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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유가족', 작년 4월 말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에 의해 나온 이 말은 정부가 세월호 유족들을 보는 시선을 응축하고 있다. 이 시기 세월호 유족들은 정부의 구조 시스템 부재를 언급하며 정부에 한창 책임을 돌리고 있었는데, 정부는 유가족의 순수성을 문제 삼으며 피해자들을 공격했다.

새누리당 한기호 의원의 '종북 숙주' 발언, 같은 당 권은희 의원의 '유족 행세 외부인이 있다'는 발언 역시 같은 맥락이다. 이런 기조는 이후에도 계속된다.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세월호특별법엔 '순수한 유가족'의 마음이 담겨야 한다고 했고, 조금이라도 세월호의 정부 대처를 문제 삼는 의견이 제기되면 순수성을 내세워 틀어막았다. 영화 <다이빙벨>의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을 막으려 시도한 게 대표적이다. 세월호 참사 1년이 지나도록 피해자들을 보는 정부의 왜곡된 시선은 변하지 않았다.

한국은 사건사고 피해자가 갖춰야 할 덕목을 많이 강조한다. 이를테면 피해자는 최대한 동정심을 유발하는 표정을 지으며 약한 이미지를 보여야 하고, 배보상 결과에 승복해야만 한다. 천안함 유족들이 흔히 모범적 예로 거론되는 이유는 조용히 슬픔을 감내했고, 국가의 대처에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씨랜드, 대구지하철 참사 등의 유족들 역시 사건 당시엔 적극적으로 정부에 따지지 않았다. 반면 세월호 유족들이 참사 1년이 지나도록 진상규명을 외치며 국가를 비판하자 유족들에 대한 반감이 일각에서 매우 커졌다. 암묵적으로 피해자에게 요구되어 온 '미덕'을 지키지 않은 탓이다. 정부 역시 이전과는 달리 유족들이 적극적으로 진상규명을 외치자, 유족들에게 순수성과 미덕의 잣대를 들이댔다. 그런 잣대로 '가만히 있으라'고 압박했다.

미덕을 따지는 건 중요하지 않다. 정말 필요한 건 유족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다. 제대로 된 보상을 하고, 치료 프로그램을 제공하여 유족들이 후유증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야 한다. 사건 12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대구지하철 참사 유족들과 같은 사람들이 다시 나오게 해선 안 된다. 그러나 국가는 이번에도 같은 실책을 저지르고 있다. 적당한 보상으로 마무리한 뒤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대구지하철 참사 유족에 대해 국가는 얼마간의 금전적 보상만 했을 뿐, 체계적인 상담 프로그램 같은 것들은 거의 제공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이들의 눈에선 아직도 눈물이 흐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유족이 충분한 보상을 위해 이것저것 요구하는 건 당연하다. 자칫 피해자의 미덕을 지키다가 정부가 유야무야 넘긴다면 결국 상처는 또 다시 유족들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부는 미덕을 강요하지 말고, 유족들의 상처를 직시해야 한다. 지금껏 정부는 대형 재난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을 피하면서 피해자에겐 약소한 보상을 하는 데 그쳤다. 이제 이러한 관행을 타파할 때가 됐다.

그래도 우리 사회에 피해자가 목소리를 낼 권리에 대한 의식이 갖춰지고 있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유족들의 손을 잡고 진상규명을 위해 함께 연대하고 추모한다. 지난 4월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 설문조사 결과 세월호 인양 찬성 비율이 65.8%에 달한 것은, 그만큼 인양을 통해 진상규명이 더 필요하다는 유족들의 의견이 많은 호의를 얻고 있단 의미다.

불행히도 정부가 피해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당장 달라질 것 같진 않다. 세월호 특위에 파견공무원을 대거 투입해 원활한 진상규명을 방해하는 모습을 보면 그렇다. 늘 그래왔듯 적당히 무마하려는 것 같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이미 피해자의 권리에 대한 자각이 생긴 여론을 상대로 더 이상 '극복하자'고 마냥 주장하긴 어려워 보인다. 이젠 정말 사건사고를 대하는 정부의 태도가 달라질 차례다. '가만히 있으라'고 더 이상 압박해선 안 된다.


태그:#세월호, #유가족, #순수, #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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