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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예약했던 호텔은 호앙끼엠 호숫가에 있는 작은 호텔인데 가격에 비해 시설이 아주 좋았고 직원들도 매우 친절했다.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이제 속 불편한 것도 다 나았다. 미리 호텔로 옮겨진 자전거 가방에 자전거를 분해해서 포장을 했다. 베트남을 떠날 때 자전거라는 이유로 또 150달러나 되는 수수료를 내지 않으려고 부피를 최소로 줄였다.

베트남의 국난 극복엔 여성이 있다

오늘은 바딘 광장의 주석궁과 호찌민이 거주했던 옛집을 방문했다. 주석궁은 3층의 노란색 건물로 옛 프랑스 총독의 관저였다. 호찌민은 대통령이었으나 주석궁에 살지 않았다. 가족이 없이 혼자였던 그는 대신 근처 프랑스의 전기 수리공이 살던 작은 집에 거주했다.

그는 대통령이기 이전에 자상한 동네 아저씨였다. 베트남 인민들은 대통령인 호찌민을 누구든지 '박 호(Bac Ho)', 즉 우리말로 '호 아저씨'라고 불렀다. 아! 그러고 보니 우리도 그런 소박한 대통령이 있었다. '노짱',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런 친근한 표현을 받아드렸을 것이다. 하지만 호찌민과 비슷한 시기에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을 우리가 '이씨 아저씨'라고 부를 수 있었을까?

이어 여성박물관을 방문했다. 여기에서 미국을 상대로 실제 큰 역할을 한 수많은 여성 투사들을 볼 수 있었다. 우리나라도 독립운동에 여성이 큰 역할을 했지만 우리나라 정부는 여성들을 그다지 내세우지 않았다.

하지만 베트남 정부는 미국을 상대로 싸운 여성 독립군들은 물론이고, 두 명이 넘는 아이들이나 하나뿐인 아이 그리고 남편과 아이들을 함께 잃은 여성들에게는 '베트남의 영웅적인 어머니들(Heroic Mothers of Vietnam)'이란 호칭을 주며 그녀들에게 승리의 영광을 돌렸다. 거의 5만 명이나 되는 어머니들이 이 영광을 받았고 보상을 받았다.

 베트남 정부가 공인한 베트남의 영웅적인 어머니들(Heroic Mothers of Vietnam)
 베트남 정부가 공인한 베트남의 영웅적인 어머니들(Heroic Mothers of Vietnam)
ⓒ 이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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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민요를 피리로 연주하다

저녁은 하노이에서 가장 좋다는 뷔페식 식당에서 송 원장의 지인들과 함께 했다.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방이었으면 했으나 방은 없고 넓은 홀에서 함께 식사를 해야 했다. 손님들은 무척 많았다. 베트남의 경제가 좋아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홀 가운데에는 무대가 있었다. 한 무리의 생일 파티가 이어지고 난 후 나는 지니고 다닌 우리의 전통악기인 피리를 연주할 기회가 생겼다. 베트남 민요 쫑 껌(Trống cơm)을 우선 불었다. 이 곡은 남녀의 애정을 노래한 베트남의 전통 민요로 멜로디가 아주 흥겹다.

이어 베트남 북부 지방의 민요이지만 워낙 유명해서 베트남의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는 우리의 아리랑 같은 노래 베오 잣 머이 조이(Beo dạt mây trôi)를 연주했다. 남녀의 이별을 노래한 곡으로 애잔한 멜로디가 반복되는 곡이다. 외국인이 자신들의 민요를 연주하는 것을 신기해하면서 모두들 흥겹게 따라 부른다. 더불어 우리나라의 아리랑도 불었다. 피리를 배운 이후 최초의 해외 공연(?)이다.

 베트남 민요와 아리랑을 피리로 연주하다. 앞은 통역
 베트남 민요와 아리랑을 피리로 연주하다. 앞은 통역
ⓒ 이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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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과 체제를 초월한 사랑 이야기

우리와 함께 식사한 사람들 중에는 북조선 국적의 할머니가 있었다. 그녀는 베트남 전쟁 시절 북한에서 공부한 호찌민 장학생 팜녹 칸의 부인이다. 이 두 분이 결혼한 이야기는 한편의 드라마였다. 함경남도 함흥에서 1971년에 처음 만나 오랜 시련과 역경을 극복하고 2002년에 공식적인 허가를 받아 결혼을 했다. 단 북조선 국적은 바꿀 수 없다는 조건으로.

함흥화학공업대학 4학년이었던 칸은 여름에 흥남비료공장에서 실습하던 중 그녀를 우연히 만났고 둘은 곧 사랑에 빠졌다. 의사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의과대학을 가려했던 그녀는 자기 아버지가 월남한 사실을 알게 된 후 진학을 포기하고 흥남비료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1972년 졸업한 칸은 전쟁 중이었던 베트남으로 귀국했다. 그럼에도 둘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계속 이어갔다.

베트남의 화학공장에서 일하던 칸은 오직 그녀를 만날 생각으로 자신의 전공과는 관련이 없지만 단지 북한에 갈 확률이 높다는 이유로 체육국으로 이직했고 베트남·북한친선교류회를 만들어 북한과 교류를 활성화하려 했다.

그의 끊임없는 노력은 마침내 2002년 결실을 맺었다. 10월 1일 평양에서 31년 만에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었고 북조선의 결혼허가를 받아낸 것이다. 그해 마지막 날인 12월 31일에 54세인 칸과 55세인 그녀는 베트남 하노이에서 국경과 체제를 뛰어넘어 사랑의 결실을 맺었다.

 가운데 자그마한 분이 그녀이고 그 옆이 남편인 칸
 가운데 자그마한 분이 그녀이고 그 옆이 남편인 칸
ⓒ 이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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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무니없는 자전거 특별관리비를 또 내다

3월 31일 날이 밝았다. 호텔의 아침 식사는 7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우리는 6시 반에 떠나야 한다. 어젯밤에 농담 삼아 '그러면 빵이라도 준비해 줘야지' 했던 것이 아침에 현실로 닥쳤다. 호텔에서 따뜻하게 데운 바케트 빵과 바나나를 우리에게 건네준다. 큰 호텔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일이다.

공항에 도착한 우리의 주 관심은 자전거 특별관리비를 또 내야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수속을 함께 받지 말고 각자 다른 창구에서 수속을 받되 자전거라는 말은 일절 하지 말자고 했다. 제일 먼저 내가 수속을 밟았다. 부피도 좀 작고 무게도 16킬로그램 정도로 적게 나왔다. 창구 직원은 내용물이 뭐냐고 묻지도 않고 짐을 앞에 두고 가라고 한다. 그래서 동료들을 향해 빙긋 웃으며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여줬다.

혼자 한참 기다려도 아무도 안 온다. 멀리서 보니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뭔 일이 생긴 것 같다. 자전거란 말은 안 했지만 실랑이 끝에 열어보자고 해 125달러씩 추가로 모두 내고 왔다는 것이다. 특별관리비를 내지 않은 내 자전거와 낸 그들의 자전거가 어떤 차별 있는 관리를 받았단 말인가? 항공사에서 정한 규정에 맞는 부피와 무게임에도 불구하고 자전거라고 해서 갈 때 150달러, 올 때 125달러 도합 275달러의 비용-개인 항공료의 80%에 가까운-을 추가로 내야 하는 것은 너무도 불공정하다고 생각한다.

반드시 확인해라. 자전거를 갖고 외국에 갈 때는 추가 요금을 부담시키는 항공사인지 아닌지를. 추가 비용을 부담시키는 항공사를 스스로 선택하지 않는 것 외엔 아직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참고> 영남일보, 2014년 12월 19일, <越男北女 31년간의 러브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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