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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시스템과 접속이 단절된 삶의 단면을 본다.
▲ 인사동 사회시스템과 접속이 단절된 삶의 단면을 본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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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절, 모든 것들로부터 단절된 삶의 단편을 본다.

가족들은 물론이고 이 사회로부터 단절된 삶의 단편 뒤에 마치 접속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다 해줄 것 같은 광고판이 그가 앉은 자리를 더 슬프게 한다.

이른바 유비쿼터스 세상, 접속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 모든 것들로부터 차단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이들이 있다. 자의적인 선택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들은 경쟁에서 낙오한 자들이다. 혹자는, 경쟁사회에서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과연 그것은 공정한 경쟁이었는지 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SNS시대에 자기의 주장을 알리기 위해 온 몸을 던지는 모습은 점점 보기 어려워질 것 같다.
▲ 자기주장 SNS시대에 자기의 주장을 알리기 위해 온 몸을 던지는 모습은 점점 보기 어려워질 것 같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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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현은 세상 사람이 성현이 되길 원할 뿐이다.
도토리만 한 명예나 탐욕으로 모은 재물을 바치라고 하지 않는다.
자신의 만족을 위해 부와 명예를 탐냈을 뿐 누구를 위해서라고 거짓말을 할 것인가.

무엇을 주장하기 위한 것인지, 어떤 종교적인 신념에서 저렇게 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이 역시도 자신의 주장을 이 세상의 흐름을 따라 전하지 못하는 단절됨에서 온 것은 아닐까?

뒷모습은 정직하다고 한다. 우리가 볼 수 없고, 치장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SNS세상은 온갖 치장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 뒷모습 뒷모습은 정직하다고 한다. 우리가 볼 수 없고, 치장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SNS세상은 온갖 치장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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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트루니에는 <뒤쪽이 진실이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남자든 여자든 사람은 자신의 얼굴로 표정을 짓고 손짓을 하고 몸짓과 발걸음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모든 것이 다 정면에 나타나 있다. 그렇다면 그 이면은? 뒤쪽은? 등 뒤는?
등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 뒤쪽이 진실이다!

인사동 골목, 머리에 쟁반을 이고가는 여인의 모습을 우리는 얼마나 더 볼 수 있을 것인가?
▲ 뒷모습 인사동 골목, 머리에 쟁반을 이고가는 여인의 모습을 우리는 얼마나 더 볼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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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만에 머리에 쟁반을 이고가는 모습을 본다.
어릴 적에만 해도 흔하디 흔한 모습이었는데, 이젠 그 모습조차도 보기 쉽지 않다.

현재는 과거와 이어져 있지만, 끊임없이 현재는 과거를 단절시키고 있다. 온갖 편리함으로 중무장한 현대인들은 이제 소유한 것의 노예가 되어버렸다. 소유의 노예가 됨으로서 자유를 느끼는 아이러니한 삶, 소유한 것을 유지하기 위해 노예가 되는 삶을 기꺼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의 공존,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과거와 현재가 혼재되어 있는 것은 아닐가 싶다.
▲ 뒷모습 과거와 현재의 공존,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과거와 현재가 혼재되어 있는 것은 아닐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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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사진을 담을 때 뒷모습엔 초연하다.
자신이 볼 수 없는 뒷모습이 궁금할 이유도 없을지 모르겠지만, 저마다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허긴, 보이는 정면도 제대로 볼 수 없는데 보이지 않는 뒷모습까지 보라고 하는 것은 또 하나의 강요일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정면과 뒷면의 단절이라는 점이다. 아직 사진은 정면과 뒷면 모두를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혹, 내가 보지 못하는,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뒷모습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진다고 삶에서 뒤쳐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들은 신명나게 풍악을 울리고 있지만, 화면 밖에는 자식을 잃고 통곡하는 세월호 유족들이 있다. 단절된 세상이다.
▲ 광화문 그들은 신명나게 풍악을 울리고 있지만, 화면 밖에는 자식을 잃고 통곡하는 세월호 유족들이 있다. 단절된 세상이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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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떼의 무리들이 광화문 광장에서 관광객들에게 한국문화를 알리고 있다.
신명난 모습들, 그러나 그 뒤편, 사진 너머에는 세월호 가족들의 절규가 있으며, 서로가 서로를 애써 외면하고 있다. 그래서 또한 단절이다.

어느 누가 선하고 악한 것은 아니다.
그저 자기의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국가는 그저 자기의 일을 함에 있어 부끄럽지 않도록 해줘야 할 의무가 있다. 그것을 요구할 것이 국민의 권리고, 그것을 지켜줄 수 있을 때에만 비로소 국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와 현재의 만남일까, 아니면 과거를 치장한 현재일까?
▲ 과거와 현재 과거와 현재의 만남일까, 아니면 과거를 치장한 현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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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다문 표정에서 뭔가를 읽고 싶었다.
그러나 읽어낼 재간이 없었다. 그를 알지 못하므로, 무슨 연유와 무슨 인연으로 연결되어 그 일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으므로 읽어낼 재간이 없었다.

단지, 그와 나는 서로를 모른 채 그냥 그렇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연결은 단절이 되어도 아무런 아픔도 없는 것이므로 엄밀하게 말하면 서로 타자로서 단절되어 있는 것이다.

강원도 갑천 하대리 물골의 겨울, 외딴집에 할머니 홀로 살고 있다. 세상과 단절된 곳이다.
▲ 물골 강원도 갑천 하대리 물골의 겨울, 외딴집에 할머니 홀로 살고 있다. 세상과 단절된 곳이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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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봄이 아닌 계절에 강원도 갑천 물골을 찾았다.
할머니는 오로지 텔레비전과 전화에 의존해서 세상과 소통하고 있으며, 간혹 이곳을 찾는 이들을 통해서만 세상 소식을 접한다. 그것이 세상과 연결되어 있는 증거일까? 아니면, 할머니의 삶과는 단절된 세상에 대한 증거일까?

홀로 사시는 할머니에게 들려오는 수많은 뉴스와 드라마 세상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늘 그렇게 그것들에 의존하며 세상이 일원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단절 속에 연결되어 있음이다.

인사동, 옛날엔 붓으로 써내려갔지만 이젠 손가락으로 터치하며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 붓 인사동, 옛날엔 붓으로 써내려갔지만 이젠 손가락으로 터치하며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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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빨라졌다.
붓으로 서간을 보내던 시대도 지났고, 편지로 소식을 전하던 시대도 지났다. 즉각적으로 응답하고 반응하는 SNS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잠시라도 접속되지 않으면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빠르고 즉각적이다.
그래서 진중하지 못하고, 쉽게 만나고 헤어지고 오해하여 서로 고립되어 간다.

인류 최고의 발명품 자전거는 가고, 스마트폰이 대세다. 과연 우리는 스마트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 자전거와 스마트폰 인류 최고의 발명품 자전거는 가고, 스마트폰이 대세다. 과연 우리는 스마트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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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접속의 세상, SNS 스마트한 유비쿼터스 세상을 향해가는 우리에게 묻고 싶다.
그래서 우리는 더 사람다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더 스마트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를.

인류가 발명한 것 중 최고의 발명품 중 하나는 자전거라고 한다.
오로지 인간의 동력만을 이용해서도 움직일 수 있는 기계, 그러나 이젠 스마트폰에 자리를 내줘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스마트폰은 우리가 대면하던 모든 것들에서 우리의 시선을 빼앗아가 버렸다. 그것에 우리의 시선을 빼앗기고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우리의 삶과 유리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태그:#SNS, #유비쿼터스, #스마트폰, #접속, #단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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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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