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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젊은 나이에 요절한, 한 화가가 있습니다. '톰마소 디 세르 지오반니 디 시모네 구이디(Tommaso di Ser Giovanni di Simone Guidi)'라는 긴 이름의 그는 1401년 피렌체 근교의 한 작은 마을에서 공증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유년 시절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그는 스무 살 무렵, 처음으로 화가로서 의사 및 약사 조합의 회원이 되었고 그로부터 3년 후 미술가 조합의 회원이 됩니다. 그의 스승은 아직 고딕의 그늘에 안주하고 있던 '마솔리노 다 파니칼레(Masolino da Panicale)'. 그는 마솔리노와 달리, 당시 피렌체 화단을 풍미했던 '국제 고딕 양식'에서 벗어나 지오토의 새로운 회화 기법과 브루넬레스키의 원근법 원리와 도나텔로의 인체 조형의 성과에 더 관심을 둡니다.

그는 23세 무렵부터 26세까지 스승과 함께, 또 스승이 죽은 후 단독으로 작업한 피렌체 한 성당의 예배당 벽화를 통해 스승을 극복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듬해에는 단독으로, 지금 내 앞에 있는 그림도 제작하게 되죠. 그는 이 두 작업을 통해 서양 근대 회화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영광까지 안게 됩니다.

하지만 1428년 12월, 그는 로마에서 피렌체로 돌아오는 길에 그의 천재성을 시기한 누군가에 의해 독살됐다는 소문을 남긴 채, 의문의 죽음을 맞이합니다. 짐 모리슨이, 지미 헨드릭스가, 커트 코베인이, 그리고 윤동주가 죽음을 맞았던 바로 그 나이, 27세에 말입니다.

그런데 이후, 이름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는 대가들, 예컨대 프라 안젤리코, 필리포 리피, 기를란다요,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다빈치, 페루지노, 미켈란젤로 등이 그의 작업에 감명받아 그의 그림들을 보고 배우면서 새 시대의 화가들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른 바 '피렌체 르네상스 회화'가 바로 그의 손에서 탄생한 것이죠.

서양 근대 회화의 시원을 상징하는 기념비적 작품들을 남기고 불과 27세에 삶을 마친 비운의 천재, 톰마소 디 세르 지오반니 디 시모네 구이디. 우리는 흔히, 이 긴 이름 대신 '어수룩한(혹은 선량한) 톰마소'란 뜻을 가진 애칭으로 그를 기억합니다. 그는 바로, '마사초(Masaccio)'입니다. 

마사초의 <성 삼위일체>를 만나다

마사초 '성 삼위일체'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브루넬레스키가 고안한 일점 투시 원근법을 이용한 최초의 그림입니다. 마사초의 이 그림 이후 화가들은 화면에서 무한한 새로운 공간들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 성 삼위일체 마사초 '성 삼위일체'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브루넬레스키가 고안한 일점 투시 원근법을 이용한 최초의 그림입니다. 마사초의 이 그림 이후 화가들은 화면에서 무한한 새로운 공간들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 박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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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 눈 앞에는 그, 마사초가 그린 <성 삼위일체(La Trinita)>가 있습니다. 어쩐 일인지 찾아온 여행객이 아무도 없는 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한쪽 벽 앞에서 오직 나 혼자만 <성 삼위일체>를, 마사초를 만나고 있습니다.

오랜 연인과 이별할 때만이 아니라 그토록 오래 그리워했던 것과 만났을 때에도 '총 맞은 것처럼' 가슴에 구멍이 난다는 걸 오늘에야 처음 알았습니다. 코와 입을 통하지 않고 바로 폐와 심장으로 마사초가, 피렌체가 호흡되는 느낌입니다. 내가 그토록 오래 그리워했던 피렌체가 이렇게 내 심장에 구멍을 내고 있습니다.

<성 삼위일체>는 잘 아는 것처럼 브루넬레스키가 고안한 일점 투시 원근법으로 제작된 최초의 작품입니다. 앞서 몇 번 언급했던 성당 속의 작은 예배당, '카펠라'를 기억하시는지요? 보통의 카펠라는 하나의 방처럼 만들어져 입체 공간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마사초는 그 입체 공간인 '카펠라'를 이렇게 실험적 기법의 프레스코화로 재현해 놓았습니다.

간단명료한 구도의 <성 삼위일체>는 인물들이 속한 각 층위의 공간감이 달리 보입니다. 그것은 상단과 하단의 모든 선들이 십자가 아래 부분의 한 점으로 모이기 때문이죠. 감상자를 위한 치밀한 수학적 고려로 만들어진, 이른바 '소실점'입니다. 현대인들이야 익숙할 대로 익숙한 구도지만, 일점 투시 원근법을 처음 접했던 당시 사람들은 이 그림을 보고 평평한 벽면이 깊숙이 들어간 것 같은 환상적인 공간감을 느꼈을 겁니다.   

마사초, '성 삼위일체' 부분. “나도 한때 그대와 같았노라. 그대도 지금의 나와 같아지리라.”는 경구가 적혀 있습니다.
▲ 성 삼위일체(부분) 마사초, '성 삼위일체' 부분. “나도 한때 그대와 같았노라. 그대도 지금의 나와 같아지리라.”는 경구가 적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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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일점 투시 원근법은 감상자에 대한 배려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로지 한 지점에서, 고정된 한 명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구도. 그것은 사실 우리의 일상 체험과는 동떨어진 인위적인 구도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대상과 감상(혹은 창작) 주체의 공간적 관계에 대한 합리적 고찰을 의미합니다. (신과 같은) 대상의 명확성만 강조됐던, 그래서 서로 다른 요소들이 어색하게 '모자이크'화 돼 있던, 중세 기독교의 평면적 시각에서 벗어나 수학, 기하학이라는 합리적 원리로 세상을 바라보는 인간 주체성의 재발견이란 말입니다. 이 일점 투시도법을 통한 원근법은 마사초의 <성 삼위일체> 이후 다양한 화가들에 의해 더욱 발전돼 화면 안에서 무한한 새로운 공간들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말 그대로 '르네상스'입니다.

예술사의 새로운 흐름을 엮어낸 작품을 실제로 본다는 것이 이렇게 가슴 떨리는 경험인 줄 정말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림 감상을 마치고 돌아서려는데 그림 아래 부분의 석관에 눈이 계속 갑니다. 석관에 누워 있는 해골. 그 위에 적혀 있는 글귀가 궁금해집니다. 급하게 구글링으로 의미를 찾아봅니다.

"나도 한때 그대와 같았노라. 그대도 지금의 나와 같아지리라."

원래는 흑사병이 창궐했던 그 시대의 비극적 경고문인데, 이제는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로 읽힙니다. 마사초는 이렇게 또 한 번 여행자의 가슴을 뛰게 합니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서는 마사초의 <성 삼위일체>말고도 놓쳐서는 안 되는 작품들이 있습니다. 먼저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가 눈길을 끄는 주 제단, '토르나부오니 예배당(Tornabuoni Chapel)'으로 향합니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중앙 제단 스테인드글라스입니다.
▲ 스테인드글라스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중앙 제단 스테인드글라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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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는 초기 르네상스의 또 한 명의 거장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프레스코 연작, <성모 마리아의 일생(Storie della vita della Vergine)>과 <성 세례 요한의 일생(La vita di San Giovanni Battista)>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어린 미켈란젤로의 스승이기도 했던 기를란다요는 비슷한 시기 활약했던 보티첼리와 자주 비교되곤 하는데 보티첼리에 비해 살짝 낮게 평가되는 작가입니다.

하지만 그 역시 실물 크기의 초상화와 수수한 색채에 장식적인 화풍으로 당시 명문가들의 인기를 끌었고 나중엔 교황에게 불려가 저 유명한 '시스티나 성당'의 벽화 작업('시스티나 성당'의 벽엔 미켈란젤로만 있는 게 아닙니다)에까지 참여한 거장입니다.

지오토와 마사초가 선도했던 화풍을 습득해 자신만의 정제된 스타일로 완성한 기를란다요. 각각 7편으로 구성된 두 작품, '성모 마리아의 일생'과 '성 세례 요한의 일생'도 그런 기를란다요의 화풍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층 자연스러워진 원근법에 편안한 인물 묘사. 특히 당시 피렌체의 풍습과 복식, 인물들로 두 성인의 삶을 그려냈다는 점이 눈길을 끕니다.

<데카메론>의 첫 무대, 필립포 스토리치 예배당

다음으로 '필리포 스토리치 예배당(Filippo Strozzi Chapel)'을 봅니다. 사실 이곳은 스토리치 가문의 예배당이 만들어지기 훨씬 이전부터 유명세를 탄 곳입니다. 그것은 바로 보카치오 때문입니다. 단테, 페트라르카와 함께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선구자로 칭송받는 보카치오. 그의 작품, <데카메론>의 첫 무대가 바로 이곳이기 때문입니다.

흑사병의 창궐로 죽음의 공포 속에 황폐해져 갔던 당시의 피렌체. 그 절망적 상황에서 도시의 젊은 귀부인 일곱 명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 모입니다. 그녀들은 흑사병을 피해 교외의 별장으로 가기로 하는데 여기에 다시 세 명의 젊은 신사가 가담하게 되죠. 그곳에서 그들은 열흘 동안 하루에 각자 한 가지씩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며 지내기로 합니다.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성모 마리아의 일생'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당시 피렌체의 인물과 복식, 관습으로 성모 마리아의 일생을 묘사한 프레스코화입니다.
▲ 성모 마리아의 일생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성모 마리아의 일생'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당시 피렌체의 인물과 복식, 관습으로 성모 마리아의 일생을 묘사한 프레스코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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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메니코 기를란다요 '마리아의 탄생'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성모 마리아의 일생' 연작 중. 주문자인 토르나부오니 집안 사람들이 성모 마리아의 탄생을 시중드는 모습이 특이합니다.
▲ 마리아의 탄생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마리아의 탄생'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성모 마리아의 일생' 연작 중. 주문자인 토르나부오니 집안 사람들이 성모 마리아의 탄생을 시중드는 모습이 특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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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메니코 기를란다요 '성 세례 요한의 일생'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세례 요한의 일생을 그린 7편의 프레스코 중 설교 장면과 예수 세례 장면, 헤롯왕의 연회 장면입니다.
▲ 성 세례 요한의 일생(부분)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성 세례 요한의 일생'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세례 요한의 일생을 그린 7편의 프레스코 중 설교 장면과 예수 세례 장면, 헤롯왕의 연회 장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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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들이 죽은 이들의 명복을 빌고 도시 탈출을 모의하던 장소가 지금의 '필리포 스토리치 예배당'입니다. 사춘기 시절 가슴 설레며 읽었던, 근대 소설의 원형, '데카메론'. 그 첫 무대를 이곳 피렌체에서 만나다니, 가슴이 또 쿵쾅거립니다. 그런데 이곳을 장식하고 있는 화려한 프레스코화 두 편이 그 감동을 더해줍니다. 

그 둘은 필리피노 리피의 작품, '히에로폴리스 사원에서 용을 쫓아내는 성 필립포'와 '드루시아나를 부활시키는 성 요한'입니다. 괴짜 아버지를 둔 탓에 출생부터 순탄치 못했던 필리피노 리피는 아버지, 필리포 리피의 재능과 스승인 보티첼리의 화풍에, 마사초의 화풍까지 이어받아 자신만의 아름답고도 독특한 그림 세계를 완성한 화가입니다.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바깥 회랑에 있는, 근대 소설의 원형 '데카메론'의 작가 보카치오의 상입니다.
▲ 보카치오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바깥 회랑에 있는, 근대 소설의 원형 '데카메론'의 작가 보카치오의 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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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피노 리피 '히에로폴리스 사원에서 용을 쫓아내는 성 필립포'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필리포 스토리치 예배당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로 르네상스 이후 매너리즘의 선구적 작품으로 평가됩니다.
▲ 히에로폴리스 사원에서 용을 쫓아내는 성 필립포 필리피노 리피 '히에로폴리스 사원에서 용을 쫓아내는 성 필립포'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필리포 스토리치 예배당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로 르네상스 이후 매너리즘의 선구적 작품으로 평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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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그는 말년에 기괴하고 환상적인 경향을 보이게 되는데, 그래서 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이 프레스코화들은 르네상스 이후 등장할 매너리즘을 예고하는 작품으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마사초와 기를란다요, 필리피노 리피, 그리고 길게 언급하진 못했지만, 지오토와 브루넬레스키와 도나텔로의 십자가 상들, 국제 고딕 양식의 프레스코를 간직한 '스페인 예배당'까지 만나고 성당을 나서니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이 숨겨진 보석처럼 느껴집니다. 어느 곳을 가든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아니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보여주는 '피렌체는 역시 피렌체다.' 싶습니다. 이제, 또 한 번 마사초의 기적을 만나러 갈 시간입니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부속의 '필리포 스토리치 예배당'입니다. 필리피노 리피의 화려한 프레스코화들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왼쪽의 그림이 '드루시아나를 부활시키는 성 요한'입니다.
▲ 필리포 스토리치 예배당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부속의 '필리포 스토리치 예배당'입니다. 필리피노 리피의 화려한 프레스코화들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왼쪽의 그림이 '드루시아나를 부활시키는 성 요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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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ㅣ조혜지 기자

덧붙이는 글 | (5-3편으로 이어집니다.)



태그:#피렌체, #산타마리아노벨라성당, #마사초, #성삼위일체, #이탈리아미술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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