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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평화롭기만한 서울의 일요일 아침 "누가 이 고요뒤에 닥칠 비극을 알았으랴."
▲ 서울전경 1950년 6월 25일 평화롭기만한 서울의 일요일 아침 "누가 이 고요뒤에 닥칠 비극을 알았으랴."
ⓒ 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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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새벽,  비가 조금 내렸지만 아주 맑은 날이었다. 새벽 4시 북한은 남침 암호 '폭풍'을 전군에 하달하고 서쪽의 웅진반도부터 개성, 전곡, 포천, 춘천, 양양 등 4개 축선 11지점에 이르는 38도선 전역에서 전면 남침을 개시했다.1129일간의 처절한 전투는 이렇게 시작됐다.

38도선을 돌파하고 서울 점령을 위해 남하하고 있는 북한군의 T-34전차
▲ 북한의 남침 38도선을 돌파하고 서울 점령을 위해 남하하고 있는 북한군의 T-34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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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彼) ·아(我) 포격전으로 초토화된 피의 능선(1951.9)
▲ 피의 능선 피(彼) ·아(我) 포격전으로 초토화된 피의 능선(19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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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은 T-34 소련제 탱크를 242대 가지고 있었고, 170여 대의 전투기를 포함하여 200여대의 비행기와 20만의 전투병력이 있었다. 반면, 국군은 탱크와 전투기는 전무했고, 단지 20여대의 훈련용 연습기와 연락기가 전부였다. - 6.25 전쟁 1129일 이중근 편저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38도선 선상의 전 전선에서 선전포고 없는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2일 후인 6월 27일 UN창립 후 최초로, 침략당한 대한민국을 돕기 위한 UN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로 UN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UN군의 일원으로 참가한 국가는 전투참가 16개국, 의료지원 5개국, 물자및재정지원국39개국,지원의사 표명국 3개국 포함 63개국이었다.

"6.25 전쟁은 공산세력이 대한민국을 공산화하기 위해 도발한 불법 남침이다." - 트루먼 대통령

38도선을 돌파하여 북진하고 있는 국군(1950.10)
▲ 북진 38도선을 돌파하여 북진하고 있는 국군(195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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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5일 북한은 무방비 상태인 남한을  거침없이 짓밟았다. 거침 없던 기세가 더 이상 물러설수 없던 국군의 반격과 UN군의 도움으로 7월경부터 국군이 전세의 승기를 잡고 북진하여 9.28일 서울을 탈환하게 되고 이북으로 진격하게 된다. 다급해진 김일성은 마오쩌둥에게 긴급 지원 요청 전문을 보내게 된다.

마오쩌둥은 북한을 지원하기 위해 동북변방군을 편성해 놓고 '항미원조 보가위국'(미국의 침략에 저항하고 조선을 도왔다)을 명분으로 '인민지원군'의 출병 명령을 하달한다.

10월 19일 제4야전군 예하 제 13병단의 6개군 18개 사단(약 18만 명),11월초순 에는 제 3야전군 예하 제9병단 3개군 12개 사단(약12만명)이 각각 안동, 창뎬, 지안 등지에서 압록강을 도하했다. 이로써 통일을 꿈꾸었던 전쟁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고, 연합군은 고군분투 했지만 눈물을 머금고 결국 후퇴하게 된다.

흥남철수작전을 지원하고 있는 미해군의 127전함과 폭파 되어 불타고 있는 흥남함(1950.12.24)
▲ 흥남철수작적 흥남철수작전을 지원하고 있는 미해군의 127전함과 폭파 되어 불타고 있는 흥남함(1950.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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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흥행에 성공한 영화 <국제시장>의 배경이 된 흥남철수작전(1.4 후퇴)은 12월 14일 부터 24일 사이 10만 명이 넘는 군 병력과 피란민 9만 1000명 그리고 1만 7500대의 각종 차량과 35만 톤의 물자를 수송한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기록을 남긴 인도적인 철수작전이었다.

마지막 출항선인 '메러디스 빅토리 호(레너드 라루 선장 당시 만35세)'는 무기와 물자를 버리고 정원의 230배를 초과하는 1만4000명의 피란민을 승선시켰다.

모든 것을 잃은 어머니와 어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이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 전쟁 모든 것을 잃은 어머니와 어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이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 이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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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흥남부두를 출발한 배는 피란민을 젓가락처럼 빼곡하게 태우고 25일 아침 거제도 장승포항에 도착했다. 13시간40분의 항해였다. 몸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그 공간에서  다섯명의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기도 했다. 한 사람의 영웅적인 노력으로 1만4000명의 목숨을 건진 6.25 전쟁이 낳은 '인간 승리 대탈출'이었다. 혹자는 '메러디스 빅토리 호'를 'ship of miracle'이라부른다. 독일 나치정권 당시 많은 유대인을 구한 '오스카 쉰들러'를 생각나게 한다.

후일 레너드 라루 선장은 " 하나님의 손길이 나의 작은 배의 조타기를 잡아 주셨다"라고 고백했다.

한국전쟁은 치유할 수 없는 큰 상처을  남기고 휴전에 들어갔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잠시 소강상태일뿐.

전쟁를 겪지 않은 세대는 전쟁의 참혹함을 알지 못한다. 어떤 배경으로 전쟁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다. 국민의 애국심과 의식이 바로 서야 전쟁이 일어 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6.25 발발 65주년을 즈음하여 다시 한번 한국전쟁에 대해 고민하고 지난 역사를  거울 삼아 다시는 이땅을 피로 얼룩지게 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하겠다.

지난 18일 천안 보훈회관을 찾았다. 6.25참전유공자회 천안시지회 이강은 지회장(84)은 1950.7.16일 19세의 나이로 자원입대를 했다. 전시 중이었기 때문에 간단히 소총 쏘는 법을 배웠고, 소대, 중대, 대대를 편성해서 전선에 투입되었다고 한다. "귓전을 때리는 포탄소리와 빗발치는 총알 소리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고 전했다.

포탄과 소총은 한 인간을 하염없이 약한 존재로 만들었을 것이다. 생사의 기로에선 그들을 강하게 한것은 무엇이었을까? 이강은 지회장은 "애국심과 전우애"라고 힘주어 말했다.

어린 나이였다.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냐는 질문에 "나라를 구하기 위한 일념 뿐이었다. 두려움이 있었으면 절대 전투에 투입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전했다. 6.25 전쟁 중 크고 작은 전쟁이 있었지만 그중에 '안강 기계 전투'를 빼놓을 수 없다. 이강은 지회장은 안강 기계 전투에 참전하게 된다.

안강전투는 전쟁의 초기인 1950년 8월9일부터 동년 8월 20일 까지의 기간에 이루어진다.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전선을 방어하고 있을 때 국군 제 1군단(수도사단, 제3사단)이 기계, 안강, 영덕, 포항 일대에서 유격대(66부대)로 증강된 북한군 2개 사단(제5,제12사단)의 침공을 격퇴한 방어전투이다. 안강전투가 왜 중요한가?

이곳의 방어선이 뚫린다면 평야지대인 이곳을 북한국이 바로 내달려 충주, 울산, 밀양, 부산까지 도달 할 수 있게 되어 대구 지역의 최후 방어선이 열려 버리는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 였기 때문이다.

이강은 지회장은 이 전투중 보급이 되지 않아 3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전투를 해야하는 어려운 상황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제대로 먹질 못하니 피똥을 싸는 게 다반사였다고 한다.

당시 상황이 얼마나 열악했던지 천막 하나 없이 철모와 M1소총 하나만 가지고 그 피비린내 나는 전투에 목숨 걸고 온 몸을 던졌다. 전쟁중 다리에 부상을 입고 입대한 지 4년 6개월 만에 제대  하게 된다.

청수동에 위치한 보훈회관 전경
▲ 보훈회관 전경 청수동에 위치한 보훈회관 전경
ⓒ 이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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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6.25 참전유공자중 생존자는 전국적으로 17만명에 이른다. 이들은 젊은 시절 목숨을 받쳐 나라를 지켜냈고, 세계적인 경제대국을 건설하는데 일조한 역군들이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보상은 상당히 미흡한 편이다. 정부지원금 18만 원과 지자체 지원금 10만 원 정도의 연금을 받고 있다. 천안지역에도 1700명 정도의 참전용사가 있으며 이중 30%인 510명 정도가 가족 없이 독거하고 있다고 한다.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이들에 대한 대가는 너무 형편이 없다."

6.25 참전유공자회는 두 번 다시 이땅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전쟁의 실상을 교육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초등학생부터 대학생에게 이르기까지 실상 교육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알리고 있다. 그러나 비협조적인 단체가 많다고 전했다. 이념적인 문제를 떠나 참 역사를 알리기 위한 그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메르스 바이러스로 인해 6.25 전쟁 관련 행사가 취소가 되어 많이 서운합니다.이런 기회를 통해서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들에 전쟁의 실상을 알려야 하는데 말이죠." 

625의 참상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이강은 지회장
▲ 인터뷰 625의 참상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이강은 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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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변화되고 평화와 소통과 화합의 분위기가 사회 저변에 깔려 있지만 지난 역사를 잊는 과오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지구촌이 하나가 되어 참 평화의 역사가 지구촌에 도래하길 진심을 바란다.

덧붙이는 글 |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받친 그들의 넋을 기리며



태그:#625, #순국선열, #호국영령, #민주주의,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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