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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서울대마저 예능에 '접수'됐다. KBS 인기 예능 프로그램인 <1박 2일>이 서울대 교문을 열어젖힌 것이다. '개교 이래 최초'라고 한다. 뉴스나 다큐멘터리마저 예능이 돼버린 시대에 새삼스러울 건 없지만, 그곳이 다름 아닌 '서울대'이기에 느끼는 착잡함이다. 이 나라 최고의 지성들이 모인다는 학벌의 정점 아닌가. 누가 교사 아니랄까 봐, 지나치게 내가 '꼰대스러운' 걸까.

가히 서울대의 저력은 예능에서도 무서웠다. 지난 25일 시청률 조사 기관인 닐슨 코리아의 집계에 따르면, 지상파 3사의 주말 예능 프로그램 전체 시청률에서 <1박 2일> 서울대 방문 편이 압도적인 차이로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기존 <1박 2일>의 브랜드 가치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그 무엇이든 서울대만 만나면 가공할 위력을 발휘하게 돼 있다.

<1박 2일>의 서울대 방문, 불편했던 이유

<1박 2일> 서울특별시 특집 화면 갈무리
 <1박 2일> 서울특별시 특집 화면 갈무리
ⓒ KBS <1박 2일>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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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특성 상 사전에 조율되고 촬영 후 편집된 것일 수도 있지만, TV 화면에 비친 서울대생들의 반응은 호들갑스러울 정도로 뜨거웠다. 6명의 연예인이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가는 곳마다 발 디딜 틈조차 없을 만큼 학생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인증 샷'이라도 남기려는 듯 그들의 손에 들린 수십 개의 스마트폰이 연신 플래시를 터뜨렸다.

신상 공개를 꺼려 얼굴에 모자이크 처리를 요청하는 이들이 더러 있을 법도 하건만, 남학생과 여학생, 선·후배 가릴 것 없이 들뜬 표정이었다. 특히 대형 사진까지 내보이며 미모의 여대생을 수소문하거나 1박 룸메이트로 훤칠한 남학생을 물어 찾는 설정에서는 어째 '종편스러움'마저 느꼈다.

배움을 체험하기 위해 서울대를 간다는 방송 콘셉트에도 사실상 '엄친아'와 '엄친딸'만 골라 TV 화면을 채웠다. 수능 만점자가 드물지 않고, 연예인 뺨치는 외모에다 큰 키에 근육질인 서울대생들이 가득하다. 보통의 아이들이라면 꿈도 꾸지 못할 '스펙'들이 그들에게는 평범해 보일 정도다. 방송 직후 높은 시청률만큼 인터넷에서는 '서울대 멋있고 부럽다'라거나 '서울대 대박'이라는 반응이 쏟아졌다.

자연스럽게 1996년의 서울대를 떠올렸다. 개교 50주년 기념 행사로 기획됐던, 당시 <1박 2일> 만큼 인기를 끌었던 KBS의 <열린 음악회> 서울대 편 기획을 두고 서울대는 거센 찬반 논란에 휘말렸다. 국립대학이니 만큼 캠퍼스를 개방해 국민의 축제로 꾸려져야 한다는 취지였지만, 당시에는 대중 음악이 울려 퍼지면 면학 분위기가 흐트러질 수 있다며 우려하는 이가 적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그들은 굳이 행사를 열려면 대중 가요의 비중을 줄이고 대신 클래식 음악을 절반 이상 편성해 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그들의 대중 가요에 대한 편견에는 결코 동의하지 못하지만, 지상파 방송이 학문이 아닌 목적으로 교문을 넘어서는 것에 대해 나름의 문제 의식이 있었고 활발한 논쟁이 벌어졌던 것이다. '셀카'에 여념 없는 지금에 견주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듣자하니 학교 홍보를 위해서 방송을 교내로 불러들이려는 일반 대학들의 노력이 필사적이라고 한다. 입시 철이면 연례 행사처럼 고등학교 교무실을 찾아 '영업'을 하는 대학 교수들이 더 이상 낯설지 않은 현실에서, 지상파 방송에 출연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광고는 없다. 하물며 '1박 2일'과 같은 인기 예능 프로그램임에서랴.

세계 최고의 대학 진학률도 세계 최저의 출산율 앞에서는 맥을 못 추게 됐다. 대학 입학생보다 고등학교 졸업생 수가 더 많은 현실이다. 대학의 '생존'이 걸린 마당에 '학문의 전당' 운운하는 건 사치일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에서 대학이 '갑질'해대던 시절은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서울대는 예외다. 우리나라에서 홍보가 전혀 필요 없는 유일한 대학이니까.

엊그제 몇 해 전 서울대에 진학한 제자가 카톡으로 <1박 2일> 인증 샷을 찍어 보냈다. 6명의 멤버 중 한 연예인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사진이었다. 단 둘이 찍은 것도 아니고, 여러 사람에 둘러싸인 연예인의 얼굴이 자신의 모습 뒤로 스치듯 담긴 것에 불과한데도 그는 마냥 설레했다. 대학 생활 중 가장 재미있는 추억으로 기억될 거란다.

그런 모습이 조금은 불편했다. 서울대생이라고 뭐 특별할 건 없다 해도, 학창 시절 교사와 또래 친구들로부터 군계일학으로 두루 주목 받던 그였다. 최고의 학부에 다니는 대학생으로서 '피 끓는 청년'으로 살아달라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서울대가 예능 프로그램에 빗장을 열었을 때 나타날 여러 문제점에 대한 고민 정도는 기대했다.

그는 서울대생이라는 딱딱한 이미지를 다소 부드럽게 해주지 않겠느냐며 기대하는 눈치였다. 친구들도 이런 기회가 자주 있었으면 좋겠다며 기꺼워하는 분위기였단다.

그와의 카톡 논쟁이 시작됐다. 우선, 우리 교육의 고질적인 병폐의 뿌리라 할 수 있는 학벌 구조를 부추기거나 당연시 여기는 부작용이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 세기 가까이 온존한 학벌 문제를 고작 두 시간짜리 예능 프로그램 하나에 책임을 씌울 수 없다고 맞섰다. 그러면서 그건 더 이상 학교가 어찌 손써볼 수 없는 문제라며 사회 구조 전체를 봐야한다고 말했다.

'서울대가 별 거냐' 그의 답과 다른 시청자의 반응

"어차피 예능 프로그램은 팍팍한 현실에 대리 만족을 주려는 꼭지인데, 그저 웃자고 하는 일에 죽자고 달려들 필요는 없다고 봐요. 졸업 후에도 취직 못해 도서관을 전전하는 서울대생들도 부지기수지만, 그렇다고 그걸 뉴스도 아닌 예능에서 보여줄 수는 없잖아요. TV 앞에서 한 번 웃고 즐기면 그 걸로 된 거죠. 서울대가 뭐 별 거예요?"

그의 '쿨'한 대응과는 달리, <1박 2일> 서울대 방문 편을 바라보는 시선은 복잡하다. 예능 프로그램이 상당 부분 조작된 거짓이라는 걸 모르지 않으면서도, '서울대'라는 이름에 의해 거짓이 가려지고 신뢰를 얻게 된다. 웃자고 만든 예능에 사회적 역할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예능에 '서울대'가 결합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적어도 대중은 그렇게 인식한다.

그는 과거에도 몇몇 대학이 <1박 2일>의 촬영장으로 쓰인 적이 있다며,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고 반론했다. 그러나 서울대와는 그 의미가 확연하게 다르다. '과잠(학과 점퍼)'을 입은 6명의 멤버들이 일일 학생증을 받아들고 설레는 모습과, 서울대생들과 난해한 강의를 함께 듣는 장면은 대놓고 서울대 기득권을 인정하자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다. 서울대 앞에선 '다 꿇어'하는 메시지와 무엇이 다른가.

그걸 본 고등학생들의 반응은 어떨까. 주말 저녁 월요일 등교 준비를 하면서 꼭 챙겨 본다는 한 아이는 자신은 꿈도 꾸지 못할 수능 만점자가 길가의 돌멩이 마냥 많은 게 너무 신기했다고 했다. 다른 한 아이는 '서울대 얼짱'을 보며 세상이 참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언제 서울대를 들어가 볼 수 있겠냐며 TV에서라도 그들의 학교 생활을 엿볼 수 있어 좋았다는 아이도 있었다.

아이들의 눈에는 부러움으로 가득했지만, 하나같이 KBS가 대놓고 서울대를 '빨아댄(아이들끼리 쓰는 은어로, 아부한다는 뜻)' 것이라며 지적했다. 만약 여느 지방 대학 같았으면 그렇게 당당하게 촬영에 응하지도 못했을 거라면서, 서울대생 입장에선 카메라 앞에서 으스대는 게 이해된다고 말했다. 문제는 서울대를 팔아 시청률 장사를 하는 KBS라는 이야기다.

며칠 전 서울시교육청에서 학교는 물론 사설 학원에서까지도 수강생의 성명과 진학 사항을 불특정 다수에게 알리는 현수막 게시를 금지하는 조례가 시행된다고 밝혔다. 수강생들의 개인 정보를 지나치게 노출하는 문제에다, 학벌 위주의 문화를 조장할 우려가 크다는 이유에서다. 분명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그 효과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다.

광주, 전북, 강원에 이어 서울까지, 학벌주의를 부추기는 비교육적 관행에 대한 문제 제기가 확산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는 여전히 서울대를 '빠는' 예능 프로그램이 그 구성원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 방송되고 있다. 학교와 학원의 서울대 합격 현수막을 금지한 것과 은연 중에 학벌주의를 부추긴 지상파 방송의 예능 프로그램 중 어느 게 더 힘이 셀까.

아이들 중 어느 누구도 TV에 나온 서울대생들을 자신의 미래 모습으로 그리지 않았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사람들이고, 대학이라는 거다. 어차피 서울대는 아무리 노력해도 닿을 수 없는, 극소수의 '잘난' 아이들이 가는 곳이라는 체념이 뿌리 깊다. 거기서 예능 프로그램을 찍든 말든 상관할 바 아니고, 그저 여느 예능 즐기듯 한 번 웃고 말 뿐이라고 덧붙였다. 주말 예능 1위라는 높은 시청률은 상당수의 이런 아이들이 만들어준 영예다.


태그:#1박2일, #서울대, #학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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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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