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일본은 '국가 총동원법'을 시행했다. 중일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원활한 전쟁 수행을 위해 한반도 내에서 노동력과 물자 등을 수탈해 전쟁에 동원하고자 했고, 이는 결국 조선인에 대한 강제 징용, 징병으로까지 이어졌다.

이 법률의 첫 번째 조항은 이러했다.

'국가총동원이란 전시(전시에 준할 경우도 포함)에 국방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국가의 전력을 가장 유효하게 발휘하도록 인적 및 물적 자원을 운용하는 것을 말한다.'

 교장(엄지원)은 친절하지만 어딘가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는 인물이다.

교장(엄지원)은 친절하지만 어딘가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는 인물이다. ⓒ 청년필름㈜


18일 개봉한 영화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아래 <경성학교>)의 시대적 배경 또한(구체적이게도) 1938년이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대한민국 근대사에 있어서의 국가적 아픔을 다루는가 하면 딱히 그렇지도 않고, 일제 치하의 조선이라는 배경은 그저 영화 특유의 음울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장치로 기능할 따름이다.

<경성학교>는 경성 근방에 있는 가상의 여성 기숙학교를 무대로 한다. 폐병 환자인 주란(박보영 분)은 자신을 두고 도쿄로 떠난 부모에 의해 홀로 경성학교에 입학하는데, 그 곳에서 연덕(박소담 분), 유카(공예지 분), 키히라(주보비 분) 등 각자 병을 지닌 소녀들을 만나 함께 생활하게 된다.

극중 등장하는 '요양학교'라는 표현에 걸맞게, 경성학교는 요양원과 기숙학교가 뒤섞인 꽤나 그로테스크한 공간으로 그려진다. 교장(엄지원 분)은 학생들에게 약을 처방하고 식단을 철저히 관리하는 등 거의 주치의로서의 역할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체력이 우수한 학생을 선발해 도쿄로 유학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한다.

또한 생활교사(박성연 분)는 교칙을 엄격히 적용하며 '지도'라는 미명 하에 가차없이 학생들의 뺨을 때린다. 친절하고 차분한 모습 사이로 내내 엿보이는 두 교사의 냉정한 태도는 영화 초반부 경성학교라는 공간이 주는 긴장을 극대화하면서 관객들의 잠재적 공포감을 조장하기에 충분하다.

 경성학교 소녀들의 생활은 모든 면에서 엄격하게 통제된다.

경성학교 소녀들의 생활은 모든 면에서 엄격하게 통제된다. ⓒ 청년필름㈜


각자 무언가(누군가)로부터 버림받은 소녀들의 고독과 절망은, 깊은 숲속에 자리한 경성학교가 갖는 폐쇄성과 더불어 '유리'라는 모티브를 통해서도 심심찮게 보여진다. 주란의 갈등 과정에서는 종종 유리가 깨어지고, 날카로운 유리조각에 베여 상처가 나기도 한다.

하얀 팔에서 흐르는 빨간 피의 대비나, 고요 속에서 부서진 유리조각을 밟을 때 들리는 사운드들은 이상하게도 아프다기보다 차라리 슬프다. 달리 갈 곳도 사랑해줄 이도 없는 비극적 운명을 가진, 그래서 서로뿐인 경성학교의 소녀들은 투명하고 단단하지만 그만큼 쉽게도 깨져버린다. 결국 <경성학교>가 그리는 소녀들은 '유리'다.

초반부 효과적으로 표현된 미스터리의 장르적 서스펜션이 중반 이후 조금씩 무너지는 부분은 다소 아쉽다. 영화가 주는 긴장감의 원천인 '사라진 소녀들'을 추적하는 주란 앞에 놓이는 극 중반의 단서들은 기존의 미스터리 작품들에 비하면 과하게 '결정적'이다.

결국 관객에게 있어 이후 이야기에 대한 경우의 수는 급격히 좁아질 수밖에 없는데, 이를 통해 혼란과 반전의 가능성은 제거되고 영화는 맥없이 스스로의 스포일러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그런 의미에서, 공포와 더불어 뒷통수를 후려지는 반전을 기대하는 스릴러 장르 팬들에게 있어서 <경성학교>는 아쉬울 수밖에 없다.

조선인 교사와 학생들이 일본 이름으로 불리고 일본어를 사용하며, 심지어 총을 든 일본군이 등장함에도 <경성학교>에 시대적 특수성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이 영화는 애초부터 미스터리 장르로 만들어진 데다, 극 중의 갈등 대부분이 인물 개개인의 내면에서 점화되어 한정된 범위의 사적 관계로만 발현되기 때문이다.

소녀들에게 있어 '도쿄'로 대변되는 학교 밖의 세상은 '한번도 본 적 없는 바다'처럼 다분히 추상적이고, 그 안에 시대정신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우리가 <경성학교>를 대함에 있어, 주인공 주란의 시선을 가만히 좇는 것 외에 다른 방식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영화를 보는 동안은, 앞에 얘기한 1938년의 역사를 잠시 잊어도 좋다. 한 사람의 아픔을 공감한다는 것은, 그가 존재하는 세계의 아픔을 공감하는 것이기도 하니까.

덧붙이는 글 이 글은 네이버 블로그 및 Vingle 에도 게제되었습니다.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 박보영 경성학교 엄지원 영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모든 것에 의미를 담습니다. 그 의미가 당신에게 가 닿기를.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