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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사 박찬일의 노포여행 <백년식당>
 요리사 박찬일의 노포여행 <백년식당>
ⓒ 중앙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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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를 타고 서울 남산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에 종종 들르는 빵집이 있다. '과자 중의 과자, 태극당'이라는 간판에서부터 오래된 제과점의 분위기가 솔솔 풍기는 곳이다.

해방 이전 일본인 제과점에서 일했던 창업주는 1945년 해방을 맞았다. 제과점 주인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두고 간 장비를 받아 빵집 간판을 내걸었다. 70년이나 된 가게다.

어린 시절 푹 빠졌던 '사라다빵','카스텔라' 등을 옛 모양과 맛 그대로 먹어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다. 이모·삼촌이라고 부르고 싶은 오래된 직원들이 많다는 것도 이 빵집의 또 다른 특징이자 미덕이다. 그만큼 '사람대접'을 해주는구나 싶어서다.

잡지사 기자를 하다가 돌연 '요리 유학'을 떠난 후 요리사가 된 저자 박찬일은 이 책 <백년식당>에서 이런 가게를 노포(늙을老, 가게 鋪)라 칭한다.

식당에 사람처럼 늙었다는 표현을 하다니. 사실 오래된 식당은 고목처럼 정겨움이 느껴지기도 하고,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밥을 먹은 점포이니 인간 대접을 해도 되겠구나 생각한다. 빵집에서 냉면집, 갈비집, 국밥집까지 18개의 노포들이 등장한다. 인간미 느껴지는 노포들, 음식, 사람들 이야기에 빠져 하나씩 찾아가고 싶은 좋은 여행서이기도 하다.

단순하고 우직한 노포의 맛

"어머니에게 배운 그대로 합니더. 그래야 맛이 나지예. 뭘 더 맛있게 넣어볼까, 이런 생각은 안 합니더. 그라모 손님들이 '옛날 맛'이 아이라꼬 하겠지예. 그지예?"(부산 할매국밥 편 가운데)

이 책 제목처럼 100년이나 되진 않았지만 누구나 자신만의 노포가 있지 않을까 한다. 자전거 타다가 들르는 빵집 '태극당', 대림시장 감자탕집, 행주산성 원조 국숫집 등은 나만의 노포다. 이 '늙은 가게'들의 특징을 생각해보면 한 가지로 좁혀진다.

모두 단순하고 우직한 맛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세와 유행, 트렌드를 좇고 따르기 좋아하는 나라에서 이런 미덕을 유지하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다. 시대와 유행에 뒤처진다는 초조함에 많은 식당들이 요즘 잘 팔리는 새로운 음식, 신상 메뉴로 바꾸는 일은 흔하기 때문이다.

위 부산 할매국밥 집 '아지매'의 말처럼 노포들이 옛 맛을 고집하는 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래야 맛이 나기 때문이다. 실제로 맛있기 때문에 전통을 고수한다. 아마 이것은 국내외 노포 어디나 마찬가지인 듯하다. 십몇 대를 잇는 일본 식당의 후계자들은 대개 이런 말을 한다.

"저는 어떻게 하면 선대와 '똑같은' 음식을 지속할 수 있을까에 온 힘을 쏟겠습니다."

진하고 얼큰한 보통의 해장국들과 달리 전남 나주의 명물 해장국 '곰탕'은 국물이 맑으면서도 깊은 맛이 난다. 설렁탕과 함께 수백 년 전의 맛이 현재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단순하고 우직하지만 사람들이 좋아하는 맛. 그것은 감칠맛 나는 비법육수나 식욕을 돋우는 맵고 빨간 양념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신용 있는 거래처와 오랜 관계를 맺으며 받아오는 신선한 식재료와 주인장의 믿기 힘든 부지런함에서 비롯된다.

책 속 노포들 대부분의 주인장들은 새벽같이 나와 밤 늦도록 주방에서 일한다. 놀랍게도 명절에만 쉬는 가게들도 많다. 직원은 돌아가며 쉬어도 주인은 뼈가 부서져라 일한다. 농경민족 특유의 근면함은 농부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니었다.

노포의 음식은 자극적인 맛이 거의 없고, 재료의 순수한 맛, 씹는 맛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냉면의 원조라 할 평양냉면을 처음 먹었을 때 밍밍한 맛만 느껴져 음식이 잘못 나온 줄 알고 직원을 불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무 맛이 없죠? 그게 냉면이에요. 하하!"

나이 지긋한 직원 아저씨에게서 무슨 선문답 같은 대답만 돌아왔다. 그 후 몇 해가 더 흘러서야 의도한 듯 의도하지 않은 무위의 예술 같은, 무미의 냉면 맛을 겨우 즐기게 됐다. 김치도 원래는 빨간색이 아니었단다. 얼마 전 부천시 원미동에 많이 있는 '뼈다귀 해장국' 집에서 식사를 하다가 맛의 비결이 궁금해 2대 주인장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뼈다귀 해장국 맛의 비결이요? 돼지 뼈를 잘 세척하고 삶는 게 기본이에요. 요즘엔 돼지 냄새를 없앤다고 한약재를 넣기도 하는데 한약은 달여 먹어야죠. 정성 들여 돼지 뼈를 세척하고 또 세척합니다. 그게 비결이지요."

노포라고 하면 왠지 허름하고 오래된 식당만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맛있어서 오래 이어진 식당이 노포다. 욕쟁이 할머니 식당이 살아남는 이유는 그 식당 음식이 맛있어서다. 

우리에게 '백년 식당'이 없는 이유

70년 된 빵집 태극당. 우리에게 백년식당이 없는 역사의 사연을 품고있다.
 70년 된 빵집 태극당. 우리에게 백년식당이 없는 역사의 사연을 품고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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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을 유발하고 책을 고르게 했던 제목처럼 100년이 된 식당은 아쉽게도 없었다. 우리나라는 이웃한 일본처럼 대를 이어 가업을 지켜온 곳을 찾기 쉽지 않다. 왜 우리나라에는 100년의 역사를 가진 오래된 노포가 없는 걸까?

한국은 30년만 돼도 노포 축에 들고, 50년 넘은 식당도 손으로 꼽을 정도다. 특히 서울 종로 피맛골 일대가 헐리면서 노포의 기준에 들 만한 여러 식당들이 사라진 일은 참 안타깝다. 구시가의 역사가 사라질 때, 우리 사회사도 함께 역사의 뒷길로 흔적도 없이 매몰된다는 아픈 교훈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다행히 요즘은 식당의 역사가 중요해졌는지, 길을 걷다가 'since 19XX'이라고 써놓은 간판을 종종 보게 된다. 어떤 식당은 간판에 자랑스럽게 'since 20XX'이라고 써놓고 있어 실소를 자아내기도 한다. 역사 있는 나라 중에서 우리나라처럼 개개 식당의 역사가 짧은 나라도 없단다. 금방 뜨거워지고 식는다는 우리의 '냄비기질' 때문일까? 그 이유는 서두의 빵집 태극당의 창업 이야기에서 보듯 우리의 고단한 역사와 관련이 있었다.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 해방공간의 좌충우돌, 끔찍한 전쟁과 그 후유증, 그리고 이승만 정권과 4·19 민주 혁명에 이어지는 쿠데타, 산업화와 부동산 투기 광풍... 이런 와중에 업력을 쌓아갈 식당은 스스로 무너지거나 돈 되는 다른 일을 하게 되고, 그 역사의 단절을 가져왔다. 어떤 식당도 이 100년의 세월을 차분하게 보낼 상황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본문 중에서)

특히 전쟁과 피란 통에 살 길이 막막해 가업을 이어받는 게 녹록지 않았을 거다. 그래서 책 속 노포의 역사는 전쟁 이후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노포의 주인장 누구나 고질병이 생길 정도로 식당일이 중노동에 가까운 데다, 요즘과 달리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어려운 환경이 백년 식당의 어려움을 더했다. 과거 식당 일은 천하고 힘들어서, 자식에게 물려줄 생각이 적었던 것.   

그럼에도 여기 소개된 식당들을 가보지 않으면 왠지 손해 보는 기분이 들 것 같다. TV에 흔히 나오는 맛집 방송들처럼 음식과 비밀 레시피, 맛 이야기만 하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시간 여행자처럼 시간과 공간을 지켜온 맛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하나의 삶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새로운 세대로 이어지는지 보여준다. 그 삶 속에 애틋함과 감동이 절절히 스며들어 있다.

볼 일이 있어 부산에 갔다가 책에 소개된 영도의 어묵집에 찾아갔다. 1953년에 창업, 현재 아들이 운영하고 있는 곳이다. 부산에서 만들지 않아도 부산어묵이라고 이름이 붙을 정도로 유명한 부산어묵. 역시나 생선살의 고유한 풍미가 물씬 느껴졌다. 어묵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단순하고 우직하게 살았던 사람들의 삶이 입 속으로 들어왔다.

덧붙이는 글 | <백년식당>(박찬일 지음 / 노중훈 사진 / 중앙M&B 펴냄 / 2014.11 / 1만4800원)



백년식당 - 요리사 박찬일의 노포老鋪 기행

박찬일 지음, 노중훈 사진, 중앙M&B(2014)


태그:#백년식당, #노포, #박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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