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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 섬을 벗어날 때도 역시 배를 타야 한다. 프랑스 파리행 비행기를 타려면 마르코폴로 공항행 배를 우선 타야 한다. 비행기를 타기 위해 배를 타고 공항에 가야하는 이런 상황이 이방인에게는 아무래도 낯설었다. 심지어 불안했다. 정말 그 길 말고 다른 방법은 없는건지, 정말 맞는 방법인지 배에 오르기 직전까지 자꾸 확인했다. 

유럽의 관문으로 통하는 파리 공항도 유럽의 여느 공항처럼 어김없이 그 나라 위인의 이름이 붙어 있다. 샤를르 드골 공항.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운동가 출신으로 대통령까지 지낸 샤를 앙드레 조제프 마리 드 골이란 한 걸출한 인물에게 공항이 헌정된 셈이다.

영국 런던의 히스루공항, 체코 프라하의 바츠라프 하벨공항, 이탈리아 로마의 레오나르도 다빈치공항, 베니스의 마르코 폴로공항도 마찬가지다. 유럽의 공항들은 저마다 제 나라의 정치인, 작가, 예술가, 탐험가 등 역사적으로 기억할 만한 위인, 지도자들을 이렇게 특별하게 기리고 있다. 마치 국가의 관문이자 얼굴인 공항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대접하고 있다. 그런 유럽인들의 역사의식에서 인간혼의 품격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가령 인천국제공항은 이순신공항으로 김포공항은 안중근공항으로 부르면 안 되나. 인천이나 김포 같은 극동 변방의 일개 지명보다는 이순신이나 안중근 같은 위대한 한민족의 이름을 붙여 부르는 게 훨씬 낫지 않겠나. 그렇게 세계인의 머리와 심장에 위대한 한국인의 민족혼을 각인시키는 게 가뜩이나 하락하고 있는 국가 이미지와 국격을 높이는 데 효과적이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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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어도르 방빌’ 시인의 거리, 나폴레옹 시대 스타일의 숙소 -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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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거리에서 프랑스 시인과 영혼의 교감을

숙소가 위치한 파리시내의 거리 역시 사람 이름이 따라 붙었다. 시인 테어도르 방빌(Théodore de Banville). 역시 파리 시민들이 충분히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다. 그는 언어의 마술사로 불린다고 한다. 조형적 미를 중시해 자유자재로 압운의 묘를 구사했다는 것이다. 불어의 묘미를 알 수 없는 나로서는 그 경지가 미처 교감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뭔지 느낌은 온다.

나도 어엿한 '시인'이기 때문이다. 얼추 5만명 쯤 된다는 세계 최대의 시인공화국에서 합법적 시인으로 행세하고 있다. 아직 시집은 내지 못한 처지이지만 문예지를 통해 등단을 해서 일종의 공인 자격증도 있다. 지역의 작가모임에 회원 등록도 했으니 시인이 분명하다. 비록 문턱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신생 지방 문예지의 유혹과 선동에 홀려 얼떨결에 등단을 당해서 좀 찜찜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극동아시아 출신의 무명 시인으로서 프랑스 유명 시인의 시혼이 깃든 거리에 숙소를 정한 것 자체가 한편의 시처럼 설렜다. 그곳이 머나 먼 타국의 낯선 거리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개선문에서 멀지 않은 호텔(Le Pierre)부터 외관이 시적이다. 아닌 게 아니라 나폴레옹 시대 스타일의 디자인으로 이름난 곳이라는 명성도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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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르세 기차역을 개조한 오르세미술관 -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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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세미술관에서 사진을 찍은 두 명의 한국인

파리에 입성하면서 가장 기대한 곳은 단연 오르세미술관이다. 화페로도, 철학으로도 가치를 따질 수 없는 대가들의 명화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산처럼 가득 쌓여있는 명소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 숙소를 나서자마자 가장 먼저 달려갔다. 하지만 오르세 미술관에서는 아쉬운 점이 있다. 사진촬영을 엄격히 금지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프랑스 문화부에서 모든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사진을 찍는 걸 허용했는데 유독 오르세미술관만 문화부 결정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 물론 관람객 편의 도모와 미술 작품 보존을 위해서라고 금지안내문이 명시되어 있지만 야속했다. 불만스러웠다. 사는 동안 파리에, 오르세미술관에 다시 온다는 보장이 대체 어디 있는가.

그래서 이제 고백한다. 오르세미술관이 프랑스 문화부의 결정을 따르지 않았듯 나도 오르세 미술관의 지침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 미술관 관리자와 프랑스 국민에게는 미안하지만 로뎅의 '발자크상' 조각작품 앞에서 나도 모르게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말았다. 물론 플래시는 터트리지 않는 최소한의 양식은 잊지 않았다. 그럼에도 어쨌든 정해진 규칙을 어겼다는 생각 때문에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최근 낭보를 들었다. 마음의 짐을 다소 덜었다. 오르세미술관이 마침내 사진 촬영을 허용했다는 뉴스가 들렸다. 그것도 어느 한국인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확히는 한국계 프랑스인 때문이다. 미술관에 가면 한국인의 피에 흐르는 사진촬영욕구 유전자가 작동이라도 하는 것인가.

원인제공자는 한국계 입양인 출신 플뢰르 펠르랭 문화부 장관이다. 오르세 미술관에서 작품을 사진으로 찍어서 자신의 트위터에 버젓이 올렸다는 것이다. 이게 SNS 상에서 논란이 되면서 오르세미술관의 사진 촬영 금지방침이 문화부의 권고대로 해제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여전히 플래시는 터뜨리면 안 된다. 셀카봉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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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차역 대합실 같은 오르세미술관 홀 -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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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세미술관은 기차역이었다

오르세미술관(Musée d'Orsay)은 센 강변에 자리 잡고 있다. 한때 기차역이었다.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를 위해 건설한 철도역이자 호텔이었다. 1939년까지는 철도역으로 사용되었다. 지금도 건물 지하는 구 오르세 역의 시설을 이용한 지하철(RER-C 선)의 오르세미술관 역으로 연결된다.

1978년 프랑스 정부에서 산업유산이던 오르세역 건물을 '역사기념물'로 지정하고 보존·활용책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1986년말 프랑수아 미테랑(Mitterrand) 당시 대통령이 오르세미술관을 개관했다. 원칙적으로 1848년부터 1914년까지의 작품을 전담해 전시하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1848년 이전의 작품은 루브르 박물관, 1914년 이후의 20세기 현대예술 작품은 퐁피두 센터로 역할이 분담되어 있다.

오르세미술관은 미술관으로서 본연의 기능에 더해 기차역이라는 산업유산을 재생한 사례로 더욱 주목받고 있다. 기존 건축물 양식과 구조를 최대한 보존하면서 미술관으로서의 기능과 현대적 기술을 조화롭게 실현해냈다는 건축계의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관람객들의 주 동선으로 사용되는 넓고 높은 1층 홀이 인상적이다. 서울역 대합실처럼 느껴진다.

3층으로 이루어진 전시장마다 로댕, 고갱, 르느아르, 마티스, 모네, 드가, 마네, 세잔, 고흐, 로트렉 등 인상파 거장들이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이토록 놀라운 작품들이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저기 툭툭 걸려있다. 가 보면 이해할 것이다. 규칙을 어기고 싶지 않기도 하고 눈치도 보여 참고 참았지만 도저히 사진을 찍지 않을 수 없다.

특히 한 작품 앞에 나도 모르게 멈춰섰다. 걸음도, 숨도. 눈에 무척 익은 작품이었다. 구스타브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이라는 작품이다. 그 앞에서 '기원 거울'이라는 이름으로 성기 노출 퍼포먼스를 벌인 어느 벨기에 여성 예술가의 뉴스를 본 적이 있다. 그 때문에 세계적인 화제가 된 바로 그 작품이다. 그녀는 그런 담대한 퍼포먼스를 벌인 이유를 '여성의 성기를 그리는 것은 예술이고 보여주는 것은 왜 외설이냐'는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나는 그 그림도, 그 퍼포먼스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할만큼 명화의 예술세계와 행위의 경지에 논평하거나 설명할 자신이 없다. 하지만 그런 화제의 명화가 걸려있는 바로 그 자리에 직접 서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작품의 감동이 전해졌다. 그 정도면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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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심 재개발의 성공사례, 퐁피두센터 -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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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피두센터는 공장이 아니다

1977년에 개장한 퐁피두센터는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공장건물이 아니다. 정식 명칭이나 기능은 엄연히 조르주 퐁피두 국립미술문화 센터(Centre National d'Art et de Culture Georges Pompidou)이다. 박물관이 지어질 당시 조르주 퐁피두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공장처럼 생긴 투박하고 위압적인 건물 지지 골조, 외부 배관파이프 등 거칠고 노골적인 외관 때문에 더욱 유명해졌다. 지지 구조와 공기 공급 파이프은 흰색, 계단 등 운송 수단은 붉은색, 전기 배선은 노란색, 수도관은 녹색, 공기 조화 파이프는 파랑색이다.

퐁피두센터는 한마디로 복합문화예술공간이다. 국립예술박물관에는 파리의 화랑에 흩어져 있던 국가 소유의 20세기 현대 미술품들을 모아놓았다. 거대한 공공정보도서관, 산업 디자인 센터, 영화박물관, 음악·음향 연구소도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하고 있다.

당초 샤를 드골 정부의 문화부 장관이던 앙드레 말로(André Malraux)의 기획이었다. 실제 계획은 드골의 후임자인 조르주 퐁피두가 맡게 되었다. 뉴욕에 대항하는 국제예술의 중심지파리를 원했다. 큰 도서관도 필요했다. 결국 1977년 마지막 날 퐁피두의 후임자인 지스카르데스탱 대통령이 센터의 문을 열었다.

퐁피두센터는 파리 중심부 재개발 계획의 일환이었다. 유지 보수 측면에서의 합리성을 도모한다며 수시 점검이 필요한 각종 설비를 건물 외부에 노출시킨 게 특징이다. 주변 경관과 부조화 등 전문가와 시민들의 비판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창조적인 건축가와 합리적인 행정가의 조화는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고 수많은 파리시민들과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오늘날 서울을 비롯한 한국의 대도시는 도심 재개발 과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지난날 개발독재 시대에 근대화, 산업화 과정에서 졸속, 속성으로 추진된 각종 산업시설들은 유휴시설로 전락하고 있다. 도시빈민들의 난민촌같은 열악한 주거지역은 도심재개발 투기자본들의 각축장이 되고 있다.

굳이 지난 2009년 1월의 '용산4구역 철거현장 화재 사건'을 떠올릴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곳 말고도 새로운 도시문제의 화약고가 될 만한 갈등과 분쟁의 소지는 도처에 산재한다. 오르세미술관과 퐁피두센터의 선례는 교범이다. 권력과 자본과 인간이 서로 상생하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해법이 그 안에 있다.

○ 편집ㅣ장지혜 기자



태그:#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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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연구소(Commune Lab) 소장, 詩人(한국작가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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