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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만한 여중생들은 내용물은 조금씩 다르지만 이런 화장품파우치와 고데기를 하나씩은 다 가지고 있다.
▲ 책상 위에 펼쳐놓은 화장품파우치와 고데기 웬만한 여중생들은 내용물은 조금씩 다르지만 이런 화장품파우치와 고데기를 하나씩은 다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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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례 시간에 '퇴근' 준비하는 지연이

지연(가명·중2·여)이는 7교시를 마치는 종소리가 울리고 선생님이 교실 문을 나서자마자 입술 모양의 빨간색 화장품파우치를 꺼냈다. 그 안에는 지연이가 소중히 아끼는 화장품들이 터질 듯이 들어 앉아있다. 지연이 뿐만 아니라 웬만한 여학생들은 내용물은 조금씩 다르지만 이런 화장품파우치를 하나씩은 다 가지고 다닌다.

지연이는 퍼프(puff, 스펀지나 거즈 따위로 만들어 분을 묻혀 바르는 데 쓰는 물건)를 꺼내 재빠르게 얼굴에 서너 번 토도톡 두드린 후 손거울을 보며 아이브로우펜슬(눈썹을 그리는 데 쓰는 화장품)로 쓱~쓱~ 양쪽 눈썹을 그렸다. 다듬고 고치고 할 것 없이 한 번에 고르게 균형 잡힌 눈썹이 완성됐다. 이어 틴트(립 틴트<Lip Tint>의 약자. 흔히 입술에 발라 일정 시간동안 붉은 빛이 나도록 착색시켜주는 화장품)를 발라 입술을 촉촉하고 빨갛게 물들였다.

생략할 건 하고 중요 포인트만 잡아서 후다닥 순식간에 꽃단장을 마쳤다. 지연이로서는 이제 곧 종례를 마치면 학교 밖에서 친구들과 하루 일과의 제 2부를 시작해야 하니 그 준비를 마친 것에 불과했다. 잠시 후 담임 선생님이 종례를 하러 교실에 들어왔다.

"지연이 벌써 '퇴근' 준비 다 했구나?"

담임 선생님은 벌겋게 변한 지연이의 입술을 보고 늘 그렇다는 듯 말을 건넸다. 다른 반 담임 같으면 당장 화장을 지우라며 교무실로 끌고 가서 집에도 안 보내주고 온갖 잔소리를 늘어놓으며 꾸중을 했을 터이다. 하지만 지연이의 담임 선생님은 종례 시간까지 꼰대 노릇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학생들이 화장을 하는 것도 연약한 피부가 상하거나 부작용이 일어날까 염려하는 것 말고는 따따부따 하지 않았다.

"네. 선생님, 저 예쁘죠?"

지연이도 그런 담임 선생님의 성향을 잘 알고 있었다. 종례를 앞두고 화장으로 변신한 사실을 굳이 감추거나 아니라고 부정해야할 이유가 없었다. 지연이는 자신의 변신이 얼마나 잘 되었는지를 담임 선생님께 보여주고 확인받고 싶을 뿐이었다.

"그래, 아~주 예쁘구나. 누가 보면 입술에서 피 나는 줄 알겠다!"

지연이는 담임 선생님의 말뜻을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말았는지 "걱정 마세요, 피 안 나요"라며 방긋 웃으며 대답하고는 종례를 마쳤다. 그리고는 곧장 오늘 일과의 제 2부 첫 일정인 노래방에 가기 위해 평소에 어울리는 친구들과 함께 서둘러 교문을 나섰다.

화장은 마쳤지만 머리손질까지는 미처 못하고 등교를 해야 하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그런 날에는 등교를 해서 교실로 들어서자마자 고데기부터 꺼내 교실 벽 콘센트에 코드를 꽂는다.
▲ 교실에서 고데기로 스타일 정리중인 여학생 화장은 마쳤지만 머리손질까지는 미처 못하고 등교를 해야 하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그런 날에는 등교를 해서 교실로 들어서자마자 고데기부터 꺼내 교실 벽 콘센트에 코드를 꽂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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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눈치 안 보고 교실에서 고데기를..."

10~20대 사이에서 유행하는 시쳇말 중에 '남자는 머리빨'이라는 말이 있다. 머리 모양이 남자의 스타일을 좌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하물며 여성들이야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엄연한 '여성'인 중딩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은하(가명)는 책가방이 32리터 들이 배낭이다. 여러 해 전부터 학생들 사이에서 아웃도어 등산용 옷과 배낭 등이 유행인 탓도 있지만 넣고 다녀야 할 것이 많기 때문에 큼지막한 배낭을 가방으로 골랐다. 가방 속에는 교과서 몇 권과 필기도구 그리고 체육복 같은 게 늘 들어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화장품파우치와 미니 고데기, 세워 놓을 수 있는 받침대가 있는 직사각형 모양의 손거울과 헤어롤도 상비약처럼 챙겨 다닌다.

아침밥은 못 먹어도 화장과 머리손질을 마치고 등교하는 게 당연한 순서이지만 인생사가 항상 뜻대로만 되는 게 아니어서 화장은 마쳤지만 머리손질까지는 미처 못 하고 등교를 해야 하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그런 날에는 등교를 해서 교실로 들어서자마자 고데기부터 꺼내 교실 벽 콘센트에 코드를 꽂는다. 그리고는 받침대가 있는 거울을 세워놓고 머리를 말아 올린다. 워낙 단련된 솜씨라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은하의 꽃단장은 이렇게 해서 담임 선생님이 아침 조례를 하러 교실에 들어오기 전에 모든 일이 끝난다. 자칫 시간을 못 맞춰서 담임 선생님에게 들키면 고데기를 압수당하는 건 물론 교무실로 끌려가서 온갖 수모를 다 겪어야 한다.

"학교에 고데기 가져오면 안 되는 거 알아 몰라? 호박에 꼬불꼬불 줄긋는다고 수박 되냐? 너 이러고 다니는 거 부모님도 아셔? 엄마한테 전화해서 다 얘기해야 정신 차릴 거야? 응?"

고데기에서 시작한 담임 선생님의 훈계는 부모님을 끌어들이는 이른바 '패드립'(인륜에 벗어나는 언행을 뜻하는 '패륜'과 즉흥적인 대사나 행동을 뜻하는 애드립의 합성어. 부모를 비하하거나 욕을 하는 내용을 주로 일컬음)으로 이어져서 한참을 그칠 줄 모른다.

은하는 부모님까지 끌어들여 욕을 하고 결국 고데기를 압수해 돌려주지 않는 담임이 너무 밉고 싫다. 그나저나 손질을 다 끝내지 못한 머리는 어쩌나. 은하는 머리가 복잡해진다. 은하는 하루 종일 짜증나는 마음을 '고데기 선언문'으로 써서 국어 수행평가로 제출했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고데기를 하다가 선생님들께 뺏기는 경우를 자주 보았다. 고데기를 학교에서 하면 안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저게 학교에서 뭐하는 짓인가' 생각을 할 것이라고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고데기를 학교에서 하지 말아야 할 정당한 이유도 없는 것 같다.

고데기를 하는 학생들을 보면 쉬는 시간 10분을 틈타서 선생님들의 눈치를 보며 하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그러다 선생님께 하는 걸 뺏기고. 쉬는 시간에 아무에게 방해를 주지 않고 하는데 뺏는 건 아니라고 본다. 전기세 나간다고 해도 부모님들이 세금 내는 돈에 비하면 조금밖에 안 드는 걸로 알고 있다. 그렇다고 10분을 다 사용해서 수업 시간까지 고데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학생들은 선생님이 오시면 고데기를 끄기 때문에 수업 시간에 방해도 안 된다.

이렇게 이유 몇 가지를 들어봤는데 고데기를 하는 학생들은 나와 같은 생각일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쉬는 시간을 이용해 선생님 눈치를 안 보고 고데기를 할 수 있길 원하며 이와 같이 선언을 한다." - '고데기 선언문' 중에서

써클렌즈가 이국적인 눈매와 깊고 선명한 눈동자를 만들어 주기 때문에 여중생들은 좋아한다.
▲ 미모의 완성 써클렌즈 써클렌즈가 이국적인 눈매와 깊고 선명한 눈동자를 만들어 주기 때문에 여중생들은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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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클렌즈는 미모의 완성

민지(가명)는 눈병이 나서 며칠 간 오른쪽 눈에 안대를 하고 다녔다. 평소 눈에 작용하던 써클렌즈가 부작용을 일으킨 것이다. 민지는 두 개의 써클렌즈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걸 번갈아 착용하다가 좀 싫증이 나면 친한 친구인 은혜(가명)랑 바꿔서 쓰기도 했다. 그게 사달이 난 것이었다. 그 후로는 절대로 다른 친구와 써클렌즈를 바꿔서 쓰는 일은 하지 않는다.

민지랑 은혜 등 여중생들이 써클렌즈를 착용하는 이유는 예뻐 보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갖추어 하자면 색조화장으로 곱게 단장을 하고 고데기로 머리 손질을 마친 다음 써클렌즈를 착용해야 미모의 완성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물론 그에 어울리도록 치마를 줄이거나 하는 등의 '교복 세팅'도 빼놓을 수 없다. 이를 모두 갖추면 완벽하게 변신한 자신의 모습에서 벅찬 희열을 맛볼 수 있다.

여학생들에게 물어보니 평균 3-4개 정도의 써클렌즈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물론 써클렌즈를 사용하는 이들의 경우다. 써클렌즈에는 관심이 없는 이들도 있다. 용돈이 넉넉지 않은 탓에 개당 5천 원에서 1만 원 정도의 가격대를 선호하며 하나를 구입하면 보통 한 달 정도 착용한단다.

저마다 사용법과 관리하는 요령이 다를 터이니 개인차가 있겠으나 써클렌즈가 이국적인 눈매와 깊고 선명한 눈동자를 만들어 주기 때문에 좋다는 의견은 한결같았다. 예뻐지려는 중딩들의 노력은 정말로 눈물겹다. 이마저도 학교에서 선생님한테 걸리면 당장 눈에서 빼야하고 압수를 당한다. 돌려주기라도 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눈물을 머금고 새로 사야한다. 이래저래 학교는 '압수 천국'이다.

방송 화면 갈무리
▲ <동상이몽, 괜찮아 괜찮아> 방송 장면 방송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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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딩들의 화장은 무죄…자기표현의 일부일 뿐


지연이나 은하, 민지는 물론 화장을 하는 대부분의 중딩들은 화장을 하면서 변신해가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 행복하다고 말했다. 화장을 하지 않고 학교에 오면 무언가 어색하고 심지어 불안하기까지 하다고. 케이블 채널 방송에서 한 여자 연예인이 화장을 지운 얼굴을 두고 "정말 단두대에 올라가 있는 느낌"이라고 말한 것과 같은 심정을 이들도 느끼는 것이다. 이들은 밤마다 화장을 지우는 게 귀찮고 힘들며 화장품의 성분이 여린 자신들의 피부에 안 좋다는 걸 알기에 화장에 대한 두려움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다고 했다.

실제로 2015년 3월 '여중고생의 피부 및 메이크업이 심리적 안녕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숙명여대 원격대학원 향장미용 전공 석사 학위 논문에 따르면 "학생들은 화장 후 얼굴에 대한 만족감이 높을수록 자아수용, 긍정적 대인관계, 자율성, 개인적 성장 등 심리적 안녕감 또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논문을 좀더 살펴보면 5명중 4명꼴로 중딩 때 대부분 화장을 시작하며 매일 화장(36.9%)을 하거나 주3회 이상 화장(26.4%)을 하는 비율도 높았다. 이를 단순 종합하면 약 63.3%의 여중고생들이 주3회 이상 매일 화장을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설문은 중3~고2 여중고생들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고, '화장'의 정의를 "스킨이나 로션, 선크림과 같은 기초 제품을 제외하고 파운데이션이나 파우더 마스카라 등 '메이크 업' 제품을 쓰는 경우"로 제한했다. 여기에 중1~중2를 포함하고 화장의 정의를 확장하면 사실상 거의 모든 여중고생들이 화장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루 종일 수업 시간에 책상 위에 거울을 꺼내 놓고 앉아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만 속으로 묻고 있거나,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어루만지며 정전기가 일어나 머리카락이 곤두서도록 수시로 빗질을 하거나, 헤어롤을 말아 혹처럼 달아놓고, 화장품파우치를 열어 하얗게 하얗게 얼굴을 변신하는 모습도 이제는 교실에서 낯선 풍경이 아니다.

시중에는 이미 오랜 전부터 10대 전용 화장품과 중고생용 화장품 브랜드가 나와 있었고 입학과 졸업 선물로 화장품을 선물하는 부모나 형제, 친척들도 있다. 아무리 저렴한 10대 전용 화장품이라고 해도 중학생으로서는 비용 부담이 크기 때문에 주로 세일할 때 구입을 많이 하는 편이다.

이들이 사용하는 화장품 목록을 물었더니 스킨과 로션은 기본. 여기에 썬크림, 에센스, 수분크림, 미스트, 프라이어(모공 채우는 크림), 비비크림, 시시크림, 파운데이션, 팩트(파우더 종류), 컨실러(잡티 가리기), 블러셔(볼터치), 기름종이, 셰딩(턱 작게), 하이라이터(콧대 높이기용), 아이브로우 펜슬(눈썹그리기), 아이섀도(눈두덩), 아이라이너, 아이스틱(애교살), 마스카라, 뷰러(눈썹집게,'속눈썹을 말아 올리는 데 사용하는 기구'), 립스틱, 틴트, 쌍거풀액(줄여서 '쌍액'), 쌍꺼풀 테이프(줄여서 '쌍테'), 팩, 핸드크림, 써클렌즈, 립밤, 각질제거용 스크럽제와 화장 지우는 용품 등이 있다고 대답했다.

화장품파우치나 화장품 일부를 책상 위에 꺼내놓거나 헤어롤을 머리에 말고 있는 모습이다.
▲ 교실 속 여중생들의 책상 화장품파우치나 화장품 일부를 책상 위에 꺼내놓거나 헤어롤을 머리에 말고 있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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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머리 손질용 고데기를 기본으로 헤어미스트, 트리트먼트, 헤어롤 등속을 모두 갖추면 약 30-40여종에 값은 대략 10만~30만 원 내외에 이른다는 게 여학생들의 설명이다. 도무지 '듣보잡'인 용어들인데 여중생들은 이름과 사용법을 정말로 잘 알고 있었다. 이 모두를 갖추고 있는 학생도 있고 필요한 일부만 구입하고 나머지는 서로 교환해서 쓰기도 한단다. 그러다보니 간혹 부작용이 일어나기도 해서 곤욕을 치를 때도 있다.

이들이 비록 어른들이 보기에는 화장보다는 분장이나 변장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우스꽝스러운 눈화장으로 혀를 차게도 하지만 분명한 건 이들이 화장을 하는 건 자기 표현의 일부라는 점이다. 인생에서 가장 격렬한 성장기인 사춘기를 겪으며 이전과 다른 세계로 자신의 삶을 확장하고 있다는 방증인 셈이다. 초등 고학년에 이미 화장을 시작하는 여학생들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신라시대의 '화랑'이 눈 화장과 입술 화장까지 하는 '미성년 남성'들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오늘날 10대 여학생들의 화장을 바라보는 어른들의 시선이 좀더 너그러워질 필요는 충분하다.

화장이나 고데기, 써클렌즈 등을 사용한다는 이유로 학생들을 불량품이나 문제아로 취급하고 징계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학교들의 낡은 사고방식도 진작에 변해야 했다. 현재진행형인 학생들의 성장과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학교 교육은 박제가 된 과거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잘못은 학생이 아닌 학교에 있다.

비난하고 낙인찍어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피부에 맞도록 제대로 화장품을 선택하는 것에서부터 자연스러운 화장법과 깨끗하게 지우는 방법이라도 가르쳐서 멋을 알고 '제 멋 대로' 살 수 있도록 돕는 게 어른들의 일, 학교의 일일 터이다.

○ 편집ㅣ최유진 기자



태그:#중2병, #중학생 화장, #화장, #고데기, #써클렌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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