는 직접 신청을 하면 된다. 덕천마을은 집집이 전통 민속놀이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므로 자녀들 체험학습에도 좋고, 공기 맑은 깊은 산 속 청송이라 성인들 건강 증진에도 나무랄 데 없이 멋지다. 그래서 그런지 찰방공 종택 홈페이지의 인사말은 아주 소탈하다.

저희 찰방공 종택은 최고급 서비스가 제공되는 호텔도 아닙니다. 최신식 시설들이 번쩍하게 있는 곳도 아닙니다. 하지만 주인아저씨, 아주머니가 함께 챙겨 주는 ​정이 있는 곳이고, 진정 사람 사는 정을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대청마루나 들마루에 누워 바람에 흘러가는 하늘에 구름을 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집니다. 사랑하는 이와 손잡고 밤길을 걷노라면 이름 모를 풀벌레 소리에 웃음이 나오고 하늘을 가득 채운 별들에 놀라게 됩니다. 말이 마음을 다 담지 못할 때 우리는 '그냥'이라는 표현을 쓰지요? '그냥 쉼'을 위해 오세요. 그리고 정말 쉬어보세요.

'그냥' 오세요. '그냥 쉼'을 위해 오세요. 진득한 정이 내밀하게 숨어 있다고 스스로 평하는 말 그대로 경상도 말투다. 상업적 냄새라고는 찾아볼 길이 없다. 그래서 결론을 내린다.

'그래, 그냥 한번 가보자, 덕천마을로!'

찰방공 종택으로 가는 덕천마을의 담길에 정취가 가득하다.
 찰방공 종택으로 가는 덕천마을의 담길에 정취가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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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송소고택, #송정고택, #초전댁, #창실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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