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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는 미로다. 일단 들어서면 입구가 출구 같고 출구가 입구 같다. 운하와 골목이 도시를 종횡무진 촘촘히 엮고 있다. 베니스 골목을 걷다보면 마치 저인망 그물에 걸린 물고기의 심정이 된다. 사람이 작심하고 만든 제주도의 어느 인공 미로공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자칫 방심하면 방향과 길을 잃기 십상이다. 초행의 이방인으로서 전혀 방심하지 않고 긴장하면서 정신을 차렸지만 여러 차례 길을 잃고 헤맸다.

첫날부터 배를 타고 리알토 선착장에서 내리면서 육지의 동서남북이 분간되지 않았다. 세계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이 사방팔방으로 뚫린 골목에서 쏟아져나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선착장에서 무사히 숙소에 당도하는 일은 어려운 시험문제를 푸는 기분이었다.

또 구글 지도를 믿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지도상으로 숙소 산타마리나 호텔은 리알토 다리에서 불과 200여m 거리에 있었다. 엎어지면 코가 닿을 만한 거리다. 비록 관광인파로 '도떼기' 야시장 같은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밤거리이지만 그 정도는 못 찾아갈까 싶었다. 그러나 그게 큰 착각이고 오산이라는 사실은 길을 찾는답시고 30분 이상 제자리만 실컷 맴돌고 난 다음 든 생각이다.

애타게 찾던 숙소는 좁은 골목길을 몇 구비나 돌고 돌아도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광장 구석에 숨어 있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전에 호텔 보이는 호텔 로비 밖으로 내몰았다. 그리고 난데없이 좁고 으슥한 골목으로 우리를 다시 끌고 갔다. 그러더니 아무런 표시도, 간판도 없는 오래되고 빛바랜 어느 건물 앞에 멈춰섰다. 호텔의 별채인 셈이다.

보안카드로 현관을 열고 또 두 곳의 문을 더 통과하자 2층에 방이 몇 개 있었다. 아무래도 정식허가를 받지 않고 영업을 하는 듯 현관의 간판도, 방마다 식별번호도 없는 그 건물이 낯선 베니스에서 이틀 밤을 묵을 숙소라고 생각하니 불안감이 엄습했다.

"혹 마피아가 경영하는 호텔은 아닌가."

나중에 알고 보니 이런 식으로 기존 주택건물을 개조해 호텔영업을 하는 곳이 베니스에는 적지 않다고 한다.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때문이다.

‘젠트리피케이션’ 영향으로 주택을 개조한 호텔. 2층 창문에서 조망하는 좁고 긴 골목
 ‘젠트리피케이션’ 영향으로 주택을 개조한 호텔. 2층 창문에서 조망하는 좁고 긴 골목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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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의 골목은 젠트리피케이션이 장악했다

지금 베니스는 여러 가지로 위기상황에 직면해 있다는 진단이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섬의 침강도 심각하지만 경기도 엉망이다. 당일치기 관광객이 많아지면서 식당이나 숙박업소에서 돈을 당최 쓰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리알토 다리 근처에 몰려 있는 이탈리안 식당마다 은근히 호객행위도 심하고 선착장에 유난히 놀고 있는 곤돌라도 많이 목격했다. 

심지어 한 인구학자는 2030년경이면 상주인구는 전혀 없이 관광객만 들락거리는 유원지 같은 도시가 되리라는 비극적 전망까지 내놓았다. 이렇게 원주민이 밀려나고 도심 공동화가 심화되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날로 심화되고 있다.

젠트리피케이션은 '도시의 빈곤 정체 지역을 상업자본이 침투해 잠식하는 현상'을 뜻한다. 도시에 자본이 몰리면 결국 임대료나 부동산값이 올라 원주민들은 더 살지 못하고 밀려나게 되는 것이다. 혹여 '신사화'로 직역되는 젠트리피케이션의 어원적 의미만 생각하면 안 된다.

겉으로는 오래되고 노후한 주거지가 '신사'처럼 멋지고 세련된 상업지구로 교체되는 바람직한 현상처럼 보인다. 하지만 원주민들이나 세입자들을 쫓아내는 도시개발로 인한 부작용과 폐해가 젠트리피케이션 문제의 본질이고 진실이다.

내가 묵은 은밀하고 수상한 호텔 별채처럼 베니스에 불어닥친 젠트리피케이션 때문에 부동산을 소유한 자산가들은 아파트 등 일반주민들의 임대용 주거건물을 속속 점거하고 있다. 외국인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상업용 숙박업소로 변경하기 위해서다. 베니스의 마을이, 골목이, 주민이 자본에 밀려 점점 난민, 유민처럼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베니스에서 역사적·예술적으로 중요한 대저택과 고택 450여 채도 대부분 사무실, 상가, 호텔로 개조된 상태라고 한다. 그 옛날 석호에 수많은 말뚝을 박아 돌받침대 위에 건축한 것인데 당초 소유 가문의 수중에 남은 건 별로 없을 지경이다. 베니스의 위대한 생활문화유산이 자산가들, 장사꾼들의 부동산 투기 대상으로, 상품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을 앓고 있는 베니스의 골목골목을 돌아보면서 전주 한옥마을, 서울의 북촌, 서촌 등이 저절로 떠올랐다. 최근 도심재생사업에 따른 관광명소로 부상하면서 원주민의 주거지역에서 외부 전문 장사꾼들이 지배하는 상업지역으로 급속히 변질되고 있다. 역시 문화와 생활공동체는 사라지고 상품과 전문업자만 난무하는 공간으로 변질되고 있다.

도심재생 사업이든, 국토개조 토건사업이든 평가기준은 이 한 가지면 충분할 것이다. 원주민들이 원하는 것이냐, 그리고 원주민에게 이로운 것이냐. 원주민도 살 수 없어 떠나는 마을이나 도시에는 관광객도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찾아와도 베니스처럼 당일치기 뜨내기 관광객만 몰릴 것이다. 그런 경박한 관광객이 마을과 도시에 도움이 될 리 없다. 그런 마을과 도시에 지속가능한 미래가 있을 리 없다.  

관광객들이 몰려 밤에도 정체되는 리알토다리 입구 골목
 관광객들이 몰려 밤에도 정체되는 리알토다리 입구 골목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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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에서 '다 같이 돌자, 동네 한 바퀴' 놀이를 

베니스의 도로에는 자동차가 다니지 않는다. 베니스에서는 배를 타지 않을 거면 걸어다녀야 한다. 어디든 걷기에 적당한 거리고 넓이다. 인간적인 규모다. 그래서 골목마다 도보여행자로 넘치고. 좁은 골목과 보도는 수시로 인파로 정체된다. 어깨를 부딪힐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좀처럼 짜증은 나지 않는다. 피차 급할 게 없어서 그럴 것이다. 그게 또 베니스라는 도시를 찾아와 짧은 일상이나마 체험해보는 재미와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날은 작심하고 이른 아침부터 베니스를 한 바퀴 돌아보는 도보순례를 나섰다. 목적지와 행선지는 골목의 방향이 바뀌는 어귀마다 건물 벽에 붙여놓은 노란 이정표를 잘 보고 따라 가면 된다. 행로는 산 마르코(San Marco) 광장과 성당, 두칼레 궁, 탄식의 다리를 거쳐 유럽 최초의 카페 플로리안(Florian)을 도는 코스로 잡았다.

하나하나 이름을 기억하기 어려운 수백 개의 광장(piazza)와 교회가 골목이 끝나는 지점마다 어김없이 출몰했다. 지친 길손들은 돌계단이나 벤치에 앉아 잠시 쉬어가라는 신호로 감지됐다. 수천 곳의 피자가게, 파스타 레스토랑, 젤라또 아이스크림 가게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풍미와 향기를 뿜어내고 있다. 다만 기대가 지나쳐서 먹어보니 기대했던 놀라운 맛은 나지 않았다.

거리마다, 골목마다 축제 소품으로 쓰이는 가면을 주로 파는 기념품 가게, 좌판이 즐비했다. 베니스 시민들은 운하와 골목과 가면으로 먹고사는 듯했다. 거리마다, 가게마다 마치 생생한 공연을 구경하듯 화려하고 환상적인 기기묘묘한 가면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로마처럼 주로 유색인종들이 독점영업을 하는 듯한 '셀카봉' 행상도 어김없이 길목마다 진을 치고 있다, 그럴 때마다 혼자 중얼거렸다.

"만일 이탈리아로 망명한다면 셀카봉 행상을 하면 되겠네. 굶어죽지는 않겠네."

산 마르코 광장(Piazza San Marco)은 서울로 치면 광화문 광장이나 시청 앞 광장에 해당된다. 예로부터 베니스의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중심지였다. 베니스 지역생활 공동체의 구심이었다. 베니스 사람들은 굳이 산 마르코를 앞에 붙이지 않고 그냥 '광장(la Piazza)'이라고만 부른다. 그래도 다 알아듣는다. 다른 광장과는 격이나 차원이 다른 대표적인 광장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산 마르코 광장만큼 산 마르코 대성당도 유명하다. 중앙 정문의 거대한 아치들, 각양각색의 대리석 장식들, 로마네스크 양식의 조각품들이 현란하다. 15세기 말에 건축된 메르체리아로 불리는 시계탑도 명물이다. 베니스의 상인들이 아라비아와 무역을 하면서 익힌 아라비아 숫자로 시계를 만들었다는 사연이 전해진다. 높이 99m인 캠퍼닐리 종루는 이집트의 오벨리스크 같기도 하고 거대한 솟대 같기도 하다.

광장의 3면에는 아치가 이어진 회랑이 줄지어 서 있다. 회랑마다 아케이드 상가가 들어서 있다. 1720년에 개업한 유럽 최초의 카페 플로리안(Florian)이 아직 영업 중이다. 나폴레옹, 괴테, 바이런, 카사노바 등이 단골이었다고 한다. 카페 안에는 관광객들이 진을 치고 있어 빈 자리가 보이지 않는다. 자릿세까지 포함해 차 한 잔 값이 식사 한 끼 값 정도 한다는 정보를 보고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가난한 관광객들은 밖에서 기웃거리는 것만으로도 구경거리가 된다.

산마르코 광장에서 벌어진 가면의상경연대회 축제에 참가한 관광객
 산마르코 광장에서 벌어진 가면의상경연대회 축제에 참가한 관광객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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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 몰려든 생계형 난민들... 양육강식의 정글화

요즘 '복면가왕'이라는 TV프로가 화제다. 가면을 쓰면 누가 누구인지 편견과 선입견이 원천적으로 제거되니 오로지 노래 실력만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예능프로그램이지만 공정하고 합리적인 경쟁과 경연의 모델이다. 필시 피디나 작가는 베니스에서 영감과 아이디어를 얻었을 게 틀림없다.

마침 베니스의 골목과 광장은 온통 각양각색의 휘황찬란한 가면의 물결이었다. 가면·의상경연대회 축제가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13세기 중반에 시작된 베니스 가면 축제(Carne-vale di Venezia)는 보통 1월 말에서 2월 사이에 열린다. 그때 베니스에 오는 사람들은 가면을 하나씩 쓰고 내가 아닌 남이 되는 체험을 한다.

광대 같은, 또는 황제 같은 울긋불긋하고 번쩍거리는 복장을 하고 베니스를 온통 누비고 다닌다. 축제장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베니스 도시 전체가 축제장이고 공연장이 된다. 세계 각국에서 몰려온 관광객들이 입고 다니는 형형색색의 가면과 의상은 베니스의 현란하고 고풍스런 건축물과도 잘 조화를 이룬다.

산 마르코 광장 주변만 해도 이탈리아·아랍·비잔틴·고딕·르네상스·바로크 양식 등을 한눈에 파노라마처럼 조망할 수 있다. 동양과 서양이, 과거와 현재가 베니스라는 도시를 통해 한 지점에서 통합되고 통일되는 느낌이 든다.

오늘날 세계적 관광명소 베니스조차 피해가지 못하는 젠트리피케이션은 현대 도시를 위협하는 새로운 문제다. 도시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하다가 오히려 또 다른 문제에 부닥친 셈이다. 도시계획자나 도시행정가, 무엇보다 도시주민들은 곤혹스럽다. 그것도 빈곤 계층이 주로 모여사는 취약, 정체 지역에서 벌어지는 안타까운 현상이라 더욱 그렇다.

저렴한 임대료를 찾는 가난한 문화예술인들이 들어와 문화적, 예술적으로 지역을 되살린 게 잘못인가. 외부인들이 즐겨 찾을 만한 관광의 명소로 재탄생시킨 게 잘못인가. 그게 아닐 것이다. 자본이 넘치는 자산가들이 가난한 문화예술인이 생활하고 작업하는 최소한 공간마저 빼앗는 약육강식의 쟁탈전이 문제일 것이다. 그걸 방지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도시행정이라는 비정한 시스템이 원인일 것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도시문제의 본질은 단순하다. 너무 협소한 공간, 너무 부족한 자원을 가진 도시에 너무 많은 외부난민들이 몰려 살기 때문이다. 서로 다투고 빼앗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무한경쟁, 약육강식의 정글화 현상 때문이다.

해법은 간단하다. 도시에 먹고살려고 몰려든 생계형 난민들을 저마다의 정처를 찾아 농촌으로, 지역으로 하방시켜야 한다. 그게 도시 문제, 농촌과 지역의 문제, 결국 국가의 복잡다단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푸는 거의 유일한 해법일 것이다. 그래서 서울특별시의 주요 시정은 서울시민들의 자발적 하방을 돕는 데 집중할 필요가 있다. 간곡히 제안한다.  

나폴레옹, 괴테도 단골이었다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 ‘플로리안’
 나폴레옹, 괴테도 단골이었다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 ‘플로리안’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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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ㅣ최규화 기자



태그:#베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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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연구소(Commune Lab) 소장, 詩人(한국작가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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