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이름과 직위는 커녕 글자 하나도 새기지 않은 백비. 아곡 박수량 선생의 비석이다. '청백리'의 상징이다.
 이름과 직위는 커녕 글자 하나도 새기지 않은 백비. 아곡 박수량 선생의 비석이다. '청백리'의 상징이다.
ⓒ 이돈삼

관련사진보기


주차장이 텅 비어 있다. 여기서 가까운 홍길동 테마파크 주차장엔 자동차가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자동차 한 대도 보이지 않는다. 사람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다. 석가 탄신일을 낀 황금 연휴라지만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적막감까지 감돈다.

지난 25일 아곡 박수량 선생이 잠들어 있는 백비가 그랬다. 행정기관이나 기업체의 단체 연수 외에 개인적으로 찾는 발길이 거의 없다. 정부는 또 다시 부정과 비리 척결을 외치고 있지만 공염불에 그치고 있다. 백비를 다시 찾은 이유다.

백비(白碑)는 '청백리'로 이름난 박수량 선생의 묘비를 가리킨다. '선비의 고장'으로 알려진 전라남도 장성에 있다.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의 마을 뒤 소나무 숲이다. 주차장에서 연결되는 다듬어진 계단을 따라 올라가서 만난다. 햇볕 잘 드는 곳이다. 묘도 보통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비교적 평범하다.

박수량 선생의 백비 주차장에 세워진 표지석. 왼쪽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서 백비와 만난다.
 박수량 선생의 백비 주차장에 세워진 표지석. 왼쪽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서 백비와 만난다.
ⓒ 이돈삼

관련사진보기


주차장에서 백비로 가는 길. 몇 해 전 돌계단으로 말끔히 단장해 놓았다.
 주차장에서 백비로 가는 길. 몇 해 전 돌계단으로 말끔히 단장해 놓았다.
ⓒ 이돈삼

관련사진보기


하지만 비석이 별나다. 온통 하얗다. 글자 하나 새겨져 있지 않다. 고인의 이름은 커녕 직위도 씌어 있지 않다. 그렇다고 대충 세워 두지도 않았다. 보통의 비석처럼 반듯하게 서 있다. 비석은 높이 130∼140㎝, 폭 40∼50㎝에 이른다. 안내판이 없으면 누구의 묘이고 비석인지 알 길이 없다.

백비의 주인은 아곡 박수량(1491∼1554) 선생이다. 조선 성종 22년에 태어나 연산군 시대를 거쳐 중종과 명종 시대를 살았다. 23살 때인 1513년(중종 8년)에 진사, 24살에 문과에 합격해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호조판서와 예조판서, 형조판서, 공조판서를 지냈다. 정2품으로 요즘의 장관인 셈이다. 의정부 우참찬과 좌참찬, 함경도와 전라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지금의 서울시장 격인 한성부판윤도 지냈다. 39년을 고위 공직자로 살며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럼에도 요즘말로 그 흔한 접대 한 번 안 받았다. 뇌물도 한 푼 받지 않았다. 부정한 뒷거래도 일절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을 내세우지도 않았다. 집 한 칸 마련하지 않고 겨우 생계를 유지할 정도로 살았다. 시쳇말로 찢어질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다. 청빈한 삶 그 자체였다.

박수량 선생의 백비 전시실. 주차장 한쪽에 아담하게 세워져 있다.
 박수량 선생의 백비 전시실. 주차장 한쪽에 아담하게 세워져 있다.
ⓒ 이돈삼

관련사진보기


아곡 박수량 선생의 연보. 39년 동안 고위 공직자로 살았다. 박수량 백비 전시실에 붙어 있다.
 아곡 박수량 선생의 연보. 39년 동안 고위 공직자로 살았다. 박수량 백비 전시실에 붙어 있다.
ⓒ 이돈삼

관련사진보기


박수량 선생에 대한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와 있다. 그가 참판으로 있던 시절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당시는 부모가 돌아가시면 3년 상을 치러야 했다. 선생은 고향에 내려와 상주의 역할을 다하며 살았다.

그럼에도 조정에 투서가 들어갔다. 박수량이 고향에서 호의호식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조정에서 암행어사를 보내 사실 확인에 나섰다. 하지만 현지 확인을 다녀온 암행어사는 여전히 어렵게 생활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에 명종 임금이 친히 편지를 보내 선생을 격려했다.

'경을 만나지 못한 것이 오래 되었도다. 건강상태는 또한 어떠한지 궁금하오. 듣건대 경의 집 부엌에서 연기가 나지 않을 때가 한 달 동안에 곧잘 반이나 된다 하거니와 이는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나라 동산의 벼가 막 익었음에 몇 말을 타작하여서 보내노라. 비록 물품은 빈약하되 마음의 뜻은 큰 점을 그대는 어찌 여기는지. 마땅히 궁궐에 들어와 나를 보좌하여야 할 터인데 간절히 바라고 바라노라. 나머지는 격식을 갖추지 못하오.'

아곡 박수량 선생의 묘와 비석. 글자 하나도 새겨놓지 않아 '백비'로 불린다. 청백리의 상징이 됐다.
 아곡 박수량 선생의 묘와 비석. 글자 하나도 새겨놓지 않아 '백비'로 불린다. 청백리의 상징이 됐다.
ⓒ 이돈삼

관련사진보기


아곡 박수량 선생의 묘지 전경. 전남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뒷산 솔숲에 자리하고 있다.
 아곡 박수량 선생의 묘지 전경. 전남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뒷산 솔숲에 자리하고 있다.
ⓒ 이돈삼

관련사진보기


박수량 선생이 죽음을 앞두고 남긴 유언도 소박했다. 고향에 장사를 지내되 묘를 크게 하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 것을 가족들에 당부했다. 하지만 가족들은 묘를 크게 쓰고 싶어도 쓸 여력이 없었다. 어찌나 청빈하게 살았던지 장례비용조차 없었다. 가족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 소식을 신하들에게서 전해들은 명종 임금이 장례비용을 하사했다. 그리고 서해안에서 쓸 만한 돌을 골라 비를 세우도록 했다. 그러면서 비석에 공적을 나열하지 말고, 그냥 세워 놓으라고 지시했다.

"박수량의 청백을 알면서 빗돌에다 새삼스럽게 그가 청백했던 생활상을 쓴다는 것은 오히려 그의 청렴을 잘못 아는 결과가 될 지 모르니 비문 없이 그대로 세우라!"

명종 임금은 비문에 이런저런 공적을 새기는 게 오히려 박수량의 생애에 누(累)가 될까 우려했다. 이렇게 세워진 백비가 오늘날 청백리(淸白吏)의 상징이 됐다. 이름을 남기지 않았는데도, 선생의 이름 석 자는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름마저도 새기지 않은 백비는 청백리를 상징하는 유물이 됐다. 전라남도 기념물 제193호로 지정돼 있다. 이 시대를 사는 공직자와 기업인들이 꼭 한 번은 가봐야 할 곳이 됐다. 목민관의 참뜻을 떠올리는 본보기다. 부정부패 척결과 비정상의 정상화를 외치는 이 시대 고위 공직자들이 반드시 찾아봐야 할 곳이다.

금호마을 뒷산에서 내려다 본 박수량 선생의 묘지. 햇볕 잘 드는 양지 바른 곳에 자리하고 있다.
 금호마을 뒷산에서 내려다 본 박수량 선생의 묘지. 햇볕 잘 드는 양지 바른 곳에 자리하고 있다.
ⓒ 이돈삼

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찾아가는 길
호남고속국도 장성 나들목에서 상무대 방면으로 24번 국도를 탄다. 제2황룡교를 건너 장산 사거리에서 통안 방면으로 우회전, 홍길동테마파크를 지나면 금호리에 닿는다. 백비는 금호마을 뒷산에 있다.



태그:#백비, #청백리, #박수량, #박수량 백비, #장성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