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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지마 게이자부로 님이 빚은 그림책 <북쪽 나라 여우 이야기>(보림,2006)를 가만히 읽습니다. 온통 새하얗게 눈밭이 된 곳에서 뛰노는 여우 한 마리가 나오는 그림책을 차분히 넘깁니다.

여우 한 마리는 너른 들을 달리고, 깊은 숲을 가로지릅니다. 여우 한 마리는 홀로 눈밭을 밟습니다. 여우 한 마리는 한겨울에 눈토끼를 보고는 잡아먹으려고 달립니다. 그런데 눈토끼 한 마리가 하얀 숲에서 어디론가 사라집니다.

 겉그림
 겉그림
ⓒ 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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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는 토끼가 사라진 곳을 멍하니 쳐다봅니다. 감쪽같이 사라진 토끼를 찾아내지 못하는 여우는 문득 숲노래를 듣고, 숲바람을 쐽니다. 배고프다는 생각을 잊고, 토끼를 좇던 생각을 잊은 채, 하염없이 숲을 바라보면서 노래와 바람을 맞아들입니다.

여우는 배가 고픕니다. 긴 겨울털도 소용없이, 얼어붙을 듯 춥고 추운 밤입니다. (9쪽)

사람들은 전시장을 찾고 박물관을 찾아갑니다. 사람들은 예술을 빚고 누리고 즐깁니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숲을 그림으로 담거나 사진으로 찍거나 글로 옮깁니다. 사람들은 사랑스러운 바다와 하늘을 노래로 빚고 춤으로 나타냅니다.

여우는 무엇을 할까요? 여우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하나요? 여우는 겨울숲을 그저 가만히 바라봅니다. 여우는 겨울숲에 어리는 이야기를 찬찬히 바라보면서 옛생각에 잠깁니다. 여우는 드넓은 숲하고 들이 바람결을 따라서 들려주는 노랫소리를 고즈넉하게 듣습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 사회에는 전시장이나 박물관은 늘어나도, 숲이나 들은 늘어나지 않습니다. 오늘날 문명에서는 쇼핑센터와 지하상가와 높은 건물은 늘어나도, 빽빽하게 나무가 우거지지 못하고 우람하게 나무가 자라지 못합니다.

<북쪽 나라 여우 이야기>는 겨울에 더욱 추운 북쪽 나라에서 사는 여우를 보여줍니다. 온통 눈밭인 곳에서, 사람이 하나도 없고, 작은 마을이 하나조차 없는 들녘에서 숲노래와 바람노래와 겨울노래를 듣는 여우를 보여줍니다.

언덕으로 쫓아 올라온 여우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숨을 멈춥니다. 어쩌면 이렇게 신비로운 세상이 다 있을까요! (19쪽)

 눈토끼가 하늘을 깡총 날면서 사라지려 합니다.
 눈토끼가 하늘을 깡총 날면서 사라지려 합니다.
ⓒ 보림/데지마 게이자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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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여우는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여우가 살기에 알맞지 않으니, 여우는 모조리 사라졌습니다. 한국에서 늑대도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늑대가 살기에 걸맞지 않으니, 늑대는 몽땅 사라졌습니다.

한국에서 사라지는 들짐승이 매우 많습니다. 한국에서 사라지는 숲새도 무척 많습니다. 한국에서 사라지는 딱정벌레도 대단히 많을 텐데, 어떤 딱정벌레가 언제 사라지는지를 깨닫는 사람은 드물리라 느껴요. 그야말로 흔하디흔하던 흰민들레도 한국에서 아주 빠르게 사라져요.

차갑게, 차갑게 반짝이고, 바람마저 얼어붙는 듯합니다. 여우가 몸을 부르르 떱니다. 바로 그때, 엄마 여우와 아기 여우들 모습이 숲 가운데에 떠오릅니다. 여우는 상냥하던 엄마를 생각합니다. (25∼27쪽)

들이나 숲에서 들짐승하고 숲새가 느긋하거나 넉넉하게 살기 어렵다면, 이 나라에서 사람은 얼마나 느긋하거나 넉넉하게 살 만할까요? 들에서 들짐승이 먹이를 찾기 어렵고, 숲에서 숲새가 먹이를 얻기 어렵다면, 이 나라에서 사람은 얼마나 즐겁거나 아름답게 살 만할까요?

여우나 늑대 울음소리가 사라진 숲이나 들은 괴괴합니다. 온갖 새가 저마다 고운 목소리로 노래하는 숲이나 들이 없는 곳은 메마르거나 차갑습니다. 들짐승 울음소리는 사라지고, 공사하는 소리가 우렁찹니다. 숲새가 들려주던 노랫소리는 잦아들고, 자동차가 고속도로를 달리는 소리가 매섭습니다.

 여우는 너른 숲에 서서 겨울숲이 들려주는 노래와 춤을 마주합니다.
 여우는 너른 숲에 서서 겨울숲이 들려주는 노래와 춤을 마주합니다.
ⓒ 보림/데지마 게이자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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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왔습니다. 바람은 가없이 맑고, 먼 산까지 또렷하게 보입니다. 저기 벌판에서 무언가 움직입니다. 여우가 뚫어지게 바라봅니다. 다른 여우입니다. (37∼38쪽)

사라진 들짐승이 다시 나타나기는 어렵습니다. 휴전선이라는 쇠가시그물이 없다면, 한국에서 북녘에 있을 여우가 남녘으로도 자리를 옮길 수 있을 테지만, 북녘도 남녘도 이제는 그리 사랑스러운 숲이나 들은 못 된다고 느낍니다. 도시는 자꾸 커지고, 새로운 도시는 자꾸 생기지만, 호젓한 시골이나 짙푸른 숲은 좀처럼 늘어나지 못합니다. 조용하거나 정갈하던 숲에 온갖 송전탑이랑 고속도로가 자꾸 들어설 뿐입니다.

앞으로 이 나라 아이들은 그림책이나 '외국 사진책'에서만, 또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에서만 여우를 만나야 합니다. 여우가 들려주는 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고, 여우하고 얽힌 이야기를 새로 지을 수 없으며, 여우가 깃들 만한 너른 숲을 마음껏 누비면서 숲노래를 듣기도 어렵습니다.

들짐승 여우가 모두 사라진 나라에는 어떤 아름다움이 있을까요. 들짐승이 아주 빠르게 사라지거나 줄어드는 나라에는 어떤 사랑스러움이 있을까요. 그림책 <북쪽 나라 여우 이야기>가 '그림책 이야기'를 넘어서 '우리 삶'이 될 수 있는 날은 다시 찾아올 수 있을까요.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글쓴이 누리사랑방(http://blog.aladin.co.kr/hbooks)에도 함께 올립니다.

책이름 : 북쪽 나라 여우 이야기
데지마 게이자부로 글·그림
정숙경 옮김
보림 펴냄, 20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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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말사전 편집자로 일하면서, 전남 고흥에서 <사전 짓는 책숲집 '숲노래'>를 꾸립니다.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읽는 우리말 사전》《골목빛》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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