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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오토의 종탑'에서 본 내 꿈의 도시, 피렌체의 전경입니다. 오른쪽의 거대한 돔이 피렌체의 두오모입니다.
▲ 피렌체 전경 '지오토의 종탑'에서 본 내 꿈의 도시, 피렌체의 전경입니다. 오른쪽의 거대한 돔이 피렌체의 두오모입니다.
ⓒ 박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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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떠나 피렌체로 향하는 날입니다. 아! 피렌체! 아! 피렌체! 아! 피렌체! 허락만 된다면 누구처럼(유홍준 교수는 저 유명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권'에서 "아! 감은사! 감은사 탑이여!"를 반복하고 싶다고 했죠) 이번 글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아! 피렌체!"만 반복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단언컨대 내 첫 여행의 목적지가 이탈리아인 것도 피렌체 때문이요, 피렌체가 없었다면 나는 로마와 밀라노와 베네치아를 포기하고 이탈리아에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 주저 없이 오르세와 루브르가 있는 파리, 프랑스를 선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피렌체가 있기 때문에 나는 나의 생애 첫 여행을, 그것도 한 달이라는 시간을 투자해 이탈리아에 온 것입니다.

주저 없이 선택한 아! 피렌체!

 늘 여행자들로 붐비는 피렌체의 관문, '산타 마리아 노벨라 역'입니다.
▲ 산타 마리아 노벨라 역 늘 여행자들로 붐비는 피렌체의 관문, '산타 마리아 노벨라 역'입니다.
ⓒ 박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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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있어 피렌체는 사춘기 시절부터 꿈의 도시였습니다. 그 시절 나는 이른바 르네상스의 3대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하긴 누가 그들을 외면할 수 있을까요? 그 시절 나는 다빈치와 미켈란젤로가 피렌체를 배경으로 그림 대결을 벌였다는 이야기에, 앞서 밝힌 라파엘로의 <방울새의 성모>가 '우피치 미술관'에 있다는 이야기에, 그리고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에 관한 이야기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수태고지>에 모두 흠뻑 빠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며 피렌체에 대한 기억은 점점 희미해져 갔고, 서양미술사 공부에 빠져 있던 20대 후반 무렵에는 오히려 인상파 미술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에(지금도 내 최고의 미술은 인상파입니다) 피렌체는 파리보다 후 순위로 밀리고 말았습니다. 사실 그 시절엔 내가 이렇게 유럽으로 오리라는 걸 생각해 본 적도 없었으니 아무 의미 없는 순위 매김이긴 합니다.

그런데 누군가, 나를 이번 여행으로 이끈 후배 박성경과 그의 동반자, 이중휘님의 끈질기면서도 강한 압박에 못 이겨 유럽 여행을 결정했을 때 나는 아무 주저 없이 피렌체가 있는 이탈리아를 선택했습니다(사실 단 며칠이라도 오르세와 루브르가 있는 파리를 일정에 넣을까도 생각했지만 지금 보니 그건 지나친 욕심이었습니다).

로마 중앙역인 '테르미니 역'에서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 역'까지는 우리나라 KTX 같은 고속철로 1시간 반이 채 걸리지 않습니다. 차창으로 이탈리아의 풍경이 빠르게 스쳐지나 갑니다. 아늑한 움브리아의 평원을 지나 구름 같은 토스카나의 언덕으로 향하는 길. 고대에서 중세를 건너 르네상스로 가는 길이자 바로크에서 르네상스로 거슬러 가는 길, 브루넬레스키가 절치부심 되돌아갔고 미켈란젤로가 몇 번이나 왕래했던 그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역에 내리자마자 호텔에 짐을 풀어놓고 급하게 서둘렀습니다. 피렌체에서 7박 일정을 잡았지만 중간에 시에나, 아씨시, 산 지미냐노, 피사 일정까지 있어 여유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피렌체에서의 첫 일정은 호텔 근처에 있는 '산 로렌초 성당(Basilica di San Lorenzo)'과 그 부속, '메디치 예배당(Capelle Medicee)'입니다. 그런데 그 첫 일정부터 살짝 어긋나고 말았습니다.

피렌체 '산 로렌초 성당'의 부속 건물로 브루넬레스키가 제작한 쿠폴라 아래 메디치 가문의 영묘 '왕자의 예배당'과 미켈란젤로가 제작한 '신 제의실'을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산 로렌초 성당 입구로 착각하고 먼저 들어간 곳입니다.
▲ 메디치 예배당 피렌체 '산 로렌초 성당'의 부속 건물로 브루넬레스키가 제작한 쿠폴라 아래 메디치 가문의 영묘 '왕자의 예배당'과 미켈란젤로가 제작한 '신 제의실'을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산 로렌초 성당 입구로 착각하고 먼저 들어간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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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 가문의 영묘. '왕자의 예배당'을 이루고 있는 쿠폴라의 내부입니다. 화려한 천장화가 눈을 사로잡습니다.
▲ 메디치 예배당 쿠폴라 내부 메디치 가문의 영묘. '왕자의 예배당'을 이루고 있는 쿠폴라의 내부입니다. 화려한 천장화가 눈을 사로잡습니다.
ⓒ 박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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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와 르네상스를 이끈 메디치 가문의 가족 성당인 '산 로렌초 성당'에서 내가 꼭 보고 싶었던 것은 미켈란젤로가 제작한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무덤'과 '로렌초 데 메디치의 무덤', 역시 미켈란젤로의 설계로 만들어진 '라우렌치아나 도서관', 브루넬레스키의 '구 제의실', 도나텔로의 '청동 설교대', 그리고 프라 필리포 리피의 그림, <수태고지>였습니다. 그런데 너무 급하게 서두른 나머지 '메디치 예배당'에 먼저 들어간 것입니다. 성당 입구를 착각한 나머지 그곳만 열려 있는 줄 알았던 것이죠.

'산 로렌초 성당' 쿠폴라(Cupola. 돔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밑의 '메디치 예배당'은 메디치 가문의 영묘인 '왕자의 예배당(Capella dei Principi)'과 '신 제의실(Sacrestia Nuova)'로 이뤄져 있습니다.

화려한 대리석과 '인타르시아(intarsia)'로 불리는 돌상감 기법으로 치장된 '왕자의 예배당'. 8각형의 각 면에는 메디치가 지배자들의 묘석과 문장이 있습니다. 그런데 역시 보수 공사 중이라(아무래도 관광객의 수가 가장 적은 겨울철에 보수 공사를 많이 합니다) 제대로 된 면모를 확인하기는 힘들었습니다. 그나마 쿠폴라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화려한 프레스코화가 메디치 가문의 영광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갈라테이아

미켈란젤로, '로렌초의 무덤' 피렌체, '메디치 예배당'. 로마 군인의 모습을 한 로렌초 2세의 상 아래 새벽을 은유하는 여인상과 황혼을 은유하는 남성상이 나란히 있습니다.
▲ 로렌초의 무덤 미켈란젤로, '로렌초의 무덤' 피렌체, '메디치 예배당'. 로마 군인의 모습을 한 로렌초 2세의 상 아래 새벽을 은유하는 여인상과 황혼을 은유하는 남성상이 나란히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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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운한 마음도 잠시, 미켈란젤로가 꾸민 '신 제의실'은 나에게 피렌체를 처음으로 실감하게 했습니다. 메디치 가문과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메디치 가문이 없었다면 미켈란젤로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든 그 위대한 천재성이 드러났겠지만, 지금 우리 앞에 남아 있는 모습과는 좀 다른 모습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메디치 가문이 미켈란젤로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합니다.

15세의 어린 미켈란젤로는 '위대한 로렌초(Lorenzo Il Magnifico)'로 불리는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i Piero de' Medici)에게 발탁돼 한 지붕 아래 살게 됩니다. 그곳에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조각상들을 접한 미켈란젤로는 메디치 가문에 드나드는 당대 최고의 인문학자들, 철학자들과도 교류하게 되죠.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될 신플라톤주의가 탄생한 곳이 바로 메디치 가문의 아카데미입니다.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메디치가에서 인문주의와 고전주의의 세례를 흠뻑 받은 미켈란젤로는 이후 죽을 때까지 메디치 가문과의 인연을 이어갑니다.

이 '신 제의실'은 로렌초 데 메디치의 아들, 교황 레오 10세가 미켈란젤로에게 주문해 지은 것입니다. 건물과 내부의 조각들까지 모두 미켈란젤로가 제작한 것이지요. 입구에 들어서자 왼쪽에 '로렌초(위대한 로렌초의 손자. 로렌초 2세)의 무덤'이 오른쪽에 '줄리아노(줄리아노 데 메디치. 위대한 로렌초의 셋째 아들)의 무덤'이 보입니다. 어디를 먼저 볼까 잠시 망설이다가 '로렌초의 무덤' 앞에 섭니다.

스물일곱에 요절한 로렌초. 미켈란젤로는 깊은 생각에 잠긴 로마 군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미완성의 '로렌초 상' 아래 각각 새벽을 은유하는 젊은 여인의 누드와 황혼을 은유하는 늙은 남성의 누드를 배치했습니다(남자가 새벽의 은유이고 여인이 황혼의 은유라고 하는 이들도 있는데, 위키피디아 영문판과 르네상스 마스터스 닷컴에서는 여인을 새벽, 남자를 황혼으로 보고 있습니다).

막 잠에서 깨어나 조금은 고통스럽고 불편한 자세의 '새벽'과 힘든 하루의 일상을 마치고 늙고 지친, 무표정한 '황혼'은 하루하루의 일상뿐만 아니라 삶 전체의 은유로 봐야겠지요.

미켈란젤로,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무덤'. 피렌체 '메디치 예배당'. 유명한 석고상 '줄리앙'의 원작인 '줄리아노 상' 아래 낮을 은유하는 남성의 모습과 밤을 은유하는 여인 상이 잇습니다.
▲ 줄리아노의 무덤 미켈란젤로,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무덤'. 피렌체 '메디치 예배당'. 유명한 석고상 '줄리앙'의 원작인 '줄리아노 상' 아래 낮을 은유하는 남성의 모습과 밤을 은유하는 여인 상이 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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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무덤'(부분) 피렌체, '메디치 예배당'. 낯익은 줄리앙의 모습 아래 밤을 상징하는 아름다운 여인상이 있습니다.
▲ 줄리아노의 무덤 2 미켈란젤로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무덤'(부분) 피렌체, '메디치 예배당'. 낯익은 줄리앙의 모습 아래 밤을 상징하는 아름다운 여인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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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줄리앙'을 봅니다. '위대한 로렌초'는 파치 가문의 음모로 요절한 자신의 동생의 이름을 셋째 아들에게 물려줬는데, 그가 '네무르 공작'으로 불리는 '줄리아노 데 메디치'입니다. 활기 넘치는 무인과 미소년의 모습을 함께 하고 있는 '줄리아노'는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습니다.

그렇습니다. '아그리파' 상과 함께 미술 시간 석고 데생의 가장 유명한 모델, '줄리앙'이 바로 '줄리아노'입니다. 그런데 사실 '줄리앙'이 완성됐을 때, 당시 사람들은 조각상이 실제 인물과 닮지 않았다고 볼멘소리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미켈란젤로는 '100년 뒤 줄리아노의 모습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며 웃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후원자들에게 바친 일종의 헌사인 셈이지요.

줄리앙의 아래에는 각각 낮과 밤을 은유하는 깨어있는 남성과 잠에 빠진 여인상이 있습니다. 특히 작은 올빼미상과 가면과 함께 배치된 '밤'은 얼핏 깊은 번민에 빠져 있는 모습으로도 보입니다. 이 아름다운 조각상을 보고 한 시인이 영혼이 깃들어 있는 것 같은 밤이 깨어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표현했답니다. 그러자 미켈란젤로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잠이 찾아와 돌처럼 굳어진 존재. 시간 속에 지속된 스러짐. 이는 부끄러움으로 끝나는,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 나의 위대한 모험. 나를 깨우지 말게. 그저 낮은 목소리로 속삭여 주게."

미켈란젤로에게는 이 여인상이 갈라테이아(사람으로 변신한 피그말리온의 조각상)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긴 어떤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영혼을 불어넣지 않을까요?

죽을 때까지 추구한 예술가 정신, 끝내 이룬 자기 혁신

줄리앙과 로렌초의 무덤 옆, '위대한 로렌초'의 영묘로 꾸밀 계획이었던 자리에 세 점의 조각이 나란히 앉아 있습니다. 그 중에 중앙의 '성모자상'이 미켈란젤로가 제작한 것으로 흔히 '메디치의 마돈나'로 불리는 작품입니다. 미완성의 '성모자상'. 50대 후반의 미켈란젤로는 이 작품 이후 더 이상 인체의 완벽한 비례를 묘사한 고전주의 조각을 하지 않습니다. 도대체 미켈란젤로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이번 '이탈리아 미술 기행'을 준비하면서 나는 두 가지 중요한 주제를 잡고 왔습니다. 고대에서 중세로, 고딕에서 르네상스로, 그리고 매너리즘을 거쳐 바로크로 넘어가는 이탈리아 미술사의 핵심적 작가와 작품의 발견이 그 첫 번째 주제라면, 사조를 뛰어넘는 작가 정신의 발견이 두 번째 주제였습니다. 프롤로그에 언급했던 에른스트 헤켈의 위조된 진화론 명제,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되풀이한다'는 두 번째 주제에 대한 내 고민을 담고 있는 표현이었지요.

그렇습니다. 섬세하고 사실적이고 아름다운 '피에타'를 조각했던 24세의 젊은 미켈란젤로는 죽기 직전인 90세 무렵에 현대 추상 작품에 가까운 '론다니니의 피에타'를 조각했습니다. 그것은 단지 나이 듦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추구했던 예술가 정신. 그 끊임없는 자기 혁신의 결과였으리라 나는 믿고 있습니다.

미켈란젤로 '메디치의 마돈나' 피렌체, '메디치 예배당'. 원래 '위대한 로렌초'의 영묘로 꾸미려던 자리에 지금은 저렇게 세 조각상만 있습니다. 중앙의 '성모자상'이 미켈란젤로의 작품으로 이 작품 이후 미켈란젤로는 더이상 고전주의 조각을 하지 않습니다.
▲ 메디치의 마돈나 미켈란젤로 '메디치의 마돈나' 피렌체, '메디치 예배당'. 원래 '위대한 로렌초'의 영묘로 꾸미려던 자리에 지금은 저렇게 세 조각상만 있습니다. 중앙의 '성모자상'이 미켈란젤로의 작품으로 이 작품 이후 미켈란젤로는 더이상 고전주의 조각을 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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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 앞에 있는 '메디치의 마돈나'는 그런 미켈란젤로의 변화를 증언하는 작품입니다. 그래서 단 한 작품만으로도 위대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미켈란젤로의 작품들 중 비록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나에게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작품이지요. 비로소 피렌체에 온 실감을 합니다.  

그렇게 미켈란젤로를 만난 후 필리포 리피와 도나텔로를 만나기 위해 복도로 나섭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수태고지>는커녕 다른 통로 자체가 보이지 않습니다. 직원에게 물어보니 내 발음이 엉망이었는지 필리포 리피는 알아듣지 못하고 <수태고지> 즉, 'annunciazione'만 알아들었는지 안젤리코의 <수태고지>가 있는 '산 마르코 미술관'과 다빈치의 <수태고지>가 있는 '우피치 미술관'만 가르쳐 주는 게 아닙니까(사실 '산 로렌초 성당'의 정문은 밖으로 나가 건물을 크게 돌아가면 나오는데 이때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더 시간을 끌어봐야 안 될 것 같아서 일단 밖으로 나와 다음 일정인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으로 향합니다.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피렌체 중앙역의 이름이기도 한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은 로만-고딕 양식과 르네상스 양식이 조화를 이룬 파사드가 독특합니다.
▲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피렌체 중앙역의 이름이기도 한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은 로만-고딕 양식과 르네상스 양식이 조화를 이룬 파사드가 독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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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중앙역의 이름이기도 한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Novella)'은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으로 '산타 마리아 노벨라 역' 바로 맞은편에 있습니다. 아랫부분은 로만-고딕 양식, 윗부분은 르네상스 양식으로 이루어진 이 성당은 로마에서 봐왔던 바로크 양식의 성당들과는 확실히 차이가 있었습니다. 알베르티에 의해 구성된 피렌체 최초의 르네상스식 파사드(건물의 정면)는 얼핏 보면 단순 명료하지만, 다양한 시도들이 결합돼 있어 보는 이를 즐겁게 합니다.

우선 꼭대기의 삼각형 박공에는 도미니크 수도회를 상징하는 태양이 빛나고 있습니다. 그 아래 단순한 구조의 장미창과 당시 토스카나 지방에서 유행하던 간결한 스트라이프 무늬의 네 기둥은 박공과 어울려 마치 그리스 신전을 보는 듯합니다.

아래 부분도 전체적으로 단순하지만 흰색 대리석 위에 초록색의 아치형 창문 무늬들을 배치하여 리듬감을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4개의 코린트식 기둥으로 포인트를 준 것도 지나칠 수 없습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지붕 옆 빈 공간에 배치한 S자형 장식과 원형의 꽃무늬 장식입니다. 자칫 심심할 수도 있는 직선 위주의 파사드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는 이 장식은 이후 전 이탈리아에 유행처럼 퍼져 나가게 됩니다. 앞서 로마에서 만났던 바로크 양식의 성당들 파사드에서도 이 장식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정원을 거쳐 성당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제 피렌체 르네상스 회화, 나아가 서양 근대 회화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기념비적 작품을 만날 차례입니다. 

전형적인 르네상스 양식의 회랑과 정원입니다. 이곳을 거쳐 성당 내부로 들어갑니다.
▲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중앙 정원 전형적인 르네상스 양식의 회랑과 정원입니다. 이곳을 거쳐 성당 내부로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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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ㅣ조혜지 기자

덧붙이는 글 | (5-2 편으로 이어집니다.)



태그:#이탈리아, #이탈리아미술기행, #피렌체, #산타마리아노벨라, #미켈란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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