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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대 사학으로 비리가 끊이지 않아 학내 구성원과 갈등을 지속했던 선인학원은 1994년 시·공립화 됐다. 선인학원이 한때 거느린 학교는 14개, 그곳에 다닌 학생이 3만6400여 명, 교직원이 1만4000여 명에 달했다.

1980~1990년대 인천은 '노동자의 도시'로 불렸다. 전국에서 일자리를 찾아 몰려든 사람이 많았던 인천엔 맞벌이 부부가 대부분이었다. 이런 맞벌이 부부 자녀들이 다닌 학교의 상당수가 선인학원 수중에 있었다. 이로 인해 인천 교육은 추락했다. 선인학원이 지금까지 그대로 존치됐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 기자 말

학내 분규를 이유로 내려진 국내 교육사상 초유의 휴교령은 선인학원 설립자 백인엽을 학원에서 몰아내는 듯했다. 그를 위한 대학 구성원들의 출혈은 너무 컸다. 1986년 선인학원 사태는 학생 5명 구속, 교수 4명 징계 회부, 학생 10명 무기정학을 초래했다. 학생 수천 명이 1개월 넘게 수업을 듣지 못해 전교생 유급사태도 우려됐다.

문교부는 휴교 조치 40일 만인 12월 10일 인천대와 인천전문대에 학장을 파견해 사태 수습에 나섰다. 그리고 53일 만에 휴교령을 해제하고 수업을 정상화했다.

그런데 인천전문대 교수들이 '문교부의 조치는 선인학원 정상화를 위한 임시방편일 뿐'이라며 근본적 문제 해결을 촉구하고 나섰다. 교수들은 <조선일보> 1986년 12월 14일자에 '선인학원 사태 수습에 대한 우리의 의문점'이란 제목의 광고를 실었다.

교수와 직원 216명 중 187명과 동문회가 광고 게재를 주도했는데, '백인엽과 선인학원에 대한 문교부의 조치가 문제의 핵심을 벗어났다'고 지적했다. 동시에 '선인학원 사태 정상화를 위한 탄원서'를 작성해 관계기관에 제출했다. 교수들은 설립자 백인엽의 완전한 퇴진 등을 요구했다.

관선이사 개혁조치로 종합대 승격

인천대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책상을 본관 앞에 내놓았다.
 인천대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책상을 본관 앞에 내놓았다.
ⓒ 인천대학교 총동문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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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교부는 1986년 12월 31일 이호 선인학원 이사장을 비롯해 이사를 전원 사퇴시키고, 문교부 추천 4인과 백인엽 추천 4인으로 새롭게 이사회를 구성했다.

새롭게 임명된 박재규 인천대 학장과 장석우 교무처장 등은 인천대의 산적한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특히 이 기간에 젊은 교수 30여 명을 뽑았는데, 이들은 1992년 선인학원 민주화투쟁에 주도적 역할을 하는 인적 토대가 된다.

박 학장은 1986년 사태로 구속된 학생회 간부들이 정상적으로 졸업할 수 있게 조치했고, 유기 또는 무기정학을 받은 학생 30여 명의 징계도 해제했다. 또한 대학을 원칙대로 운영해 인천대가 종합대학교 승격하는 주춧돌을 놓았다. 그는 1988~1992년 시행을 목표로 한 '인천대 장기 종합발전계획'을 수립해 이를 의욕적으로 이행했다. 결국 인천대는 1989년 3월 종합대학으로 승격됐다.

1986년 사태 이후 학원이 빠르게 안정되고 발전 전망을 세울 수 있었던 데는 선인학원 이사회의 힘이 컸다.

신임 이사장인 신능순 전 경기도 교육감은 얽히고설킨 학원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백인엽의 추천으로 이사가 됐지만, 만신창이가 된 인천대와 선인학원 정상화에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다. 일선 학교들이 상당한 재정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교육에 투자하지 않는 것을 질책하면서 교육환경 개선에 노력했다. 예산 운영과 인사행정 전반에 걸쳐 많은 자율권 일선 학교에 줬다. 하지만 백인엽을 추종한 재단 사무국은 여러 핑계를 대며 신 이사장을 괴롭혔다.

관선이사회 무력화한 백인엽

신 이사장을 중심으로 학원과 학교들이 제대로 굴러가자, 백인엽은 학생들을 동원해 신 이사장의 지도력을 흔들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 '호교회' 회원들의 활동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재단 운영과 관련한 정보가 필요했던 총학생회는 호교회 회원(이며 학생회간부 활동한 이들)이 주는 정보를 바탕으로 잘못된 정세 판단에 근거해 재단 정상화 싸움을 벌이는 우를 범한 것이다.

총학생회 간부 등은 처음엔 중앙도서관 신축, UTM관 신축 등 교육환경 개선을 구체적으로 요구했다. 신 이사장은 학생들의 요구가 타당성이 있다고 보고 적극 수용했다. 그러자 학생들은 경인전철 제물포역 앞에서 인천대로 직결하는 정문을 만들어 달라고 주장했다. 이어 기숙사 건축도 요구했다. 신 이사장은 이러한 요구도 장기 종합발전계획(1988~92년)에 포함했다. 이 계획은 1988년 2월 29일 선인학원 이사회에 공식 보고됐다.

그런데 1988년 1학기를 맞은 총학생회 쪽은 "신 이사장이 약속한 장기 발전계획을 모두 실행하려면 재원 70억~80억 원이 필요한데 이를 어떻게 충당하냐?"며 '타 학원 이사장은 돈을 내놓는데, 한 푼도 내지 않는다'는 논리로 이사장을 공격했다.

4월엔 학생들이 공청회를 열어 신 이사장을 공개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특히 학생회 간부들은 신 이사장 집을 찾아가 '발전기금 내놓아라', '급여를 받으며 이사장 하냐. 물러가라'고 하며 수모를 줬다.

결국 신 이사장은 5월 10일 열린 8차 이사회에서 인천대 2공학관과 중앙도서관 건립 안을 의결하고 다음 날 신병 치료를 위해 입원했다. 그리고 20일에 열린 이사회에서 사임서를 제출했다.

인천대학교 학생들이 학내 집회 후 선인학원을 행진하고 있다.
 인천대학교 학생들이 학내 집회 후 선인학원을 행진하고 있다.
ⓒ 인천대학교 총동문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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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학원에 다시 진입한 백인엽

신 이사장이 물러나자, 백인엽의 심복 심유창이 이사장으로 들어왔다. 신 전 이사장이 매일같이 출근해 의욕적인 활동을 벌인 것과 다르게 심 이사장은 월 1회 정도 재단을 방문했다. 그는 '선인학원 서울 연락사무소 설치'를 이사회에 요구해 관철시켰다. 그는 이 사무소에 '운봉연구소'를 설치했다. 운봉은 백인엽의 형 '백선엽'의 호다.

운봉연구소는 백인엽의 개인 사무실이나 마찬가지였다. 학생들의 처절한 투쟁으로 몰아낸 지 1년도 안 돼, 선인학원 운영에 다시 개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심 이사장은 본인도 참석한 이사회에서 가결한 2공학관과 중앙도서관 건립을 뚜렷한 이유 없이 치일피일 미뤘다. 인천대 장기 종합발전계획이 사실상 무산된 것이다. 그리고 이 계획 이행에 필요한 재원 80억 원이 백인엽에게 넘어가도록 심 이사장은 조치했다.

백인엽은 자신의 심복 심유창이 이사장에 취임하자, 1988년 12월 29일 자신과 자신의 자식들을 원고로 해 '1981년 선인재단에 기증한 돈과 부동산은 강박에 의해 뺏긴 것이므로 반환해 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선인학원 이사회는 처음엔 '강박에 의해 받은 일이 없고, 자의에 의한 결정이고, 기증 사실이 참작돼 2심에서 집행유예로 석방됐다'며 반환 의무가 없다는 취지로 백씨와 맞섰다. 하지만 얼마 후엔 "백씨 쪽에 질 것이 분명하므로 더 큰 손해를 보기 전에 협상해 반환해주자"고 의결했다. 결국 그해 8월 16일 쌍방은 화해했고, 선인재단은 78억 원을 백인엽에게 지급하기로 합의했다. 이 합의는 1992년 선인학원 민주화투쟁의 단초가 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사인천(isisa.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선인학원, #사학비리, #백인엽, #관선이사, #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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