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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힘은 논리와 비판을 장착한 글의 힘에서 나왔다. 그는 마흔 살 때부터 지금까지 칼럼니스트로서 거의 모든 정권에 눈엣가시 같은 존재, 때로는 어딘가 딴 곳으로 '치워버리고 싶은' 기자였다. 그래서 망명 가듯 외국에 나가 있기도 하고, 세무조사와 계좌 추적을 받기도 했다. - <조선일보> 5월 30일자 '언론 외길 김대중 고문'과의 인터뷰 중

한 사람을 묘사한 문단으로는 발군으로 기억될 대목이다. 묘사된 인물인 '그'는 논리에 기인해 글을 아주 잘 쓰는 사람인 듯하다. '그'는 마흔 살 때부터 정권을 겨냥한 칼럼을 35년 이상 써왔고 '모든 정권에 눈엣가시 같은 존재' 묘사됐다. 정권으로부터 '치워버리고 싶은'(기자였지만 치우지 못한) 기자였다. 도대체 50년 동안 '언론 외길'을 걸어온 그는 누구인가?

놀라지 마시라. 그 주인공은 <조선일보> 김대중 고문이다. 그가 6월 1일로 기자생활 50년을 맞는다. 김 고문은 1965년부터 25년은 현장에서, 1990년 <조선> 주필이 된 후부터는 주로 칼럼과 사설을 썼다. '50년 기자'의 경험을 듣기 위해 이 신문의 또 다른 고참 기자인 강인선 기자가 인터뷰를 했고, 그 내용을 5월 30일자 <조선일보>에 2면에 걸쳐 게재했다.

6시간 동안 인터뷰를 한 김 고문은 자신의 이야기가 지면에 게재되는 것을 반대했는데, 까마득한 후배 기자는 그의 뜻을 거스르면서 지면에 게재한다고 밝혔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내용이다. 지면에 등장한 김 고문의 모습은 기존에 알고 있던 것과는 너무 달랐다.

'언론 외길' 50주년 김 고문, 무슨 얘기했나

<조선일보> 김대중 고문이 기자생활을 한지 50년이 됐다. 2개 지면에 걸쳐서 김대중 고문 인터뷰를 게재한 <조선일보> 5월 30일자
▲ '언론외길' 김대중 고문 인터뷰 <조선일보> 김대중 고문이 기자생활을 한지 50년이 됐다. 2개 지면에 걸쳐서 김대중 고문 인터뷰를 게재한 <조선일보> 5월 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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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세인 지금도 현역인 이유를 물으니 김 고문은 "'쟁이'로서의 본분을 지키려고 노력했을 뿐이다"고 답했다. '쟁이'의 본분에 대해 "오늘을 살되 치열하게 살면서 '있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없는 것'을 가차없이 들춰낸다"며 "이게 내가 신문기자로 살아온 방식"이라고 답했다.

인상적인 질의응답이 이어진다. 강 기자가 '칼럼니스트 김대중은 좌든 우든 상관하지 않고 권력자를 비판하는 일에 모든 힘을 쏟는 것 같다'고 물으니 김 고문은 "맞는 얘기다… 우리가 사사건건 정부가 하는 일에 찬성하려면 뭐하러 언론을 하나… 싸울 때는 누구랑 싸우는 게 제일 좋은가. 상대방의 보스와 싸워 넘어뜨리면 나머지와 안 싸워도 된다"고 답했다. '좌든 우든 상관하지 않고 비판했다'라고 질문하니 '맞는 얘기'란 답변이 이어졌다. 정치인과 언론인들 가운데 그 질문과 답변에 동의할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지 의문이다.

<조선일보> 5월 30일자
▲ "아부안 해도 되고 마음대로 쓸 수 있어서 좋았다" <조선일보> 5월 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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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질문은 계속 이어진다. "권력자들이 미워하고 다른 데 보내라고 하면 기분이 어떤가?"는 질문에 김 고문은 "일상으로 느껴졌다. 어차피 나는 대통령이나 정부가 잘한다는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고 답하며 "공직을 맡은 사람이 잘하는 것은 기본이다. 못하면 욕먹을 일이다"고 말했다.

"칼럼니스트 김대중은 보수의 대변인이라는 평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는 질문에 김 고문은 가장 길게 대답했다. 그는 "이 시대에 대한민국이 살아남으려면 당분간은 우파적 관점이 필요하다고 보는 입장"이라고 답하면서도 "내가 보수를 대변한다는 말은 싫다"고 부연했다.

그는 "나는 이 시대 대한민국이 이 터널을 빠져나가려면 어느 시점 우파적 관점으로 나라를 관리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며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건방지지 않은, 싸가지 없지 않은, 중후한, 심도 있는 좌파와 공존해야 한다"고 말했다. 즉, 당분간 정권은 우파가 잡고 제1야당으로 싸가지 있는 중후한 좌파와의 공존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나라를 관리해야 할 우파 정당에 대한 요구조건은 없는가? 공존해야 할 좌파 정당에게는 건방져서는 안 되고, 싸가지가 없지 않아야 하고, 중후하고, 심도 있어야 한다고 조건을 달았다. 김 고문은 이에 대해 "보수 우파도 반드시 그래야 하지만, 그래야 그들과 같이 교대로 대한민국을 발전시킬수 있다"고 설명했다.

1980년 광주, 1997년 광화문에서의 김 고문

80년 5월 광주에 내려가 르포 기사를 송고한 김대중 기자. 그는 이 기사에서 시민군을 '총 든 난동자'라 표현했다. <조선일보> 80년 5월 25일자
▲ "총 든 난동자가 보였다" 80년 5월 광주에 내려가 르포 기사를 송고한 김대중 기자. 그는 이 기사에서 시민군을 '총 든 난동자'라 표현했다. <조선일보> 80년 5월 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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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광주, 그 역사적 현장에 김 고문이 있었다. 당시 16년차 기자였던 그는 인터뷰에서 설명한 것처럼 5월 광주에서도 '있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없는 것'을 가차없이 들춰냈던가. 그가 1880년 5월 25일 송고한 '광주 르포'의 한 단락을 보자. 언론전문매체인 <미디어오늘>은 이 기사를 '김대중 기자의 잔인한 광주학살 르포'라고 비판했다.

김 고문은 '바리케이드 너머 텅빈 거리엔 불안감만… 무정부 상태 광주 1주'란 제목의 기사에서 "그 고개의 내리막길에 바리케이드가 처져 있고 그 동쪽 너머에 '무정부 상태의 광주'가 있다. 쓰러진 전주·각목·벽돌 등으로 쳐진 바리케이드 뒤에는 총을 든 난동자들이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 멀리서 보였다"고 '5월 광주'를 기사화했다. 또 길목의 과격파들로 인해 무기반납이 지연되고 있다고 지적하며, 광주시민들이 "생필품'이 동나 고통스럽다"는 내용을 기사화했다.

그러나 '5월 광주'는 김 고문의 르포와 달랐다. 계엄군에 의한 학살과 이에 대항한 시민군이 있었다. 공식기록에 의하면 5월 광주에서 계엄군에 의한 사망한 사람은 165명(총상이 124명 포함)이었다. 1세 미만 사망자 2명, 11~15세 사망자 6명, 16~20세 사망자 29명 등이다. 실종 78명, 부상자 3383명 등 민간인 피해가 있었다.

그 후 5월 광주에서 '총을 든 시민'들의 명예는 국가가 인정해주었다. 5월 18일이 국가가 지정한 기념일이 되었고(1997년), 그 때 '총 든 난동자'가 묻힌 망월동 묘지는 '국립묘지'로 지정되었다(2002년). '언론 외길' 50년의 경험과 빛난 영광을 회고하기 이전에 '총 든 난동자'로 본인이 기록한 그 역사에 대한 사과는 없는가(이와 관련 김 고문은 1997년 <5.18 특파원 리포트>에서 "나는 지금 그럴 바에야 그 기사를 쓰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를 하고 있지만 그 당시는 그 기사가 여러 사람의 입에 올랐었다는 것만은 적어두고 싶다"며 "보도검열이 횡행하는 계엄하에서는 그래도 그 기사가 최선이었다"고 회고했다).

'이회창-김대중' 양자대결 구도를 보도한 97년 12월 17일자 <조선일보> 발행을 막기 위해 당시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 지지자들이 조선일보 사옥으로 몰려들었다. 이 때, 당시 김대중 주필의 발언이 화제가 됐다. <조선일보> 97년 12월 17일자.
▲ 97년 대선 국민신당-조선일보 충돌 당시 김 주필은... '이회창-김대중' 양자대결 구도를 보도한 97년 12월 17일자 <조선일보> 발행을 막기 위해 당시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 지지자들이 조선일보 사옥으로 몰려들었다. 이 때, 당시 김대중 주필의 발언이 화제가 됐다. <조선일보> 97년 12월 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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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좀 더 흐른 1997년 12월 16일 밤, 김 고문은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으로 또 다시 등장한다. 1997년 대선을 이틀 앞둔 12월 17일자 <조선일보> 가판이 발행된 것을 본 시위대가 조선일보 사옥으로 들이닥쳤다. 17일자 헤드라인은 '이회창 – 김대중 선두 각축'이었다. 시위대는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의 지지자였다.

김대중 당시 주필이 시위대 앞에 섰다. 1997년 12월 20일자 <기자협회보>가 전한 그날의 김 주필은 '너네들 뭐하는 거야'라며 불쾌감을 드러낸 후 '너네들, 내일 모레면 끝이야. 국민회의(김대중 후보 정당), 국민신당 너희는 싹죽어, 까불지 마… 내일 모레면 없어질 정당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정치칼럼을 전문으로 쓰는 언론사 주필의 위와 같은 발언은 언론학자에게도 충격이었나 보다. 전북대 강준만 교수는 "이건 단순한 실수 차원의 주사는 아니다. 김 주필의 진심이 고스란히 드러난, 그런 사건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고 분석했다. 강 교수는 "김 주필과 조선일보는 이 같은 주사 사건에 대해 그 어떤 사과의 말도 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그의 저서 <너무도 엽기적인 김대중 주필> 참조)

50년 <조선> 기자와의 인터뷰... 그리고 다루지 않은 내용들

김대중 고문의 글을 가장 오랫동안 분석한 강준만 교수가 김 고문을 소개할 때 빼놓지 않는 것이 그의 1997년 12월 24일자 1면 기명칼럼이다. 제목은 '즉각 실천해야 산다'이다. 당시 IMF 위기상황에서 <월스트리트 저널>의 보도를 인용하며 김대중 당선자를 '인기주의자, 예측하기 어려운 정치인, 그의 경제정책은 근거 없는' 등으로 비판한 김 고문은, 그러나 비판의 근거가 된 인용문을 찾지 못해 '엽기적인 영작문 사건'으로 회자되었다.

강 교수에 따르면 "이 기명칼럼은 <딴지일보>에게 창사 이래 최대의 특종을 안겨주었다"고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다른 나라 같았으면 이처럼 비윤리적인 행위를 저지른 언론인이라면 즉각 물러나고 해당 언론사는 사과 성명을 발표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김 주필은 여전히 건재하고 김 주필이건 <조선일보>건 사과 한 마디 없다." (그의 저서 <너무도 엽기적인 김대중 주필> 참조)

김 고문은 <조선>에 50년 몸 담으며 76세인 지금도 칼럼을 게재하고 있다. 그가 처음 기자생활을 시작할 당시 태어나지도 않았던 후배들이 지금은 <조선일보>의 간부 기자로 재직하고 있을 정도로 그의 기자 생활은 오래됐다.

'50년 기자'를 마주 대하는 후배 기자의 인터뷰는 객관적 사실만을 전해주지 못했다. 오랜 시간 현장에서 활약한 김 고문이 하고 싶었던 말, 후배 기자가 듣고 싶었던 말은 <조선일보> 5월 30일자를 보면 잘 나와 있다.

그러나 그 지면에 묘사된 김 고문이 50년 언론인 김 고문의 참 모습은 아니다. 후배 기자가 굳이 묻지 않았고 김대중 고문 역시 굳이 말하지 않은 내용 가운데 피해갈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 많다.

80년 광주 보도와 97년 국민신당 앞에서 한 발언, 그리고 '영작문 사건' 등이 그것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그가 사과하지 않았다는 대목이다.

○ 편집ㅣ홍현진 기자



태그:#김대중,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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