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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5·18 35주년 기념 행사는 둘로 나뉘어 치러졌다. 정부 주관 행사는 망월동 국립묘지에서, 유가족 등 5·18 관련 시민단체가 참여한 행사는 구 도청 앞에서 진행돼 씁쓸했다. 열흘 간의 행사가 1980년 5월 27일 새벽 계엄군에 진압되던 날을 기념하는 부활제를 마지막으로 지난 27일 끝났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당시 수많은 광주시민들은 잠을 못 이루면서 "광주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리를 도와주세요. 우리를 잊지 마세요"라는 애절한 여자 홍보원의 방송을 눈물을 흘리며 듣고 있었다. 이날 수많은 사망자를 내고 도청은 함락되었지만 전주에서는 새로운 항쟁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1980년 5월 27일 아침, 등교가 시작된 전주 신흥고에서 전교생이 참여한 최대 고등학생 시위가 일어났다. 이는 당시 광주 전남지역 밖에서 일어난 전국 최대의 시위라고 할 수 있었다. 당시 교사였던 나는 전주 신흥고등학교 데모 사건의 주모자로 체포됐다. 이후 계엄 포고령 위반으로 광주 상무대로 연행되어 군사재판을 받은 뒤 징역 1년 4개월을 살게 되었다.

이후 나는 끈질기게 법정소송을 진행했다. 1997년 재심무죄를 받고 마침내 2000년 행정소송에서도 승소하여 20년 만에 학교에 복직하며 원상회복을 이루어냈다. 그러는 사이 까마득하게 '그'를 잊고 있었다.

누나에게 보낸 편지 한 통 때문에... 경악스럽다

내가 김상회를 처음 만난 건 1980년 5·18 항쟁 관련 전주 신흥고 데모 주모자로 체포된 뒤 전주 35사단 헌병대 영창에 구속되어 고문 수사를 당하고 있을 때였다. 그도 역시 헌병대 영창에 구속되어 고문수사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전북도 경찰국 제2기동대 소속 전투경찰(계급: 일경)이었다. 그는 계엄포고령 위반에 더하여 무시무시한 반공법 위반으로 걸려들었다.

순하고 얌전하게 생긴 그가 갖고 있던 사연은 참으로 놀라웠다. 그는 강원도 강릉시 출신으로 강원대 2학년 재학 중 전경에 차출되어 전주에 배치되었다. 당시 5월의 봄에 전주에서도 학생시위가 크게 일어났다. 얼마 전까지 자기와 같은 학생들이었던 전북대·전주대 등 학생시위 진압에 동원되었다.

그러다가 5·17 비상계엄확대 이후 전북 익산의 7공수부대가 광주로 출동하여 광주학살의 선봉에 서 있음을 알게된 뒤 무척 괴로워했다고 한다. 신군부가 5월 21일 도청발포 등 광주학살을 철저히 보도통제하자 누나 김인순(강원도 양양 거주)에게 1980년 5월 22일 보낸 편지에 광주학살과 전북대생 시위와 관련하여 "지난 14일엔 이곳 전주에서도 굉장했었는데 우리 부대가 얼마나 살벌하게 죽여 놓았는지 문자 그대로 아비규환의 지옥이었다할까? 정말 처참하고 비극적인 광경이 벌어지고... 우리 자신들이 만들어 냈어"라고 적었다.

또 여동생 김내희에게 "북한 방송을 들으면 왜곡 과장된 사실도 있지만 사실적 근거가 있는 것이 많을 것이다"라는 내용이 적힌 편지를 보냈다. 이후 그는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시킨 혐의로 체포되어 들어왔다는 것이다.

나를 경악하게 한 것은, 아무리 비상계엄 하라고 해도 친남매끼리 보낸 편지 내용을 문제삼아 현역 전투경찰 신분인 그를 헌법 18조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인 "통신의 자유"를 완전히 무시하고 반공법으로 얽어맸다는 사실이다.

그는 1980년 8월 8일 전교사 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징역 1년에 자격정지 1년을 선고 받았다. 심지어 2심인 육군계엄고등군법회의에서는 변론의 기회도 안 주고 형을 확정했다. 형이 확정된 뒤 그는 경기도 광주시 육군교도소로 이감되어, 우리는 이후 만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35년이 흘렀다. 58년생으로 당시 22살이던 그도 이제 살아있다면 환갑에 가까운 나이가 되었을 텐데 과연 살았을까? 죽었을까?

35년이 지난 지금, 현재진행형인 물음

2014년 12월 31일, 임내현 의원이 국회에서 '국방부 과거사 진상조사위 보고서'를 발표하며 광주 상무대 영창과 광주교도소 등에 강제로 연행된 사람들 2212명의 명단을 공개했다. 당시 이중 611명이 보상을 못 받은 걸 확인하고 5·18피해자 (추가)보상신청법안을 만들었다. 이에 따라 2015년 1월부터 6월 30일까지 신청 받는 것을 연장하도록 했다.

이번 기회에 김상회 외 611명과 신흥고 박영화, 김인수, 김의신, 허천일 등 징계 피해 학생들 모두가 신청을 하였으면 한다. 나는 최근 그가 신청을 했는지 광주시청에 문의하였는데 21일 현재 아직 신청을 안 했다는 답을 들었다. 피해 당사자들은 보상신청은커녕 "광주"라는 단어를 아예 자신의 머릿속에서 송두리째 지워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이후 육군교도소에서 만기로 형기를 채웠을 것이고 강원도에서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삶을 살았을 것이라 생각하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래서 최근 강원도 언론계에 종사하는 지인에게 이런 사연을 전하면서 찾을 길이 없냐고 물었더니 "강원도에선 2015년 5월 18일은 그냥 월요일에 불과할 뿐이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홍세화씨가 쓴 글이 생각났다. 35년 전 5월 프랑스 공영 텔레비전은 열흘 동안 톱뉴스로 광주의 항쟁모습을 보여주었다. 신군부의 잔혹한 진압광경은 그곳의 시청자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광주사람들은 이교도들인가? 소수민족인가?" 35년이 지난 지금도 이 물음은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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