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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부지런히 자판을 두드리던 당신의 손이 갑자기 멈춰 선다. 당신은 다음주로 예정된 행사의 보도자료를 모레까지 작성해 언론사에 보내야 한다. 컴퓨터 모니터에 당신이 쓰다만 글 몇 줄이 걸려 있다. 당신이 글자로 채운 곳보다 더 많은 부분이 아직 빈 여백이다. 당신은 글자로 채워진 곳과 빈 여백의 경계를 한참 동안 뚫어지게 바라본다. 글자에서 여백으로 그 경계를 한 줄 한 줄 넘어가기가 몰래 국경을 건너는 밀입국처럼 힘들다.

글은 차례차례 쓰지 않아도 된다

모니터 앞에서 '한 문장' 때문에 글을 쓰지 못하고 며칠을 전전긍긍하는 이들이 많다.
 모니터 앞에서 '한 문장' 때문에 글을 쓰지 못하고 며칠을 전전긍긍하는 이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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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 시간이 흘렀다. 당신은 결국 문서작성 프로그램 창을 닫아버린다. 참고할 내용이 없을까, 포털사이트에 이런 저런 키워드를 넣고 엔터를 친다. 검색 결과를 살펴본다. 다 그렇고 그런 얘기다. 어디서 본 듯한 내용이 약간의 가공을 거쳐 뉴스로, 블로그로, 카페로 되풀이 되고 있다. 희한하게 뉴스는 다른 뉴스로, 블로그나 카페는 다른 블로그나 카페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클릭이 이어지도록 만들어져 한 번 들어가면 빠져나오기 어렵다.

그 매트릭스에 숨이 막혀올 때, 당신은 마침내 페이스북으로 도망치듯 월경한다. 페친들의 글과 사진을 하나하나 읽다보면 왜 이렇게 멋있게 사는지, 왜 이렇게 맛깔나게 글을 쓰는지 부럽기도 하고 한숨이 나오기도 한다. 보도자료 하나 제대로 쓰지 못해 이렇게 쩔쩔매는 내 처지가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이렇게 선망과 낙담을 교차시키며 손가락이 뻐근하도록 스크롤을 내리고 또 내린다. 하지만 이것도 곧 염증이 난다. 괜히 입안이 텁텁하고 입맛이 쓰다.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기지개를 편다. 창밖을 본다.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했다. 아, 이렇게 한 것도 없이 하루가 다 갔다. 주섬주섬 책상 정리를 하고 퇴근을 한다. 쓰던 원고를 USB에 넣어가지만, 저녁 술 약속이 기다리고 있다. 업무 차 만나는 약속이라 미룰 수도 없다. 상황은 다음날도 마찬가지. 당신 컴퓨터의 커서는 이틀째 글자와 여백의 경계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멈춰서 있다. 이런 상태로 또 하루가 흘러간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상태로 또 하루를 허비할 것인가?

당신의 글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익숙해진 고정관념 때문이다.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차례차례 쓰는 것이라는 생각, 글은 하나의 일관된 흐름이란 생각 말이다. 마치 누에고치에서 명주실을 뽑아내듯 생각의 고치에서 매끄럽게 연결된 글의 실을 뽑아내려 하기 때문에 당신의 손은 지금 자판을 두드리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썼던 글의 다음에 이어지는 다른 한 줄을 발견한다면 당신의 손은 바쁘게 자판을 두드릴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그 한 줄을 발견하지 못해 이렇게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다.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차례차례 쓰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은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원고지나 노트에 글을 쓰던 시대엔 이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원고지나 노트에 글을 쓰려면 당연히 첫 줄, 첫 장부터 쓰기 시작해야 한다. 첫 줄 다음에 다음 줄이 오고, 첫 문단 다음에 다음 문단이 온다. 맨 앞 장에서부터 마지막 장까지 구성 순서에 맞게, 일관된 흐름에 맞게 쓰지 않으면 그동안 썼던 원고지를 모두 구겨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예전에 글 쓰는 장면을 드라마나 영화가 묘사할 때면 책상 주변에 구겨진 원고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는 모습을 빼놓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이것은 엄청난 양의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시작할 때부터 이런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도록 한 줄 한 줄 제대로 이어가야 했다.

우선 쏟아내고, 덩어리별로 뭉쳐라

디지털 글쓰기 시대에는, 펜으로 글을 쓸 때처럼 '순서대로' 써 내려갈 필요가 없다.
 디지털 글쓰기 시대에는, 펜으로 글을 쓸 때처럼 '순서대로' 써 내려갈 필요가 없다.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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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로 글을 쓰는 시대에도 이렇게 해야 할까?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 컴퓨터 문서 작성 프로그램에 글을 쓰면 시작도, 중간도, 끝도 고정된 것이 아니다. 다만 현재 이 순간의 나열 순서에 불과할 뿐이다. 필요에 따라 블록 지정을 하고 잘라내거나 붙이기만 한다면 시작이 끝으로 갈 수도 있고, 끝이 시작으로 갈 수도 있다. 중간의 한 부분을 떼어내 시작으로, 혹은 끝으로 보낼 수 있다. 끝의 어느 부분과 중간의 어느 부분을 합쳐 시작으로 만들 수 있다.

이렇게 디지털 시대에는 당신처럼 다음 한 줄을 쓰지 못해 글을 멈출 필요가 없다. 굳이 다음 한 줄을 이어가려 애쓰지 말라. 다음 한 줄이 떠오르지 않는다고 한숨을 쉬며 손을 놓지 마라. 당신이 쓰려고 했던 글의 내용을 살펴보면 몇 개의 키워드, 몇 개의 의미 덩어리가 있을 것이다. 지금 쓰고 있는 부분이 막힐 땐 그것을 과감히 밀쳐두고 다른 부분을 써보는 것이다. 다른 부분을 쓰다보면 좀 전에 막혔던 부분의 다음 한 줄도 떠오를 것이다.

아예 첫 문장을 쓰고 그 다음 문장을 쓰는 식으로 글쓰기를 접근하지 마라. 일단 당신이 쓰려고 하는 내용들을 컴퓨터 모니터에 모두 쏟아내라. 이렇게 쏟아내기를 하는데 문맥이나 흐름, 문장이나 문법 따위는 전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당신의 머릿속에 있는 생각과 아이디어를 남김없이 밖으로 쏟아내는 게 중요하다. 당신의 머릿속을 맴돌던 생각을 당신의 눈으로 보고 읽고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럴 때 마구쓰기가 아주 유용한 수단이다.

밖으로 쏟아낸 내용들을 잘 살펴보면 그것을 몇 개의 덩어리로 뭉칠 수 있다. 덩어리를 뭉치는 기준은 이야기(시간, 공간, 사실의 순서)나 논리 둘 중 하나다. 어렵지 않게 누구나 할 수 있다. 덩어리로 다 뭉치고 난 다음 다시 살펴보면 이 덩어리의 어느 부분은 저 덩어리로, 저 덩어리의 어느 부분은 이 덩어리로 보내는 것이 더 낫겠다는 판단이 든다. 그 판단에 따라 덩어리를 떼어내고 붙이고 옮기는 작업을 한다.

덩어리 별로 분류가 끝나면 덩어리들을 전체적으로 어떻게 배열하면 좋을지 가늠해본다. 그것도 머릿속에서 그림만 그릴 것이 아니라 실제로 블록 지정을 해 이렇게 저렇게 배열을 바꿔보고, 어떤 것이 더 자연스럽고 매력적인지 따져본다. 스티브 잡스가 신제품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그것을 머릿속에 가두지 않고 프로토타입(Prototype)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은 아주 유명하다. 이 프로토타입은 스티브 잡스의 아이디어를 구체화시키고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렇게 글을 덩어리라는 분절체, 즉 시퀀스(Sequence)로 접근할 때 글 전체의 맥락이 끊어지지 않을까 우려하는 시각이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기우'다. 덩어리와 덩어리 사이의 유기적 연결에 지나친 신경을 쓰지 않아도 좋다. 글을 읽는 사람들은 덩어리와 덩어리 사이에 생략된 의미를 연결해 스스로 전체적 맥락을 만들어간다. 개울에 징검돌을 드문드문 놓아도 사람들이 발을 뻗어 껑충껑충 징검다리를 건너는 것처럼 말이다. 오히려 이런 글들은 글쓴이의 의도라는 테두리에 닫혀 있지 않고 읽는 이의 능동적 참여에 문을 열고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랑을 받는다. 요즘 신문이나 잡지를 보면 리스티클(Listicle)로 대표되는 덩어리 글, 징검다리 글을 많이 만나게 된다.

결론적으로 글은 흐름일까, 덩어리일까? 글은 흐름이기도 하고 덩어리이기도 하다, 양자역학에서 모든 물질이 파동과 입자의 성질을 동시에 가졌다고 보는 것처럼. 글은 흐름이면서 덩어리이지만, 그동안 우리는 흐름의 측면에만 골몰해 왔다. 디지털 시대의 글쓰기는 덩어리의 측면에 더 주목을 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다음 글에서는 예문을 들어가며 덩어리 글쓰기, 징검다리 글쓰기의 실제 활용 방법을 이야기해보겠다.

○ 편집ㅣ곽우신 기자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백승권 기자는 백승권의 실용글쓰기연구소(바로가기 클릭) 대표이자 동양미래대학 글쓰기 겸임교수입니다. 쓴 책으로는 <글쓰기가 처음입니다>(메디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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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을 위한 보고서 보도자료 작성 교육, 일반인을 위한 자기소개서와 자전에세이 쓰기 워크숍을 진행하는 실용글쓰기 전문강사입니다. 동양미래대 겸임교수, 청와대 홍보수석실 행정관 등을 역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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