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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메리카 대륙의 남쪽 끝, '바람의 땅' 파타고니아에는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죽기 전에 꼭 한 번 가봐야 할 10대 낙원'으로 꼽은 '토레스 델 파이네'가 있습니다. 이곳은 세계 3대 트레일 가운데 하나로도 꼽히죠. 또한 남미 최고봉 아콩카과는 잘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여행지였습니다. 이 두 곳이 내가 남미 여행을 떠난 이유였죠. 잊을 수 없는 남미 여행기를 연재합니다. - 기자 말

파타고니아
 파타고니아
ⓒ 김동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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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타고니아를 달리며

버스가 '스텝' 지대에 아로새긴 아스팔트 길을 달렸다. 붉은 태양은 서쪽 대지를 불태우며 광휘의 풍경을 만들었다. 파타고니아는 매 순간 흥분과 환희로 날 반겼다.

순청 하늘에 무지개가 떴다. 대지와 바람에 무지개가 더해지자 완벽한 '미장센'이 만들어졌다. 감정은 잔잔한 발라드 음악처럼 가라앉았다. 이런 내 기분을 아는지 성난 파타고니아의 바람이 버스를 뒤흔들며 지나갔다. 웃음이 나왔다.

그 사이 태양이 존재를 과시하며 구름 안에서 빛내림을 만들어 냈다. 순백 찬란한 광선 줄기가 뻗어 내려와 내 이마 위에 내려 앉았다.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순간이었다.

푸에르토 나탈레스에선 연신 한숨이 나왔다. 애초 묵으려 한 숙소를 찾지 못해 '찌라시' 한 장을 보고 찾아간 곳이 '메린다'(Merinda)였다. 개인 집을 민박집처럼 운영하는 호스페다헤 가격이 5000페소로 저렴했다. 손님이 없어 3인실 도미토리를 혼자 쓰는 게 제일 마음에 들었다. 와이파이 속도가 빨랐고, 뜨거운 물도 펑펑 잘 나오고 그럭저럭 괜찮았다.

파타고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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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알 정보
숙소에서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까지 운행하는 버스 티켓을 예약했다. 숙소 아주머니는 왕복에 1만 5000페소라고 했다.

그런데 정보를 찾아보니 1만~1만 2000페소면 절충 가능하다고 했다. 아주머니는 깎아 달라는 소리에 1만 4000페소까지 해주겠다고 했다. 중간에 수수료를 챙기는 건 알겠지만, 아주머니에게 버스 티켓을 예매하지 않으면 트레킹 기간 중 숙소에 짐을 맡기는 게 영 눈치 보이는 상황이었다.

참고로 여행 정보 중 가장 맞지 않는 건 '가격 정보'. 인터넷이나 가이드북에 나와 있는 가격을 너무 고집하지 않는 게 정신건강에 이롭다. 현장에선 이 순간에도 계속 가격이 오르고 있으니.


일생 단 한 번일지 모를 트레킹을 위한 준비

푸에르토 나탈레스
 푸에르토 나탈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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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망'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본격 준비에 들어갔다.

호수와 맞닿아 있는 푸에르토 나탈레스 초입에 있는 여행자 정보 센터를 찾았다. 이곳을 방문한 이유는 토레스 델 파이네 일주 트레킹 가능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트레킹은 보통 산군을 크게 한 바퀴 도는 일주 코스와 3개 미라도르(Mirador : 전망대)를 찍는 'W 코스'로 나뉜다. 일주 코스를 완주하기 위해선 8~10일이 필요하며 W 코스는 4~5일 정도가 걸린다.

원래 계획은 W 코스를 포함한 일주 코스에 도전해 보는 것이었다. 지구 반대 편에 사는 내가 여길 또 언제 여행할지 모를 일이었다. 눈이 녹아야 열리는 코스에서 바라본 토레스 델 파이네 전경이 그림 같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직원은 아직 눈이 녹지 않아 W 코스 밖에 개방이 안 된다고 했다. 비보였다. 현재로서는 개방 일정을 알 수 없다고 했다.

이 문제 때문에 며칠 전 여길 다녀간 블로거와 한 카페에 문의했지만, 답변이 신통치 않았다. 이 사실을 모르고 필요한 일주일 식량을 준비했다면... 생각만으로 어질해지는 상황이었다. 아프리카를 조기에 탈출한 게 결정적 타격이었다. 터키와 이란을 루트에서 제외한 것도 마음에 걸렸다.

'아놔! 일이 이리 꼬이나!'

푸에르토 나탈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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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에르토 나탈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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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여행자 정보 센터에서의 소득이 전혀 없진 않았다. 딱 하나 남았다는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 상세 지도를 손에 넣었으니. 아쉬운 대로 W 코스에 초점을 맞춰 준비에 돌입했다. 일단 말 많은 W 코스를 현미경 보듯 분석해 보기로 했다.

W 코스를 포함한 일주 코스에 도전하면 보통 반시계 방향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어느 방향으로 트레킹을 시작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이 방향으로 산군을 도는 이유는 '캄파멘토 로스 페로스'(Campamento los Perros)에서 '파소 혼 가르드네르'(Paso John Gardner)로 가는 게 체력을 아낄 수 있어서다. 코스를 반대로 돌게 되면 급경사를 올라야 하는 단점이 있다.

지도를 자세히 보니 많은 블로거가 남미에 가면 당연히 해야 하는 것처럼 말하는 토레스 델 파이네 W코스는 결코 쉬운 트레일이 아니었다.

거리와 시간상 2박 3일에 마칠 수 있는 코스였지만, 평소 트레킹 등 운동을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작스레 완주할 수 있는 곳은 절대 아니었다. 코스를 4박 5일로 잘게 쪼갠다면 그런대로 쉬엄쉬엄 걸을 수 있는 코스가 만들어지긴 했다. 여기다 산장을 이용하지 않고 텐트·침낭·식량 등을 다 메고 가면 초보자는 트레킹이 아닌 '고행킹'이 될 게 뻔했다.

W코스에서 가장 큰 고민은 시작을 어디서 할지에 대한 문제였다. 이 고민은 첫날 날씨를 보고 유동적으로 결정하는 게 순서였다. 만약 첫날 날씨가 좋다면 오른쪽에서 시작해 토레스 봉우리를 먼저 보고, 날씨가 좋지 않으면 배를 타고 W코스 왼쪽에서 시작하는 게 순리다. 어차피 걷는 건 똑같다. 문제는 시작 방향에 따른 완전 다른 풍경을 볼 수 있다는 점.

비용을 아끼는 동시에 제대로 자연을 즐기려면 백패킹(야영)을 해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배낭 무게에 특히 신경 써야 한다. 무릇 산행은 가벼울수록 쉬운 법. 특히 백패킹에선 음식 선택과 양 조절이 중요한데 음식이 남게 되면 헛심을 쓰게 되는 거고, 음식이 모자라면 산장에서 비싼 대가를 치르고 밥을 사 먹어야 한다.

푸에르토 나탈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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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1박 2일짜리 백패킹이라면 고기를 얼리고, 와인을 한 2병쯤 배낭에 꽂고 저녁 만찬을 위해 천천히 산길을 오르겠다. 하지만 이번 일정은 그렇게 여유를 부릴 만한 코스가 아니었다. 최소의 장비로 최대 효과를 내야 했다. 배낭에 무엇을 담을지 고민하는 건 하수의 패킹이고, 고수들은 배낭에서 무엇을 덜어낼지 고민한다.

대략 코스 분석을 마치고 본격적 준비에 나섰다. 장비점에 들러 필요한 연료를 샀다. 푸에르토 나탈레스 장비 점엔 찾던 화이트 가솔린이 있었다. 일단 연료를 손에 놓으니 마음이 한결 놓였다.

시내 마트에선 빵·소시지·과일·스파게티 등을 구입했다. 검증되지 않은 남미의 인스턴트 식품은 트레킹 중 치명적 내상을 줄 수 있었기 때문에 되도록 한 번이라도 먹어본 제품으로 구색을 갖췄다. 카트 안에 놓인 음식은 극도로 보수적이었다. 여기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공수해온 라면과 햇반이 아직 배낭 속에서 비워질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해가 바람에 씻겨 산 아래로 흘러내릴 때쯤 양손에 비닐 봉지를 들고 중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숙소로 향했다.

파타고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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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알 정보
파타고니아라는 명칭은 마젤란 원정대가 거인족이라고 묘사한 원주민을 가리키는 '파타곤'(patagón)이란 말에서 왔다.

당시 스페인 사람 평균 키가 155cm 정도였는데, 파타곤은 무려 180cm였다고. 이 거인족은 떼우엘체족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떼우엘체족은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원주민 말살 정책에 대항해 용맹이 항전을 벌인 원주민으로, 현재는 1만 명이 채 되지 않는다. 아르헨티나 대통령이었던 후안 페론 어머니가 떼우엘체족 혈통으로 알려졌다.

파타고니아의 대명사는 바람이다. 최대 풍속이 초속 60m를 넘는 일도 드물지 않다고. 보통 초속 40m가 넘으면 사람이 날아간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파타고니아를 '폭풍우의 지대'라고 부르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스텝(초원)과 가시가 있는 관목림(灌木林) 지역이 많다.


[에필로그] 메린다 숙소 아주머니는 오늘도 빵을 썰고 계실 거다

파타고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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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에르토 나탈레스의 '메린다'(Merinda) 숙소에 머물 때다. 다 좋았지만, 이 숙소에는 내가 도저히 참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요르단 암만 만수르 호텔 '걸레' 빵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 없는 거지 같은 아침밥과 주인 아주머니의 위생 개념은 혀를 내두르게 하는 것도 모자라 '안구 돌출증'을 유발했다. 메린다의 실체를 목격한 건 마트에서 사 온 음식을 냉장고에 넣으려는 순간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냉장고 문을 연 순간, 그간 절대 상상해 본적 없는, 상상할 수도 없는 냉장고 안 풍경에 반사적으로 뒷걸음을 치는데... 이 모습은 중국 신장 위구르 여행 중 한 골목에서 'X덩어리'를 매달고 있는 그녀와 눈이 마주친 것처럼 충격이었다.

붉고, 노란 각종 소스는 하얗게 빛나야 할 냉장고 바닥을 단풍 빛깔로 칠해 놓았고, 정체 모를 봉지들이 얽히고설킨 채 추위를 이겨내는 모습은 출근길 '지옥철'을 방불케 했다. 냉장고는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먹다 남은 음식은 본래 향을 잊은 채 악취를 풍겼고, 그 옆에선 양배추가 썩어가고 있었다.

냉장고에 음식을 넣었다가는 도리어 내 음식이 상해 나올 것 같았다. 조용히 냉장고 문을 닫고, 내 살아 움직이는 위장으로 빨리 음식을 처리하기로 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냉장고 때문에 이런 메가톤급 충격이 영육을 강타한 적은 없었다. 쇼크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이 호스페다헤의 모든 것이 불결해 보였다.

놀란 가슴과 사온 음식을 부여잡고 아주머니가 빵을 먹고 있는 식탁으로 갔다.

"오 마이~ 가스레인지!"

또 한 번 경악에 몸서리치며 하마터면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떨어뜨릴 뻔했는데... 주인 아주머니는 접시도 없이 식탁 그 위에 그대로 빵을 올려놓고 칼질을 하고 있었다. 중세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빵을 자른 아주머니는 '쓱쓱~ 쓱쓱~' 티슈 대신 맨손을 사용해 칼을 닦았다.

그리고 잼 통에 그대로 칼 입수! 아주머니는 보란 듯 빵 부스러기가 사방에 훑어져 있는 식탁 위에서 거침 없이 빵 위에 잼을 발라 나갔다.

'아놔! 진짜! 아줌마~~~아!'

이 모습은 에티오피아 타이투 호텔의 변좌 없는 양변기와 완벽한 '콜라보'를 이룰 정도로 내겐 치명적이었다. 아주머니는 한 치 거리낌도 없이 빵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아주머니는 배가 차지 않았는지 빵 한 조각을 그대로 난로 위에 올려놓았다. 세 번째 충격이었다.

토스터도 아니고, 난로 위에 프라이팬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쇳가루가 난자한 난로 위에 '생빵'을 올리는 기막힌 광경까지... 돈이 있다면 아주머니에게 칼슘이나 철분이 듬뿍 든 영양제를 사다 드리고 싶었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그 모습을 멍청히 지켜봤다. 이 장면만 놓고 보면 분명 메린다 호스페다헤는 21세기 것이 아니었다. 빈대 없는 걸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지만 생경한 풍경은 민감한 내 아랫배를 꿀렁이게 만들기 충분했다.

더러운 걸 참지 못하는 성격 탓도 있겠지만, 언제나 여행은 갑작스럽게 한계 치 이상의 위생 상태를 모자이크 없이 생중계해준다.

독자들이여, 날 까칠한 여행자로 보지 마시라! 그대들이 내가 세계 일주 중 목격한 것을 편집 없는 19금 무삭제 버전으로 시청한다면 벼락에 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버릴지 모른다.

세계 일주 1막 중 진정 '서프라이즈' 더러움을 생동감 넘치는 묘사력으로 쓴 꼭지는 편집자의 구토 증세로 책에 실리지 못하는 불상사가 있기도 했다. 그 글은 아직도 노트북 안에서 세상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 편집ㅣ조혜지 기자



태그:#남미여행, #파타고니아, #토레스델파이네, #세계일주, #남미 트레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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