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의 베스트 멤버로 재미있는 농구를 구사하고 있는 원주 삼보 대 풍부한 선수 층이 강점이면서도 전력에 비해 떨어지는 성적으로 자존심을 구기고 있는 대구 동양의 대결. 당장의 순위는 하위권이지만 언제든지 중상위권으로 도약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받는 두 팀의 승부이기에 경기 전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다.

삼보는 열악한 선수층에도 불구하고 강팀들도 꺼려할 만큼의 만만치 않은 모습을 과시했다. 하지만 뒷심 부족으로 연일 쓴맛을 볼 수밖에 없었다. 동양은 전력에 비해 조직력이 올라오지 않고 있다가 경기가 거듭될수록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두 팀 다 하위권 탈출을 위해서라도 놓칠 수 없는 경기였다.

삼보로서는 제대로 된 식스맨도 없는 상황에서 베스트멤버마저 제대로 가동이 안 되고 있었다. 한 명이 부상에서 회복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한 명이 부상당하고 그것도 아니면 멀쩡하던 선수가 컨디션 난조에 빠지는 등 악재가 거듭됐다. 부상에 시달렸던 외국인 센터 모리스 조던(37·204cm)이 조금씩 컨디션을 회복하고 있고 노장 에이스 허재가 슬슬 몸 상태가 올라오고 있는 것이 그나마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요소였다.

삼보 승리의 키는 존 와센버그(41·192cm)가 쥐고 있었다. '하얀 탱크'로 불리는 그는 삼보의 주득점원이었다. 존 와센버그는 백인임에도 불구하고 흑인 스타일의 저돌적이고 탄력 있는 플레이를 펼치는 선수다. 드라이브 인에 이은 턴어라운드 슛과 힘이 넘치는 스핀 무브, 수비수를 달고 펼치는 골 밑에서의 더블 클러치, 레이업 슛 등 탄력 넘치는 흑인 선수를 보는 듯했다.

거기에 경기 내내 쉴새 없이 뛰어다니며 몸싸움을 펼치고 체력까지도 탱크라 불릴 정도로 튼튼한 편이라 삼보의 주무기인 아이솔레이션 전술을 가장 안정적으로 펼치고 있는 선수였다. 상대 수비수를 등지고 선 상태에서 펼치는 포스트 업은 빠르고 강력했다. 

와센버그는 왼손잡이다. 그러나 왼손잡이면서도 드리블은 또 오른손으로 한다. 오른손으로 드리블하다가 왼손으로 슛을 하면 상대 수비수는 무척 당황할 수밖에 없다. 여러 가지 속임수를 쓰는데도 아무래도 왼손이 오른손보다 낫기 때문이다. 미들슛의 약점이 있었지만 빠른 스피드와 드라이브 인, 피벗 등으로 단점을 커버하고 있는 스타일이었다

적어도 이전까지 보여주고 있던 와센버그의 플레이는 이런 자신의 장점들을 잘 활용해 삼보의 숨통을 틔워주고 있다. 다만 너무 의욕적인 탓에 파울트러블이 다소 자주 발생하는지라 팀을 들었다 놓았다하는 경우가 많았다. 삼보가 안정적인 경기력을 가져가기 위해서는 와센버그의 강약조절이 필요했다.

프로농구 2000~2001시즌 정규리그
2000년 12월 16일 <삼보 vs 동양>

1쿼터: 동양의 첫 출발은 비교적 무난했다. 동양은 삼보 공격 시발점인 '총알탄 사나이' 신기성을 파이팅이 좋은 이흥배를 선발로 투입하여 마크했고 힘이 좋은 와센버그를 파워가 달리는 마이클 루이스 대신 센터 토시로 저머니(40․202cm)로서 수비하게 했다.

이러한 동양의 작전은 비교적 괜찮게 돌아갔다. 특히 루이스는 자신의 마크 맨 양경민을 상대로 개인기의 우세를 앞세워 공격을 잘 풀어나갔다. 더불어 김병철 역시 좋은 슛 감각을 보여주며 전체적으로 동양의 공격이 호조를 보였다. 그러나 너무 수비를 열심히 한 탓인지 팀파울 갯수가 쌓여가는 게 불안요소였다.

영민한 신기성은 이러한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잇단 돌파로 동양의 파울을 유도하며 자유투를 통한 압박을 멈추지 않았다. 동양으로서는 점수를 벌릴 수 있는 기회에서 지지부진한 마무리로 장군멍군의 공격을 주고받은 것이 아쉬웠다. 결국 동양은 좋은 출발에도 불구하고 32 : 31 겨우 1점을 앞서고 쿼터를 마쳤다.

2쿼터: 농구는 흐름의 경기다. 이를 입증하듯 1쿼터에서 동양의 대공세를 막아낸 삼보의 공격력이 나오기 시작했다. 삼보는 신기성과 조던의 일명 빈손공격이 연거푸 성공하고 와센버그의 돌파가 살아나면서 분위기를 탔다. 이에 반해 동양은 루이스와 김병철의 몸놀림과 슛은 괜찮아 보였으나 여전히 그들의 문제점인 좁은 시야를 바탕으로 한 개인플레이가 펼쳐지며 공격실패 후 삼보에게 연이은 속공을 당했다.

루이스와 김병철은 'BQ(바스켓 아이큐)'가 좋은 선수들이 아니다. 특히 김병철은 대학과 프로시절, 낮은 신장으로 인해 1번으로의 전환을 여러차례 시도했지만 맞지 않는 옷이라는 것만 재차 증명했을 만큼 슛 외에 가드로서 다른 능력은 극히 취약했다. 김병철은 자신이 주인공이 되기보다는 잘 만들어진 팀에서 마음 놓고 슛을 뿌리는 고정된 슈터 역할이 딱이었다.

동양은 1쿼터와 마찬가지로 또 다시 일찍 팀 파울에 걸려 버렸고 이를 이용한 신기성의 패스가 빛을 발하며 공격을 원할하게 풀어나갔다. 이에 반해 동양은 골 밑으로 볼 자체가 투입이 어려워지면서 열세를 면치 못했다.

안 되겠다 싶었던 동양은 노련한 가드 이인규를 투입해서 반전을 꾀했다. 이인규를 활용한 작전은 어느 정도 먹혀 들어갔다. 이인규의 투입으로 동양은 서서히 팀 플레이가 살아났다. 이인규는 더불어 외곽 슛까지 터트려주며 동양 쪽으로 분위기를 몰고 갔다. 하지만 동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공 마무리 미숙과 그로인한 삼보의 역 속공에 쉬운 득점을 헌납했고 50 : 54,  4점 차까지 따라붙은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3쿼터: 후반 들어 삼보의 조직력이 본격적으로 좋아지기 시작했다. 동양은 여전히 루이스의 컨디션은 좋아 보였으나 패스플레이 자체가 안 되다 보니 공을 연결해주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이에 반해 삼보는 기존의 신기성에 식스맨 김승기까지 좋은 몸놀림을 보이며 김병철 등이 버틴 동양 가드진에게 한수 가르쳐주는 모습이었다. 삼보는 가드진의 맹활약으로 폭풍속공과 리듬 감 있는 템포공격을 교대로 선보이며 83 : 71로 여유 있게 점수차를 벌려나갔다.

4쿼터: 패넌트레이션 패스아웃이 좋아지고 포워드 박재일이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면서 동양의 기세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적극적 공격 리바운드 가세도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속공 미숙과 공격의 마무리가 안 되며 흐름을 가져오는 데는 실패한다. 자신들 쪽으로 분위기가 올 수도 있었지만 동양은 그 기세를 살리지 못했다.

삼보는 노련하게 위기를 맞으면서도 흔들리지 않았고 동양에서 지나치게 와센버그를 의식한 사이 김승기와 신기성 등이 외곽 슛을 터트리며 다시금 점수 차를 벌려나갔다. 그리고 사실상 그걸로 승부는 끝이었다. 동양은 위기에 몰리자 또다시 고질적인 외곽 슛 난사를 이어갔고 결국 점수 차를 좁히지 못한 채 비슷한 페이스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최종스코어 91 : 109으로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삼보-동양 <선수별 활약도>

승리팀 <삼보>

존 와센버그: 40득점 이상을 쏟아붓는 화력을 통해 맹활약을 펼쳤다. 와센버그는 미들 슛이나 외곽 슛이 안 좋고 공격루트가 단순하다는 약점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타팀의 수비수들이 뻔히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크지 않은 백인용병임에도 타 팀의 흑인 센터와도 몸싸움이 가능할 정도의 힘과 발군의 스피드는 동양 수비진을 와해시켜버렸다.

루이스는 힘에 밀리고 저머니는 스피드에 딸렸던지라 동양은 뻔히 알면서도 와센버그를 막아내지 못했다. 처음에는 다소 플레이가 불안정해 보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안정세를 찾아가더니 뛰어난 아이솔레이션 소화능력을 바탕으로 연이은 속공 마무리를 성공시키며 삼보의 공격을 주도했다. 더불어 지난 시즌보다 월등히 나아진 킥 아웃 패스와 번개같은 스틸능력은 적재적소에서 삼보의 힘이 되어 주었다.

모리스 조던: 그런 데로 무난한 경기력을 보였으나 여전히 많은 문제점을 남겼다. 장신임에도 느리지 않고 더불어 페이드 어웨이, 뱅크 슛, 훅 슛 등 다양한 공격루트를 보여주었고 자유투도 대단한 정확성을 보였다. 그러나 약한 체력으로 인해 후반으로 갈수록 그 활약도가 떨어졌다. 더불어 동양 정구근 한테도 힘겨워 할 정도의 나약한 몸싸움 능력은 분명한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파워는 어쩔 수 없지만 체력문제는 삼보 벤치의 머리를 아프게하는 요소임이 분명했다.

신기성: '일급 가드가 있는 팀과 없는 팀의 차이는 이런 것이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줬다. 기복 없는 게임 리딩은 물론 공격과 수비를 잘 이끌며 국가대표급 가드다운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가 있음으로해서 삼보는 강팀들도 껄끄러워하는 상대라는 공식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줬다는 평가다.

김승기: 비록 식스맨 이지만 김승기가 살아나면 삼보는 상당한 상승세를 탄다. 워낙에 주전위주로 경기를 풀어나가는 삼보에서 김승기 선수 같은 벤치멤버가 활약한다는 것은 공격루트의 다양성과 함께 공수에서 상당한 탄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날도 멋진 활약을 보여주며 공격과 수비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고비마다 3점과 미들 슛을 터트려 주었고 분위기가 동양 쪽으로 넘어간다 싶을 때는 번개같은 스틸로 맥을 끊어버렸다. 삼보의 공격 시 비하인드 백 패스를 바운드 패스로 와센버그에게 넘겨주며 공격을 성공시킨 장면은 이날 경기 최고의 명장면이었다.

양경민: 슈터답지 않게 들쭉날쭉한 슛감각이 단점으로 지적 받지만 그것만 빼면 참 좋은 선수다. 단순히 슛만 놓고 보면 양경민보다는 김병철이 한결 안정적이다. 양경민은 터지면 무섭지만 기복이 심한데 비해 김병철은 슛 감각 만큼은 비교적 꾸준하다. 하지만 다재다능함만 놓고 따지면 양경민이 김병철보다 훨씬 재주가 많다. 가드임에도 슛 외에 다른 부분에서 부족한 부분이 많은 김병철과 달리 포워드 양경민은 고른 부분에서 기량을 가져갈 수 있다.

대인마크 능력이 워낙 출중한지라 공격에서 안되면 수비에서 공헌할 수 있고 리바운드와 패스 능력도 평균 이상 급이다. 이날 경기에서도 득점은 10여점에 그쳤지만 리바운드 가세와 패스연결 그리고 수비를 통해 윤활유 역할을 잘해줬다.

패배팀 <동양>

마이클 루이스: 이날 동양 선수 중 가장 움직임이 좋았다. 명 수비수 양경민을 상대로 개인기의 우세를 앞세워 미들 라인에서의 자신의 공격력을 잘 살려나갔다. 동양 입장에서는 컨디션이 좋은 루이스에게 좀 더 볼을 많이 투입해줄 필요가 있었으나 김병철 등 가드진의 취약점으로 인해 장점을 살리는데 실패했다. 그와 트레이드되어 현대(현 KCC)로 간 데이먼 플린트와 비교해서 대등한 기량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시야가 넓지 못하다는 약점은 여전히 지적되고 있는 모습이다.

토시로 저머니: 와센버그가 작년보다 더 나아진 것처럼 저머니 또한 작년 기아에 있을 때보다 훨씬 좋아진 듯한 모습이다. 특히 약점으로 지적되었던 자유투가 상당히 좋아졌다. 그러나 센터로서 중량 감은 확실히 있지만 슛 기술이 다양하지 못해 골 밑 이외에서는 득점을 못해주고 더불어 승부처에서 헤매는 듯한 모습으로 인해 아쉬움을 더했다.

김병철: 슈터로서는 좋은 선수지만 가드로서는 아쉬운 타입이다. 이날 경기 역시 여전히 슛 감각은 좋았다. 그러나 팀 동료들과의 호흡을 고려하지 않은 독단적인 개인플레이는 가드로서 낙제점이었다. 가드임에도 시야가 좁은 편이다. 거듭된 포인트가드 포지션 전환 실패의 원인을 확연히 노출했다.

이인규: 그나마 포인트 가드가 열세인 동양에서 제일 믿음직한 노련한 가드다. 오픈찬스에서 한방을 터트려 줄 수 있는 외곽능력도 있고 게임운영도 나쁘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식스맨에 익숙한 선수인지라 컨디션을 오래 유지하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 이날 경기에서 그나마 동양이 삼보를 추격할 수 있었던 것은 이인규의 활약이 컷다. 골 밑의 빈 공간으로 파고들며 리버스 턴으로 삼보의 신기성을 제치고 레이업슛을 올려놓는 장면은 그의 가치를 증명하기에 충분해보였다.

전체적으로 동양은 매번 비슷하게 지적 당했던 패스플레이 부재가 패배의 원인으로 연결됐다. 패스가 제대로 되야 컨디션이 좋은 선수가 아이솔레이션을 펼치고 더불어 골 밑의 저머니에게 쉬운 공격찬스가 자주 갈텐데 그러한 플레이가 되지 않았다. 더불어 매끄럽지 못한 속공 연결은 손쉬운 득점찬스를 무산시키고 더불어 상대방에게 역으로 속공을 당하는 악순환을 되풀이시켰다.

속공이 쉽지 않으면 골드뱅크처럼 템포 바스켓 위주로 경기를 펼쳐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지적도 많다. 개인기가 좋은 선수들이 많으니 공격에서는 돌아가면서 아이솔레이션을 펼치고 수비에 비중을 두는 전 시즌 LG 세이커스의 스타일도 대안으로 제시되는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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