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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메리카 대륙의 남쪽 끝, '바람의 땅' 파타고니아에는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죽기 전에 꼭 한 번 가봐야 할 10대 낙원'으로 꼽은 '토레스 델 파이네'가 있습니다. 이곳은 세계 3대 트레일 가운데 하나로도 꼽히죠. 또한 남미 최고봉 아콩카구아는 잘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여행지였습니다. 이 두 곳이 내가 남미 여행을 떠난 이유였죠. 잊을 수 없는 남미 여행기를 연재합니다. - 기자 말

2박 3일 일정의 피츠로이 트레킹

"아침 햇살에 붉게 달아오른 피츠로이는 용광로 안에 달궈진 쇳덩어리를 연상시킨다."

세계 5대 미봉 '피츠로이'(Fitz Roy)를 두고 어느 트레커가 한 말이다. 이 모습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칼라팔테에서 피츠로이를 찾아 '엘 찬텐'(el Chanten)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넉넉잡아 3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엘 찬텐이 있었다. 왕복 버스 비용은 185페소.

대지 위에 곧게 뻗은 도로 한 줄. 도로는 대지의 굴곡에 맞게 허리를 굽혔다 폈다를 반복했다. 키 작은 수목이 파타고니아의 바람 앞에 한껏 몸을 낮췄다. 도로를 자유롭게 가로지르는 묵직한 바람에 버스가 요동쳤다. 드넓은 초원은 자유의 표상처럼 정처 없는 흐름으로 모든 걸 포용해 냈다. 저공 비행하던 바람이 모래를 일으키는 것만으로 가슴이 뛰었다. 버스에 의지한 채 이 길을 달리고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신발 끈을 조여 매고 살아 숨 쉬는 파타고니아의 숨결을 또박또박 느껴보고 싶다.

여행은 일상과 하나 될 때 본질을 드러낸다. 가슴팍 높이 파티션(칸막이) 아래 삶은 자유와 여행 그리고 그 안에서 나를 다시 보게 해주었다. 이 여행의 끝이 어디로 향할지 알 수 없었지만, 계획 없는 듯한 내 발걸음은 분명 자유를 향한 열망이고, 삶에 대한 애착의 표현이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장면 하나하나가 낯설고 새롭다. 뺨을 어루만지는 서늘한 공기의 움직임조차 내겐 익숙한 과거의 것이 아니었다. 술에 취하지도 않았고, 마약에 손대지도 않았다. 흐리멍덩한 초점 없는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싶지 않았다. 단지 여행을 여행답게 목격하고 싶었다. 내 굳어버린 머릿속 도식들이 하나씩 깨져 나가며 그 파편이 다른 도식을 만들며 날 깨우쳐주길 바랐다. 그러기에 파타고니아는 내게 더 없이 이상적 장소였다. 멀리 피츠로이가 눈에 들어왔다. 3시간의 버스 여행이 끝을 향해 달렸다.

피츠로이
 피츠로이
ⓒ 김동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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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찬텐 일정은 2박 3일의 백패킹 코스로 계획했다. 첫날, 둘째 날은 각각 '세로 토레'(Cerro Torre)와 피츠로이 밑에서 야영하고, 마지막 날은 일출을 감상할 계획이었다. 야영이 부담스러운 여행자는 이틀에 걸쳐 세로 토레와 피츠로이를 다녀온다. 시간 여유가 없을 땐 피츠로이만 보고 오는 사람도 많다.

아기자기한 장난감 같은 산골 마을 엘 찬텐은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주인공 마리아 선생님이 꽃바구니를 들고 노래를 부르고 있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폐 깊숙한 곳에서 더운 공기를 밀어내 신선한 엘 찬텐 공기를 채워 넣었다.

엘찬텐
 엘찬텐
ⓒ 김동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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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도보여행엔 후지 여관에서 만난 한의사 선생님이 동행했다. 그녀는 한의원을 접고 결혼 전 마지막으로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었다. 쾌활한 성격의 그녀는 결혼 전 진짜 나만을 위한 시간 속에서 행복해했다.

세상을 향한 호기심과 여행의 목마름은 강한 동질감을 느끼게 했다. 그녀와의 대화 속에서 난 나를 보았다. 특히 그녀가 풀어낸 10년의 순애보는 엘 찬텐 만큼 동화 같은 이야기였다.

엘찬텐
 엘찬텐
ⓒ 김동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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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 선생님과 피자가게를 찾았다. 왕복 4시간쯤 걸리는 코스였기 때문에 배를 채워야 했다. 식사 주문 뒤, 여유를 놓치지 않고 손목을 내밀었다. 진맥을 해보고 싶었다. 만성 건강염려증을 달고 살아온 내게 한의사 선생님과의 오붓한 시간은 소녀시대와의 데이트보다도 소중한 기회였다. 무지막지한 여행이 내 몸에 어떤 후유증을 남겼을지 모를 일이었다.

조금만 몸이 안 좋으면 병원에 드러눕길 좋아하는 내게 이런 극적인 만남도 없었다. 진맥은 역시 족집게였다. 그간 내 병력이 고스란히 그녀의 입을 통해 열거됐다. 그 사이 한국에서 먹던 피자보다 모차렐라 치즈가 대략 2배 이상 뿌려진 걸쭉한 피자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엘찬텐
 엘찬텐
ⓒ 김동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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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로이에서 만난 화타

등산로 입구는 마을 뒤편으로 나 있었다. 시작부터 언덕이 나왔다. 백패킹 장비가 든 묵직한 배낭을 메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선생님, 잠깐만요. 좀 천천히 가요. 배가…."

앞서 가던 선생님을 불러 세웠다. 밥을 먹고 곧바로 트레킹을 해서 그런지 오른쪽 아랫배가 아팠다. 다행히 하얀 휴지를 나풀대며 숲으로 뛰어들어가야 할 복통은 아니었다.

그녀는 내 손 어디쯤을 꾹꾹 눌렀다. 혈 자리를 정확히 찾아 적당한 세기로 눌러 주니 금세 통증이 멈췄다. 신비로운 동양의학을 남미 산골 마을에서 체험할 줄이야! 화타의 현신이 내 앞에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트레킹 경험이 많은 내가 그녀에게 전혀 도움이 되는 상황이 아니었다. 난 심적으로 그녀를 전적으로 의지했다. 산에서 여자가 이렇게 든든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피츠로이 트레킹
 피츠로이 트레킹
ⓒ 김동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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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로 토레로 가는 길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가파르지 않은 언덕을 가볍게 넘자, 그림 같은 길이 산속으로 길게 이어진다. 정말 저질 중에서도 저질 체력이 아니라면 누구나 도전해 볼 수 있는 코스였다. 길은 잘 정비돼 있었고, 낯선 산세는 걷는 재미를 더 했다. 그러다 첫 번째 미라도르를 만났다. 멀리 설산 밑으로 봄의 따스함이 차오르고 있었다.

트레커들은 이곳에서 숨을 돌리며 카메라로 산세를 담았다. 한 시간 남짓이면 마지막 미라도르에 닿을 수 있었다. 서두를 필요 없는, 여유 있는 걷기가 계속됐다. 마지막 미라도르 근처엔 무료 캠핑장이 있었다.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내일 피츠로이 아래 캠핑장으로 이동하면 깔끔하게 엘 찬텐 트레킹이 마무리된다.

피츠로이 트레킹
 피츠로이 트레킹
ⓒ 김동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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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길을 나섰다. 들꽃이 빠끔히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 오솔길을 거닐다 빙하가 내려오는 작은 냇가를 건넜다. 푸른 입이 돋기 시작한 나무들 사이로 촉촉하게 이슬이 맺힌 싱그러운 하루였다.

마지막 경사를 올라 사람들이 호숫가에서 세로 토레를 감상하고 있는 마라도르에 도착했다.

'슈~우~우~웅~ 슈~우~우~앙~'

태풍을 몰고 다닐 것 같은 우악스러운 바람이 사정없이 밀어닥쳤다. 몸이 몇 발짝 뒤로 밀렸다. 그대로 등을 돌렸다. 바람은 순식간에 체온을 빼앗아 달아났다. 고어텍스 재킷을 꺼내는 사이 바닥에 내려놓은 카메라가 바람에 나뒹굴었다.

"이런 된장! 으흑~"

피츠로이 트레킹
 피츠로이 트레킹
ⓒ 김동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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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회색빛으로 변해있었다. 또렷하게 보여야 할 세로 토레는 자취를 감추었다. 보이는 거라곤 바람이 일으킨 거친 물결뿐이었다. 날씨 탓에 트레커 대부분이 서둘러 발길을 돌렸다. 오래 있을 이유가 없었다. 캠핑장으로 내려와 서둘러 텐트를 쳤다.

"진짜 야영하시게요? 날씨가 이렇게 안 좋은데…."

든든하게 내 곁을 지켜주던 그녀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말했다.

"죽기야 하겠어요. 일단 이렇게 된 거 오늘 하루 여기서 기다려 보고 내일 아침 상황을 보려고요."

마초적 결정을 자위하기라도 하듯 자신 있게 대답했지만, 캠핑장에서 백패킹하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주변은 고요했고, 산속에서 혼자 밤을 보낸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다.

피츠로이 트레킹
 피츠로이 트레킹
ⓒ 김동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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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혼자 하산 괜찮겠어요?"
"그럼요. 길도 쉬운 걸요."


내 두려움을 들키지 않으려고 난 그녀의 하산을 걱정했다. 그녀는 이런 내 속을 훤히 보고 있는 듯 해맑게 웃었다. 추위가 몰려왔다. 버너에 불을 붙이고 혼자 하산해야 하는 그녀를 위해 차를 끓였다. 온기에 몸이 녹기 시작했다. 그녀는 따뜻한 차를 마시고, 곧장 길을 나섰다.

산은 홀로 남겨진 내게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따금 산새가 먹이를 찾아 텐트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슬라이스 햄, 과일, 빵 그리고 '페르넷'(Fernet Branco : 활명수 같은 민트향이 강한 술로, 실제로 소화 작용에 도움을 줘 식후에 마시기도 한다. 아르헨티나에서 맥주 다음으로 많이 즐긴 술로 주로 콜라와 섞어 마신다. 페르넷콕은 중독성이 강해 몇 번 맛보면 이상하게 이 술을 계속 찾게 된다 - 기자말) 한 병을 꺼내 저녁을 해 먹곤 그대로 피톤치드 가득한 숲 속의 이른 밤을 숙면으로 즐겼다.

빗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시계를 보니 14시간이나 꿈나라 여행을 하고 돌아와 있었다. 이렇게 숲에서 무작정 잠을 잘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오랜 여행이 내게 노숙자 DNA를 이식한 듯했다. 텐트 문을 열고 날씨를 점검해 보니 비가 오고 있었다. 밤사이 제법 비가 내린 모양이었다. 날이 쉽게 좋아질 것 같지 않았다. 설렁설렁 하산을 시작했다. 숙소를 잡자, 어제 헤어진 화타의 현신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날씨가 좋지 않아 걱정돼 연락을 해보았다는 그녀는 같이 점심을 먹자고 했다.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많이 마신 맥주 낄메스(왼쪽).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많이 마신 맥주 낄메스(왼쪽).
ⓒ 김동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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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곤 밥 대신 맥주를 '벌컥벌컥'. 맥주 3병이 짧은 시간에 공병으로 변했다. 취기가 올랐다. 그녀는 한 병을 더하자고 했다.

"아니, 무슨 의사 선생님이 술을 이리 드세요?"
"이 정도는 약하게 먹는 거죠. 폭탄주 있으면 좋은데… 쩝, 쩝. 한 병 더 마시죠(웃음)."
"헐~"
"첨에 마신 킬메스가 젤 맛나네요. 그걸로 마실까요?"


사실 이 날은 여행 중 맞는 생일이었다. 안주도 없이 큰병 맥주 4병으로 생일을 맞는 기분이란….

"어머! 오늘 생일이세요? 이런, 술은 제가 쏠게요. 히히~ 세뇰~ 킬메스 뽀르빠보르~"

[깨알 정보]
텐트와 트레킹 폴로 잘 알려진 미국 아웃도어 회사 블랙다이아몬드. 피츠로이란 이름을 처음 접한 게 바로 이 회사 텐트에서다. 피츠로이는 흔히 세계 5대 미봉으로 꼽힌다. 그런데 세계 5대 미봉이라고 하니 다른 4개가 궁금해 인터넷을 뒤적거렸다. 유네스코 선정 세계 5대 미봉은 아래와 같다.
1. 안데스-알파 마요
2. 히말라야-마차푸차레
3. 알프스-마터호른
4. 알프스-그랑드조라스
5. 파타고니아-피츠로이
그런데 인터넷에 떠다니는 세계 3대 미봉은 아래와 같다.
1. 히말라야-마차푸차레
2. 알프스-마터호른
3. 히말라야-아마다블람
5대 미봉에 3대 미봉이 들어 있어야 하는 게 상식일 텐데… 뭔가 석연치 않았다. 무슨 기준인지도 모르겠고, 5대 미봉과 3대 미봉을 선정한 기관도 다른 것 같고. 참고로 세계 3대 협곡 트레킹 중 하나란 중국 호도협은 아무리 자료를 찾아봐도 어디서 이런 이야기를 만들었는지 출처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아주 신빙성 있는 자료를 발견하는데, 요는 이렇다. 3대, 5대 이런 선정기관 대부분이 '여행사'란 사실!
부디 이런 이야기에 큰 의미를 두지 말길… 여행상품을 포장하기 위한 얄팍한 상술에 현혹돼 진짜를 놓칠지 모른다.

[에필로그] 세계 일주 중 만난 일본인 이야기

여행 중 일본인을 만나면 가끔 열등감을 느낄 때가 있었다. 가만히 이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일본이 여행 분야에서 막대한 정보와 경험을 축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순히 기계적 정보의 나열과 축적량을 떠나 의식 차이도 존재했다. 분명한 건 한국보다 일본 배낭여행 역사가 20년 이상 앞서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내가 하고 싶은 걸 이미 다 해보고 위에서 날 내려다보는 듯했다. 내가 만난 모든 일본인이 이런 느낌과 깊은 내공을 소유한 건 아니었지만, 한국인에게 발견하지 못한 것을 그들에게서 읽어낼 수 있었다. 난 그들 앞에서 작아졌고, 그들이 여행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얻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일본인 이야기는 세계 일주 1막으로 거슬러 올라가 가까운 파타고니아 여행까지 이어진다.

중국 샹그릴라 여행 때 만난 일본인 히로상. 그녀는 나보다 나이가 몇 살 어렸지만 2년간의 세계 일주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첫 만남은 이랬다. 샹그릴라 게스트하우스 자희랑에 머물 때였다. 현정이가 히로상과 저녁을 먹는다며 숙소를 나서려던 참이었다.

샹그릴라는 기온이 많이 내려가 있었고, 현정이는 티셔츠 차림이었다. 난 입고 있던 패딩을 벗어주었다. 현정이는 옷을 받아 들고 나갔다. 그리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히로는 걱정스럽게 현정이를 보고 "옷을 빌려주고 나중에 돈을 달라고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난 한참을 웃었다.

히로상은 남미를 6개월 정도 여행했다. 그녀가 거쳐 간 수많은 여행지 중 베네수엘라 '로라이마'(Roraima)는 내가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히로상에게 로라이마에 관해 물었던 적이 있다. 그녀는 정보를 찾아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남미를 여행할 때쯤 메일이 날아왔다. 내용은 로라이마 정보로 빼곡했다.

'내가 히로상처럼 길에서 만난 사람에게 이렇게 도움을 준 적이 있나?'

'내가 저들만큼 여행에 집착한 적이 있었나?'

하라상
 하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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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신장위구르 카스를 여행할 때였다. 숙소에 머무는 여행자 중 8년간 자전거 세계 여행을 하고 있는 태국 아저씨는 단연 독보적 존재였다. 군살 없는 몸매, 구릿빛 피부, 덥수룩한 수염 그리고 느릿한 걸음은 긴 여정을 소리 없이 말해주었다. 당시만 해도 삶이 여행이 된 생활 여행자와 '통'(通)한다는 건 내게 어려운 주제였다. 자연스레 나와 같은 처지, 나와 같은 이유로 여행하고 있는 사람과 마음을 나누는 게 편했다.

이 숙소에서 만난 일본인 하라상은 환갑을 넘긴 나이에 1년간 여행을 계획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나라로 중국을 여행하고 있었다. 오사카에 사는 하라상은 초등학교 선생님을 하다 정년퇴임을 했다. 남편과는 사별했고, 두 딸이 있는데 한 명은 결혼했고 한 명은 싱글이라고 했다. 내 나이를 묻고는 "왜 결혼하지 않았느냐?"며 노총각이라고 놀리던 그녀였다. 또 내 여행 계획을 듣고선 "스고이!"를 연발했다.

하라상의 걸음걸이는 꼭 봉달이를 닮아 손대면 '픽'하고 쓰러질 것만 같았다. 옷도 바랜 것이 전부였다. 카메라는 10년은 더 돼 보였고, 배낭은 기능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낡은 것이었다. 저 힘없고 가냘파 보이는 몸 어디에서 저런 여행 에너지가 나오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하라상은 흰 쌀밥이 정말 먹고 싶다고 했다.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음식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하라상과 내 눈빛은 사막의 태양처럼 이글거렸다. 우린 영어·한국어·일어를 총동원해 이야기를 이어갔다. 한 서양인 여행자가 우리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짤막한 3개 국어 사용보단 우리의 상기된 얼굴이 더욱 신기했을지 몰랐다.

하라상을 위해 우루무치 마트에서 산 라면을 끓였다. 물이 뽀글뽀글 끓자 하라상은 어디서 구했는지 마늘 한 쪽을 가져왔다. 하라상은 조금 맵지만 그래도 맛있다며 국물까지 한 컵 따라 마셨다. 흡족한 표정이었다.

라면을 먹은 하라상은 숙소를 나섰다. 그리곤 저녁이 다 돼서야 돌아왔다. 얼굴에선 종일 태양에 그을린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그녀는 걸어서 무슬림 무덤을 보고 왔다고 했다. 난 바나나 한 개를 챙겨 하라상에게 건넸다.

'나도 환갑을 넘긴 나이에 저런 여행을 할 수 있을까?'

여행을 하고 돌아와 여행 프로그램 기피증이 생겼다. 새장에 갇힌 새가 바깥세상을 그리워한다는 뜻의 '농조연운'(籠鳥戀雲)이란 사자성어가 딱 내 처지였다. 들끓는 감정을 자제할 필요가 있었다.

어느 날 무심코 리모컨을 돌리다 이집트 다합의 익숙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의식적으로 다른 채널을 돌리려고 할 때였다.

"어~ 어~ 저 커플 아직도 저기 있나?"

화면 속에는 내가 다합을 여행할 때 만난 일본인 커플이 길거리에서 팔찌 등의 액세서리를 만들고 있었다. 그들은 아주 천천히 세상을 여행 중이었다. 가다 돈이 없으면 액세서리를 만들어 팔았다. 10원짜리 하나까지 신경 쓰며 아끼고 아꼈다. 그래야만 여행이 곧 삶이 될 수 있으니까.

'내가 저들만큼 여행에 집착한 적이 있었나?'

아케미상(오른쪽)과 이지상.
 아케미상(오른쪽)과 이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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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파테 후지 여관에서 만난 일본인 아케미상과 이지상. 끝까지 나이를 밝히길 거부한 아케미상은 후지 여관 매니저로 일하던 중이었다. 그리고 매니저를 그만두고 다시 여행을 시작한다고 했다. 이 때문에 후지 여관 사모님이 나를 매니저 자리에 앉히려고 한 거였다.

아케미상은 어림짐작으로 60대 정도 되는 얼굴이었다. 후지 여관 매니저로 일하면서 한국어를 독학으로 배우고 있었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외운 단어가 자꾸만 기억나지 않는다는 그녀였지만 언제나 한국어책을 끼고 살았다.

반면 이지상은 화가였다. 파타고니아가 좋아 벌써 몇 번째 이곳을 방문한 건지 모르겠다는 그였다. 파타고니아를 캔버스에 담다 여비가 떨어지면 일본에 돌아가 돈을 벌어 다시 여행을 시작했다. 이지상은 파타고니아가 그림을 그리고 싶게 만든다고 했다.

엘 찬텐에서 헤어진 아케미상과 이지상은 '아우스트랄 로드'(Austral Road)로 떠났다. 현지에서 안 사실이지만 아우스트랄 로드는 유럽인이나 일본인 사이에서 유명한 여행지였다.

나에게 이런 루트는 남미를 공부하면서 금시초문이었다. 그들의 계획은 엘 찬텐에서 버스를 타고 '라고데시에토 호수'까지 가서, 배를 이용해 칠레 국경을 넘어, 23km의 산길을 걷는 여정이었다. 미려한 길 자체는 새로운 걸 찾는 여행자라면 한 번쯤 꼭 걸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했다.

'내가 저들처럼 새로움을 찾아 도전하고 미치도록 그리워한 게 있던 걸까?'

[깨알 정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가기 위해 칼라파테 공항으로 갔다. 그리고 내가 예약한 '라데'(Lade)항공편이 취소되는 돌발 상황이 발생한다.

잠시 뒤 '전화위복'이란 사자성어가 딱 맞아떨어지는 대반전이 내 앞에 펼쳐졌다. 라데항공 대신 칼라파테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직항으로 운항하는 아르헨티나항공을 태워 주겠다는 것.

한 달간의 파타고니아 여행 끝에서 이런 해피엔딩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라데 항공을 891페소에 예약했는데 아르헨티나항공은 이보다 가격이 2배 정도 된다. 그것도 직항이다. 값싼 라데항공은 미리 예약해야만 좌석을 확보할 수 있다. 예약을 하지 못했다면 칼라파테에 라데항공 사무실을 찾아가 보면 방법이 생길지 모른다. 나도 여기서 예약을 했다.


○ 편집ㅣ김준수 기자



태그:#남미여행, #파타고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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