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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돌산에서 일하는 네팔 청년 알킬의 모습. 6년 동안 한국에서 일해 코리언 드림이 이뤄지기 직전에 지진과 함께 꿈이 깨졌다. 2년전 카트만두 버스터미널 부근에 산 3층짜리 집이 깨졌다
 여수 돌산에서 일하는 네팔 청년 알킬의 모습. 6년 동안 한국에서 일해 코리언 드림이 이뤄지기 직전에 지진과 함께 꿈이 깨졌다. 2년전 카트만두 버스터미널 부근에 산 3층짜리 집이 깨졌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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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벌어 귀국하면 장가도 가고, 사업도 해볼 계획이었는데 이제 뭘 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하고 막막합니다."

석가탄신일인 지난 25일, 전남 여수 석천사를 찾아온 네팔 청년 알킬이 한 말이다. "지난달 25일 발생했던 첫 번째 지진은 괜찮았어요. 그런데 두 번째(지난달 29일)에 집이 깨져버렸어요" 한숨을 쉬던 알킬이 말을 계속했다.

'코리안 드림', 다 이룬줄 알았는데...

"지난 23일도 폭풍우가 몰아쳐 차와 나무가 넘어져 사람들이 놀라고 식구들은 바깥에서 텐트를 치고 살아요."

여수이주민센터 이사였던 나는 5년 전 알킬과 처음 만났다. 열심히 일 하면서도 돈을 거의 쓰지 않는 그를 눈여겨보다 가까워졌다. 그의 고향은 해발 2000미터가 넘는 산악 지역에 있다. 도시에 나갔다가 집에 가려면 1박 2일을 걸어야 집에 닿을 수 있단다.

어린 아들들을 남겨두고 남편이 죽자 알킬의 어머니는 자식들을 데리고 도시인 치트완으로 이사 왔다. 품팔이를 하며 자식들을 공부시키고 생계를 꾸려나갔지만, 집안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공부를 잘했던 알킬은 포카라대학 영문학과에 합격해 1학년을 다녔지만, 어머니가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친척집과 이웃들에게 돈 빌리러 다니는 걸 보고 한국행을 결심했다.

단박에 한국어 시험을 통과한 알킬이 도착한 곳은 여수의 한 양식장. 기차도, 바다도 구경 한번 해본 적 없던 청년이 한국에 와서 기차와 비행기도 처음 탔다. 바다가 이렇게 넓은 줄도 처음 알았다.

23일(토), 여수 흥국체육관에서 열린 다문화축제에 네팔 지진피해자들을 돕기위한 모금행사가 열렸다. 여수에 사는 40여명의 네팔인들과 한국인들이 공동으로 모금활동에 참여했다
 23일(토), 여수 흥국체육관에서 열린 다문화축제에 네팔 지진피해자들을 돕기위한 모금행사가 열렸다. 여수에 사는 40여명의 네팔인들과 한국인들이 공동으로 모금활동에 참여했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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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오신날 여수 석천사를 찾아온 네팔 출신 머니 부부가 인터뷰에 응한 후 포즈를 취했다. 카트만두에 있는 집이 부서졌지만 인명피해는 없었다고 한다
 부처님 오신날 여수 석천사를 찾아온 네팔 출신 머니 부부가 인터뷰에 응한 후 포즈를 취했다. 카트만두에 있는 집이 부서졌지만 인명피해는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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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외국 노동자는 친구들끼리만 얘기하거나 기초적인 한국말만 배운다. 하지만 알킬은 달랐다. 파도가 심하거나 날씨가 추워 일할 수 없는 날은 이웃에 사는 할머니 밭에 가서 일을 도와주며 한국말을 배웠다. 한겨울에 너무 추워 일이 없으면 공사장에 나가 아르바이트로 잡일을 하며 돈을 모았다. 뿐만 아니다. 처음 오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해 음식을 해주거나 통역과 안내를 도맡기도 했다.

3년 전 네팔 여행을 할 때 알킬과 보름 동안 함께 지내며 들은 얘기다. 네팔 화폐의 가치는 한국의 약 1/10수준이다. 네팔에선 대학을 나와도 월급이 한화 10여 만원 정도인데, 그나마도 직장이 없다. 공장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돈 빌리러 갔을 때 그렇게 괄시하던 친척과 이웃들이 지금은 반대로 돈을 빌리러 온단다. 그가 휴가 차 네팔에 가면 "신부 되기를 희망하는 처녀들이 10여 명씩 줄을 선다"고 자랑하던 그.

네팔 제2도시이자 아름다운 포카라를 여행할 때 틈틈이 오토바이를 끌고 와 시내와 아름다운 페와 호수를 안내하기도 했다. 귀국할 때가 가까워져 한국행 비행기를 탈 수 있는 카트만두로 옮기자 카트만두의 유명한 관광지와 유적지, 여수에서 일하는 네팔 친구의 가족들과의 만남을 주선하며 통역까지 전담했다.

2년 전 어느 날, 그는 그렇게도 원하던 '코리안 드림'을 이뤘다고 자랑했다. 네팔에서 월급만 받고 일했다면 평생 꿈꾸지 못했을 8천만 원짜리 집을 산 것이다. 그것도 카트만두 버스터미널 주변의 3층집이다. 성실하게 일하는 모습을 지켜본 사장님이 빌려준 돈과 지금껏 저금한 돈, 네팔 은행에서 빌린 돈으로 산 8천만 원짜리 집이다. 한국인들은 그 돈이 네팔인들에게 얼마나 큰돈인 줄 모른다.

3년 전 포카라에서 한국 학생 20명을 인솔하고 카트만두 버스터미널에 내렸던 나는 그곳이 얼마나 가치 있는 곳인 줄 안다. 한 마디로 물 좋은 곳이다.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다니는 곳으로, 알킬의 앞날은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그가 풀이 죽어 얘기를 한다.

지진 후 무너진 집... "어떻게 해야할지"

오른쪽 끝에 성해보이는 집은 콘크리트 집이어서 큰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가운데 있는 머니씨의 작은 아버지집은 심한 피해를 입고 아들이 죽었다. 오른쪽에 약간 보이는 첫집이 머니씨의 집이다. 오래된 집은 목조와 흙으로 지었기 때문에 지진에 취약하다고 한다
 오른쪽 끝에 성해보이는 집은 콘크리트 집이어서 큰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가운데 있는 머니씨의 작은 아버지집은 심한 피해를 입고 아들이 죽었다. 오른쪽에 약간 보이는 첫집이 머니씨의 집이다. 오래된 집은 목조와 흙으로 지었기 때문에 지진에 취약하다고 한다
ⓒ 머니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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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어요. 그렇다고 집을 지을 수도 없고, 아직도 갚아야 할 돈이 1000만 원이나 남았어요. 우선 15일 정도 휴가를 내서 네팔로 돌아가 전문가한테 집수리가 가능한지 물어봐야겠어요. 지금도 매일 지진이 계속되기 때문에 집에는 아무도 없어요. 식구들은 당분간 안전한 시골로 내려가거나 텐트에서 지낸다고 전화가 왔어요."

2015년 4월 25일, 네팔에 규모 7.8의 대지진이 발생했다. 진앙은 네팔 간다키 구 고르카 현이며, 진원까지의 깊이는 대략 15km로 매우 얕은 편이다. 이 지진으로 네팔, 중국,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지에서 수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정확한 사망자의 수는 아직 잘 모르지만 1만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수십 차례의 여진이 발생했다. 특히 네팔 인구 2900만 중 400만 명이 사는 대도시 카트만두는 심각한 피해를 입어 사람들이 안전한 곳으로 피했다고 한다. 매일 가족과 전화 통화를 하는 알킬이 전한 소식은 이렇다.

네팔 최고의 궁전인 박타푸르 궁전 앞에 선 알킬과 작은아버지(왼쪽), 전임여수이주민센터 박용환 소장. 3년전 네팔을 여행할 때 휴가차 네팔에 온 알킬이 편의를 제공하고 오토바이를 태워 명승지를 구경시켜 줬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궁전으로 지진 피해를 입었다
 네팔 최고의 궁전인 박타푸르 궁전 앞에 선 알킬과 작은아버지(왼쪽), 전임여수이주민센터 박용환 소장. 3년전 네팔을 여행할 때 휴가차 네팔에 온 알킬이 편의를 제공하고 오토바이를 태워 명승지를 구경시켜 줬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궁전으로 지진 피해를 입었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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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하지 못했던 비바람으로 먼지가 심하게 일어나고 먹을 물도 부족합니다. 7층짜리 건물이 붕괴돼 시체를 꺼내지 못해 썩는 냄새가 나고 전염병이 걱정돼 사람들이 떠나고 있어요. 가파른 산이 무너져 계곡을 막자, 강물 수위가  200m나 높아진 곳도 있습니다. 강 하류 주민들은 강이 붕괴될 것을 염려해 안전한 곳으로 떠나고 있다고 합니다."

네팔 수도 카트만두에는 유네스코가 정한 네팔 세계 문화 유산 8개 중 7개가 있다. 이 지진으로 카트만두 계곡의 카트만두 더르바르 광장과 같은 여러 유네스코 세계 유산이 파괴됐다.

네팔 지진 돕기 벌이는 네팔 노동자들

무너진 알킬의 집 모습
 무너진 알킬의 집 모습
ⓒ 알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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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에서는 네팔 출신 노동자가 약 40명 정도 일하고 있다. 대부분 양식장에서 일하거나 어선을 탄다. 그들 중 몇 명은 가족이 죽거나 집이 완전히 사라진 사람도 있다. 가봤자 별 소용이 없어 발만 동동 구르며 돈만 송금했다고 한다.

카트만두 버스 터미널에서 30분 정도 떨어져 있는 토카(Tokha)에 집이 있는 '머니' 부부는 한국에서 일한 지 20년째다. 현재 여수의 한 공장에서 일하는 머니씨도 집이 부서졌다. 바로 이웃해 사는 작은 아버지의 아들은 압사했다. 한국에서 15년간 일하다 귀국한 동생이 부서진 집과 죽은 조카 사진을 메시지로 보내왔다.

지난 23일부터 25일까지, 네팔 노동자들이 직접 나서서 네팔 지진 희생자들을 도와달라는 모금 캠페인을 벌였다. 쌍봉초등학교와 거북공원 일대에서 벌인 모금 캠페인 결과 상당 액수가 모였다. 자신들이 모은 돈과 모금한 돈이 모여 목표액 1000만 원이 달성되면 이들 중 몇 명과 한국인 자원봉사자와 함께 네팔로 떠날 예정이다. 그 돈은 정부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주민을 위해 사용할 예정이다. 알킬이 네팔 사람들을 대신해 한국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한국인들이 어려운 네팔 사람들을 위해 도와주시니 정말로 고맙습니다. 모든 네팔 사람을 대신해 감사드립니다."

부처님 오신날 여수 석천사를 찾은 네팔 출신 노동자들
 부처님 오신날 여수 석천사를 찾은 네팔 출신 노동자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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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ㅣ조혜지 기자

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에도 송고합니다



태그:#네팔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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