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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회마을에는 일반 차량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입장권을 끊으면 셔틀버스를 탈 수 있다. 셔틀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은 보통 왼쪽 도로를 이용하여 마을로 들어간다. 그러나 왼쪽 아닌, 오른쪽 강변을 걸어보시라. 사진에서 보는 것과 같은 아름다운 숲길...이 나루터를 넘어 기나긴 솔숲까지 이어진다.
 하회마을에는 일반 차량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입장권을 끊으면 셔틀버스를 탈 수 있다. 셔틀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은 보통 왼쪽 도로를 이용하여 마을로 들어간다. 그러나 왼쪽 아닌, 오른쪽 강변을 걸어보시라. 사진에서 보는 것과 같은 아름다운 숲길...이 나루터를 넘어 기나긴 솔숲까지 이어진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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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河回)마을은 강이 마을을 감고 돌아간다. 이미 여러 번 하회마을을 답사했으면서도 그 뜻을 오늘 처음으로, 그리고 진정으로 느꼈다. '알았다'가 아니라 '느꼈다'고 표현하는 까닭은 몇 차례 걸었던 통상적 진입로가 아니라 새 길을 직접 밟은 덕분에 그 느낌을 생생하게 체감했기 때문이다.

세계문화유산인 하회마을은 외곽 주차장에서 차를 멈추어야 한다. 물론 방문객을 위한 셔틀버스는 준비되어 있다. 너무 무덥고 습도도 높아 셔틀버스를 탔다. 그런데 하차를 하는 순간, 하회마을 답사를 마친 사람들이 낯선 길을 이용해 돌아나오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하회마을 답사자들은 한결같이 셔틀버스 정류소에서 왼쪽으로 난 도로로 접어든다. 그런데 오른쪽 길에서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나오는 것이었다. 예전에 왔을 적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을 법한데 그때는 어째서 못 보았을까. 고은의 시처럼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 내려올 때 보았네'인가. 

 하회마을의 옛집들
 하회마을의 옛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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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이 발동했다. 그것이 여행자다운 마음이다. 그 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땅의 길이 본래 물의 길을 따라 생겨난다는 사실이 문득 생각났던 것이다. 사람은 물 위를 걸을 수 없으므로 물길을 따라 걸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강은 국경도 되고 이별의 장소도 되는 것 아닌가.

옛날 영가(永嘉) 사람들도 강을 따라 생긴 이 둑길을 걸었을 것이다. 영가는 안동의 옛날 이름이다. 왜 그런 이름을 얻었는지는 영(永)자가 말해준다. 영은 이(二)와 수(水)가 결합한 글자다. 태백산에서 발원한 낙동강과 영양에서 흘러온 반변천이 합쳐지는 일원에 생겨난 아름다운(嘉) 고장이 바로 영가이다.

 하회마을의 길
 하회마을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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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회'라고 불렀는지 알게 해주는 숲길

영가라는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운 숲이 강변을 따라 이어진다. 어째서 이 마을을 하회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는지 설명을 듣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해주는 자연스러운 숲길이다. 낙동강이 마을 둘레를 휘감아 흐르는 전경을 한 점도 놓치지 않고 모두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길인 까닭이다. 찌는 듯한 무더위와 축축한 습도도 숲의 짙은 그늘 아래에서는 자취도 없다. 시원하다.

이 길이 좋다. 하회마을을 방문할 예정인 분들에게 꼭 소개하고 싶은 길이다. 나룻배를 타고 낙동강을 건너 화천서당과 옥연정사를 구경하시라는 안내판이 소박한 모습으로 강둑 위에 서 있다. 무릇 물가에 왔으면 배를 타거나, 적어도 강물에 손발은 적셔보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오늘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안타깝다.  

 하회마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고택인 북촌댁.
 하회마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고택인 북촌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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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삼삼한 나룻배를 뒤로 하고 하회마을을 바라본다. 역시 마을 안으로 들어서는 첫 출발지로도 이곳이 좋다는 느낌이 일어난다. 통상의 길로 들어서면 마을 안을 모두 둘러본 뒤 늦게야 당도하게 되는 만송정 솔숲이 지금은 바로 오른쪽에 펼쳐져 있는 것도 반갑다. 하회마을은 둘러보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 집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쌓인 피로를 강변의 솔숲에서 어느 정도 풀어버린 후 마을 안으로 들어서는 게 좋다는 말이다.

회회마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살림집인 북촌댁이 제일 먼저 답사자를 맞이한다. 어마어마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솟을대문을 한참 동안 바라보는데 문득 의자 위에 얹힌 홍보물이 눈에 띈다. 하회마을 전체를 말해주는 홍보물인가 싶어 잡아보니 북촌댁만 소개하고 있다. 자신만 단독으로 소개하는 홍보물을 배부할 만큼 북촌댁은 대단한 집이다. 1862년에 창건된 북촌댁은 중요민속자료 84호로 별칭이 "아흔아홉칸 집"일 만큼 지금도 54칸이나 되는 규모를 자랑하는 거택이다.

사랑채 정면에 북촌유거(北村幽居)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북촌에서 한가롭게 산다는 뜻이다. 여기서 북촌은 하회마을 중에서 북쪽에 있는 주거지라는 뜻이다. 하회마을은 동네 복판을 가로지는 길을 중심으로 남촌과 북촌으로 구분된다. 사람들이 그렇게 '"남촌", "북촌"하고 부르게 된 것이 이 현판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국가 지정 보물인 양진당, 하회마을에 대대로 살아온 류씨들의 대종택이다.
 국가 지정 보물인 양진당, 하회마을에 대대로 살아온 류씨들의 대종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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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댁에서 조금 올라서면 류씨 대종택인 양진당이 나타난다. 보물 306호인 양진당은 마을 한복판에 있다. 본래는 류성룡의 6대조인 류종해가 이곳에 들어와 살기 시작할 때 처음 집터로 잡았던 곳으로, 현재 집은 류성룡의 맏형인 류운룡(1539-1601)이 지었다.

양진당에는 사당이 두 채 있다. 한 채는 류운룡을 모시는 사당이고, 다른 한 채는 류성룡 형제의 아버지인 류중영을 모신다. 부자를 한 사당에 모실 수 없는 관계로 류운룡을 별묘로 모시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양진당만큼이나 이름난 고택 한 채가 마을 복판길 건너편에 있다. 하회마을의 남촌을 대표하는 충효당이다. 충효당은 보물 414호로, 류성룡 종가이다. 류성룡이 맏아들이 아니므로 충효당은 소종가인 셈이다. 충효당 건물은 이 소종가 중 사랑채를 가리킨다. 사랑채 뒷마당의 영모각에는 국보 132호인 <징비록>이 보관되어 있다.

 류성룡 고택인 충효당. 양진당과 더불어 역시 국가 지정 보물이다.
 류성룡 고택인 충효당. 양진당과 더불어 역시 국가 지정 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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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이나 소작들이 기거했던 초가들

하회마을에는 초가도 많다. 이 초가들에는 류씨 가문의 하인들이나 소작인들이 기거했다. 거대한 기와집들과 소박한 초가들이 뒤섞인 듯 함께 어우러져 있는 풍경은 좀처럼 보기 힘든 희귀한 모습이다. 고관대작들의 ㅁ자형 와가들은 높은 지점에 커다랗게 자리잡고 있고, 아랫사람들의 초가는 낮은 지대에 초라하게 지어져 있는 것이 보통의 양반 마을 풍경인데 하회마을에는 그런 구분이 없다. 

하회마을에는 놀이도 두 종류가 한데 어우러져 있다. 양반들이 강물에 불꽃을 띄워놓고 배를 타며 즐기는 줄불 선유놀이와 하층민들이 탈을 쓰고 양반을 풍자하는 하회탈놀음, 그렇게 둘이다. 두 강이 하나의 물로 합쳐 마을을 감싸고 돌아흐르는 곳답게, 와가와 초가가 높낮이 구분없이 어울려 자리잡고 있고, 양반놀이와 백성놀이가 한 마을 안에서 유유히 판을 벌인 곳, 그곳이 바로 하회마을이다.

그래서 그런가, 하회마을을 답사하면 마음에 평화가 찾아온다. 오르막도 없고 내리막도 없어 걷는 동안 마음이 흔들릴 일이 없다. 거대한 와가들도 위압감을 주지 않고, 담장들도 흙으로 쌓여 있어 자연의 빛깔 그대로다. 강을 건너는 나룻배도 천박한 유람선이 아니라 말 그대로 나룻배다. 언덕 위에 서서, 누군가를 실은 나룻배가 물길 위를 천천히 떠 가는 풍경을 부러운 기분으로 바라본다. 살랑살랑 바람이 분다.

 나룻배 이용 안내.
 나룻배 이용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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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소설 의열단><소설 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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