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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퇴계로에서 서울스퀘어(옛 대우빌딩)와 세브란스빌딩 사이로 뻗어 나와 만리재로와 청파로로 이어지는 서울역고가는 개발독재시대의 유산이다. 아현고가를 시작으로 청계고가와 서울역고가가 연이어 건설되면서 고가도로는 조국 근대화의 상징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시인 민영이 1974년 <신동아>에 발표한 '고가도로송(高架道路頌)'은 이 같은 시대상을 풍자한다.

오, 1950년 악몽의 해에
오, 1960년 혁명의 해에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여,
달나라의 벌판에서 꺼진 아들아!
TTTTTTTTTTTT……
너희들의 비 맞은 침강(沈降)의 어깨 위에
공화국의 대로는 달리고 있다.
- 민영, <고가도로송> 일부

고가도로 전성시대

육군 제3항만사령관을 거쳐 초대 부산직할시장을 역임한 김현옥은 1966년 3월 31일 제14대 서울시장에 취임한다. 제6대 대통령선거(1967. 5)를 앞둔 대통령 박정희는 서울의 변화가 절실했다. 만 40세의 김현옥을 서울시장에 임명한 배경에는 낙후된 서울의 변화를 바란 박정희의 의중이 담겨 있었다.

서울시장에 취임한 김현옥은 여의도 개발, 강변도로, 청계고가, 세운상가, 세종로 지하도, 광화문 복원, 시민아파트 등 전시효과가 큰 건설사업에 주력했다. 이 과정에서 김현옥 시장의 파트너로 등장한 사람이 건축가 김수근이다. 김현옥과 김수근은 3가지의 대형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세운상가 건설, 청계고가도로 건설, 여의도 개발이 그것이다.

김현옥 시장의 의뢰로 그려진 순환고속고가도로 건설 구상은 1967년 8월 15일 청계고가도로 기공식 때 발표되었으나 원안대로 실현되지 못했다.2014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한 '안녕 고가도로'전에 전시된 그림을 촬영했다.
▲ 건축가 김수근의 순환고속고가도로 구상도. 김현옥 시장의 의뢰로 그려진 순환고속고가도로 건설 구상은 1967년 8월 15일 청계고가도로 기공식 때 발표되었으나 원안대로 실현되지 못했다.2014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한 '안녕 고가도로'전에 전시된 그림을 촬영했다.
ⓒ 전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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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옥 시장은 도로를 사람의 혈관에 비유했다. 도로가 막힘없이 잘 뚫리면 국가와 도시가 부강해지고 선진화될 것이라고 믿었다. 이런 믿음에서 노면 교통의 효율화를 위해 도로를 뚫고 육교와 지하도, 입체교차로의 건설에 주력했다.

1967년이 되자 김현옥 시장은 고가도로 건설에 몰두한다. 이즈음 김현옥 시장은 건축가 김수근에게 고속고가도로 건설 계획을 의뢰한다. 김수근의 '순환고속고가도로 구상도'는 이렇게 탄생했다.

김수근이 계획한 순환고속고가도로 구상도는 도심을 순환하는 내부 순환고가도로와 도심을 관통하는 고가도로로 구성됐다. 도심 순환고가도로는 독립문에서 광화문과 동대문을 잇고 퇴계로를 거쳐 서울역에서 독립문에 이르는 코스였다. 도심 관통 고가도로는 용두동에서 복개된 청계천을 따라 세종로사거리와 서대문사거리를 거쳐 연희입체교차로로 이어지는 노선이었다.

순환고속고가도로 구상도는 1967년 8월 15일 청계고가도로 기공식 때 발표됐다. 순환고가도로 건설계획이 발표되자 대한건축학회와 대한토목학회는 <고속고가도로계획의 개정을 희망하는 건의서>를 서울시에 제출(1967. 10), 고가도로 건설을 강하게 반대했다.

고속고가도로는 시 외곽의 차량을 단번에 도심으로 유입, 통행량을 늘릴 것이라는 게 반대의 이유였다. 당시 서울시가 안고 있던 주된 교통 문제는 대중교통의 부족이었다. 고가 반대론자들은 시내버스를 늘리고, 지하철을 건설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주장했다.

해가 바뀐 1968년 8월 14일 서울시는 고속고가도로 건설 계획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문화재위원회가 남대문에서 중앙청에 이르는 태평로와 세종로를 영구보존 도로로 지정했기 때문이다. 이 결정에 따라 '순환고속고가도로 구상도'는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변경된 계획에 따라 아현고가도로(고가도로 명칭이 최초로 붙여졌다)가 1968년 9월 18일 완공됐다. 서울역 앞 교통난 해소와 퇴계로의 교통 흐름을 제2한강교(양화대교)와 서울대교(마포대교)로 연결한다는 목적 하에 건설된 서울역고가 또한 변경된 고가도로 계획의 산물이다.

1969년 3월 19일 착공돼 1970년 8월 15일 완공된 서울역고가는 박정희 정권이 표방한 조국 근대화를 홍보하는 선전물로 안성맞춤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기차를 타고 상경한 이들에게 17m 높이에 놓인 서울역고가는 조국 근대화를 세뇌시키는 하나의 상징으로 작용했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고가도로

1968년 9월 18일 고가도로라는 이름이 처음 붙여진 아현고가도로는 2014년 철거되었다.
▲ 철거되는 아현고가도로. 1968년 9월 18일 고가도로라는 이름이 처음 붙여진 아현고가도로는 2014년 철거되었다.
ⓒ 전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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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구구식으로 외국의 모형만을 본 떠 건설해 본래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소통을 막아 교통 체증을 일으킨다."

1980년 12월 교통문제연구소가 서울 시내 10여 개의 고가도로를 점검한 뒤 발표한 보고서의 요지다. 예상을 넘어서는 차량들의 유입으로 고가도로는 정체로 몸살을 앓았다. 청계고가의 경우, 철거 직전 출퇴근 시간대의 평균 속도는 시속 6km에 불과했다. 배호의 노래 '돌아가는 삼각지'로 유명한 삼각지입체교차로는 1994년 교통 흐름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철거의 운명을 맞았다.

고가도로는 안전문제를 동반했다. 감사원은 1985년 10월에 작성한 감사 보고서를 통해 청계고가, 아현고가, 서울역고가 등의 교량에 붕괴 위험이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은 이를 공개하지 않고 비밀에 부쳤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고가도로의 노후화에 따른 유지보수 비용은 갈수록 늘었다. 2014년 철거된 아현고가의 경우 보수비용만 80억 원(매년 유지비 4억원)이 들어, 철거하는 게 경제적으로도 이익이었다.

간선도로 신설도 고가도로의 퇴장을 부채질했다. 1980년대 후반 올림픽대로, 동부간선도로, 북부간선도로 등 서울의 간선도로들이 새롭게 건설되면서 고가도로의 역할은 축소되었다. 서울연구원의 자료에 따르면. 1999년 152만 대였던 서울도심의 교통량은 2012년 98만 대로 30% 정도 줄어들면서 고가도로의 기능은 더욱 약화되었다.

고가도로의 철거는 자동차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도심의 교통정책이 바뀌면서 가속화되었다. 고가도로로 인한 분진과 소음, 주변의 슬럼화와 미관 훼손 등의 문제가 부각된 것도 이즈음이다.


서울의 고가도로는 196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101개가 건설됐다. 2002년 동대문구 전농동에 위치한 떡전고가의 철거를 시작으로 17개의 고가도로가 철거되고 2015년 현재 85개가 남았다(서울역고가의 경우 동자동 방향의 A램프만 철거). 아이러니하게도 고가도로의 철거를 전면화 시킨 인물은 건설회사 CEO 출신의 서울시장 이명박이었다. 청계천 복원을 위해 2003년 단행한 청계고가의 철거는 고가도로의 퇴장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퍼포먼스였다.

고가도로가 철거되자 낙후된 주변 환경이 밝아졌다. 2014년 아현고가가 철거되자 인근 주민들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고가도로가 사라지자 주변이 밝아지고, 차량에서 뿜어져 나오던 매연과 분진이 줄고, 소음이 작아져 살기가 좋아졌다는 것이었다.

잘못 끼운 첫 단추, 서울역고가 공원화 사업

1969년 3월 19일 착공되어 1970년 8월 15일 완공된 서울역고가는 박정희 정권이 표방한 조국 근대화를 홍보하는 선전물로 안성맞춤이었다.
▲ 서울역고가도로 모습 1969년 3월 19일 착공되어 1970년 8월 15일 완공된 서울역고가는 박정희 정권이 표방한 조국 근대화를 홍보하는 선전물로 안성맞춤이었다.
ⓒ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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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고가도 '고가도로 철거'라는 시대의 흐름을 비켜가지 못했다. 오세훈 시장이 재임하던 2006년 감사원이 실시한 안전진단에서 서울역고가는 'D등급' 판정을 받았다. 서울시는 2008년 '서울역고가도로 철거 및 주변도로개선 계획'(시장방침 제225호)을 확정하고, 서울역고가 철거와 대체고가 건설 계획을 수립했다. 2009년에는 서울역고가를 '2015년 철거'키로 결정하고, 버스와 대형 화물차량의 통행을 금지시켰다.

서울시가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서울역고가의 철거를 전제로 진행한 안전진단 용역 지출예산은 13억 원에 이른다. 고가 유지보수 예산은 2012년 6억1천만 원, 2014년 5억 원, 2015년 4억 원이다.

서울역고가의 철거방침은 박원순 시장이 취임 후에도 변함 없었다. 2013년 6월 28일 서울시의회(제247회 정례회 4차 본회의) 시정질의 답변에서 박원순 시장은 서울역고가가 "가능한 한 빠른 시간 안에 철거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서울역고가 공원화 계획이 본격적으로 검토되기 시작한 것은 2014년 4월 무렵이다. 그런 다음 6.4지방선거에서 서울역고가 공원화 사업을 주요 공약으로 발표한 박원순 시장은 2014년 8월 27일 시장방침으로 사업추진을 하달했다. 2014년 9월 24일 뉴욕의 하이라인 파크를 방문한 박원순 시장은 서울역고가 공원화 사업을 공식 발표했다.

'서울역고가 프로젝트'로 명명된 서울역고가 공원화 사업은 서울시 투자심사 대상사업이다. 서울역고가 프로젝트의 투자심사는 구체적인 계획이 수립되지 않았던 2014년 9월 30일 실시됐다. 기본 실시 설계가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서울역고가 프로젝트는 37개 사업 중 36번째로 상정되어 적합 판정을 받았다.

당시 투자심사위원회는 안전등급이 낮은 서울역고가의 위험 요소 제거에 사업의 긴급성이 있고,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보탬이 될 것이라는 이유로 적합 판정을 내렸다. 철거의 이유가 공원화 사업의 근거로 재활용된 것이다.

서울시가 밝힌 서울역고가 공원화 사업의 경제성(B/C)은 1:1.8이다. 투자대비 1.8배의 경제적 편익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공원화 사업에 들어가는 예산은 380억 원이며 연간 운영경비는 1억3천만 원이다. 공원화 이후 연간 경제적 편익은 51억 원으로 1일 평균 이용객 3500명, 1인당 여가비용 4000원, 개장일 365일을 곱한 값이다. 서울시는 서울역고가를 공원화해 30년 동안 운영할 경우, 419억 원의 운영경비가 투입되는 반면 1533억 원의 경제적 편익이 발생할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서울시는 경제적 편익 추정치에 앞서 밝혀야 할 것이 있다. 기존의 '서울역 고가차도 철거 및 주변 도로개선 공사' 방침을 왜 철회하고 고가 공원화 사업을 추진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말이다.

누구를 위한 서울역고가 공원화 사업인가

서울시는 5월 13일 서울역 7017 프로젝트의 국제현상설계공모 당선작으로 비니 마스의 '서울 수목원'을 선정했다.
▲ 네덜란드 건축가 비니 마스(Winy Mass)의 '서울 수목원' 서울시는 5월 13일 서울역 7017 프로젝트의 국제현상설계공모 당선작으로 비니 마스의 '서울 수목원'을 선정했다.
ⓒ 서울특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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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고가 프로젝트라는 명칭의 서울역고가 공원화 사업은 2015년 1월말 '서울역 7017 프로젝트'로 이름이 바뀐다. 서울역 7017 프로젝트이란 1970년에 건설된 서울역고가에 17개의 통행로를 연결하여 2017년에 재생시킨다는 의미다.

서울시는 5월 13일 서울역 7017 프로젝트의 국제현상설계공모 당선작으로 네덜란드 건축가 비니 마스(Winy Mass)의 '서울 수목원'을 선정했다. 당선작 '서울 수목원'은 서울역고가를 하나의 큰 나무로 설정, 퇴계로에서 중림동까지 국내 수목을 가나다순으로 심고, 램프는 나뭇가지로 비유하여 17개 보행길과 연계한다는 내용이다.

서울시는 비니 마스와는 설계범위에 대한 구체적인 협상을 진행한 다음 6월 중 계약할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9월 서울역고가 공원화 계획을 공식 발표한 지 9개월 만에 사업이 공사 실행 단계로 진입하는 형국이다.

이 지점에서 묻지 않을 수 없다. 서울시는 왜 이렇게 서두르는가? 서울역고가 공원화, 과연 누구를 위한 사업인가? 서울시가 서울역고가 공원화 사업의 정당성을 획득하려면 다음 세 가지의 질문에 납득할 만한 답을 내놔야 한다.

첫째는 민주적인 과정을 밟고 있는가다. 서울역 7017 프로젝트는 소통과 경청을 강조해온 박원순 시장의 시정운영 방식에 걸맞지 않게 추진되고 있다. 지난해 6.4선거의 공약으로 제출된 이후 이 사업은 타당성 제시 없이 일방통행식으로 추진되고 있다. 사업 추진 초기 인근 주민들과 남대문시장 상인들에 대한 의견 수렴은 물론 시민사회와의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사업계획이 발표되면서 갈등과 의혹이 증폭됐다.

이 과정에서 행정의 연속성도 훼손됐다. 기존의 고가 철거 방침을 철회하고 공원화하겠다는 상반된 결정에 대한 충분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채 사업을 밀어붙였다. 여기에 투자심사위원회의 심사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추경예산 5억 원을 편성하는 조급성마저 더해졌다(2014년 9월 1일 편성된 추경예산 5억 원은 불용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2015년 서울역고가 공원화 사업 예산으로 118억 원이 편성되면서 논란이 커졌다.

둘째는 입지 조건의 문제다. 서울역고가는 공중공원을 조성하기에 알맞지 않다. 서울시가 모델로 삼고 있는 뉴욕의 하이라인 파크의 경우 높이 9m, 길이 2.5km다. 반면 서울역고가의 경우 높이 17m, 길이 983m다. 6층 건물 높이의 고가에 공원을 조성할 경우 안정감이 떨어지고, 안전사고의 위험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접근성도 좋지 않다. 뉴욕 하이라인 파크나 파리 프롬나드 플랑테의 경우 건물과 인접해 있어 접근이 용이하고, 안정감이 있으나 서울역고가는 그렇지 않다. 서울역고가는 도로와 철로를 가로 지르는 입지 조건 때문에 접근성이 떨어진다.

주변 경관을 해치는 것도 문제다. 서울역 광장에서 숭례문 쪽을 바라볼 때, 서울역고가는 주변 경관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서울역고가의 공원화는 정부와 서울시가 추진하는 '국가 상징거리 조성계획'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이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서울역고가에 '수목원'을 만들 경우 온전한 생태공원이 될 리 만무하다. 땅과 단절된 공중공원의 관리를 위해 물, 전기 등의 에너지가 사용되어야 한다. 거대한 인공어항이 된 청계천, 아주 넓은 중앙분리대가 되고 만 광화문광장의 재판이 될 수밖에 없다.

셋째, 공원화의 편익을 누가 누리게 될 것인지도 따져봐야 한다. 서울역고가 공원화 사업의 가장 큰 수혜자는 보행로로 연결되는 건물주와 고가 주변에 이해관계가 있는 도시개발 사업자들이다. 서울역 주변 공실률이 높은 건물들도 고가 공원화에 따른 편익을 누릴 것이다.

지난 5월 7일 서울시는 '서울역 일대 종합발전계획'을 발표했다. 발전계획은 ▲ 북부역세권 개발 조기 가시화 : 코레일과 TF구성, 합의 후 하반기 민간공모 시행 ▲ 북부역세권~코엑스·잠실~서울역~상암·수색~킨텍스 MICE 축 구상 ▲ 도심 동서의 공간적 단절회복, 도심의 활력을 서북권역으로 확산 ▲ 남대문시장 글로벌 명품시장 선정(4월)에 성공, 50억 원 예산 지원 예정을 골자로 한다.

반대 여론 무마용이라는 의구심이 가시지 않는 발전계획은 대규모 토목건설사업이 주된 내용이다. 서울역 북부 컨벤션센터 건설이나, 신안산선 만리재역 신설 등의 문제는 급하게 추진할 사안이 아니다. 이럴 때일수록 폭넓게 이해관계자들과 공론화의 과정을 통해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해야 한다.

뉴욕 하이라인 파크 사례, 제대로 배워야

서울역 광장에서 숭례문 쪽을 바라 볼 때, 서울역고가는 주변 경관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 숭례문 방향의 경관을 가로막고 있는 서울역고가. 서울역 광장에서 숭례문 쪽을 바라 볼 때, 서울역고가는 주변 경관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 전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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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밝혔듯 서울역고가 공원화 사업은 뉴욕 하이라인 파크 사례를 모델로 하고 있다. 2009년 6월 개장한 뉴욕 하인라인 파크는 철거 예정이었던 고가 철로를 주민들이 주도해 녹지공원으로 만든 사례다.

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하이라인 파크는 1934년에 개통된 고가철도에 조성됐다. 한때는 '뉴욕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공공 발전 시설'이라는 칭송을 들은 고가철도는 1980년 운행이 중단된 이후 도심의 흉물로 방치됐다. 줄리아니 시장이 재임 중이던 1999년 고가의 철거가 결정되자 조슈아 데이비드와 로버트 해먼드라는 두 청년이 나타나 '하이라인의 친구들'이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이렇게 시작된 고가 보존운동이 결실을 맺어 2006년 하이라인 파크 착공식이 열린다. 3년 후인 2009년 첫 번째 구간의 공원으로 만들어졌고, 2011년에 두 번째 구간의 공원이 완성되면서 2.5km에 이르는 하이라인 파크가 새롭게 조성됐다.

하이라인 파크는 10년 동안 시민들이 참여하여 머리를 맞대고 협력하여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서울시가 하이라인 파크에서 배워야 할 것은 눈에 보이는 하이라인 파크가 아니라  그 과정이다. 하이라인 파크가 만들어지는 데는 많은 시민들이 참여했을 뿐 아니라, 뉴욕시 당국도 시민들과 함께 했다. 서울시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해야 한다.

남귤북지(南橘北枳)라는 말이 있다. '강남의 귤나무를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나무로 변한다'는 뜻이다. 서울역고가 공원화 문제가 탱자나무가 되지 않으려면 서울시는 원점에서 전후좌우를 살펴야 한다.

○ 편집ㅣ최유진 기자

덧붙이는 글 | 기사 중 고가도로의 역사와 관련한 내용은 김종립의 <근대화의 상징에서 도시의 애물단지로: 서울 고가도로 약사>(서울역사박물관 '안녕 고가도로'전 도록)를 참조했습니다. 이 기사는 칼라밍(www.columning.kr)에도 함께 싣습니다. 전상봉 기자는 서울시민연대 대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태그:#서울역고가, #서울역7017, #박원순, #하이라인파크, #고가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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