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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내가 금남로를 다시 찾은 것은 35년만이었다. 경상도 여자인 나는 전남 장성 남자를 서울에서 만나 1981년 12월 결혼했다. 결혼할 당시만 해도 나는 '5.18'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언론에서 떠드는 대로 믿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니 시댁 식구들은 경상도 여자와 결혼한 남편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기도 했고 용기 있다고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때도 나는 그 이유를 몰랐었다.

1982년 여름, 결혼하고 아직 인사를 못 한 시누이 집(광주광역시 학동)으로 인사를 하러 갔다. 시누이는 오빠의 아내, 즉 올케인 내게 성심을 다해 식사를 대접하고 광주에 대한 이런 저런 얘기를 해 줬다. 그때 옆에서 듣고 있던 시매부가 묵직한 A4지 다발을 가지고 와서 조심스럽게 읽어보라고 했다. 거기에는 광주 5.18의 전모가 다 들어 있었다.

당시에 시매부는 광주 교구청에 몸담고 있었는데, 5.18의 모든 것을 기록해 뒀던 것이다. 나는 서너 시간에 걸쳐서 읽고 또 읽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눈물이 쉼 없이 흘렀다. 내가 경상도 사람이라는 사실이 무섭고 두려웠다. 나는 용기를 내서 시누이에게 금남로를 구경 시켜 달라고 했다. 그녀는 얼른 일어나서 앞장서서 금남로로 안내했다.

가는 동안 느낀 착잡함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금남로에 도착해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속울음을 울었다. 그 때 리어카에서 엑세서리를 팔고 있는 한 청년이 눈에 들어왔다. '아~ 젊은이다. 그 아비규환 속에서 저 청년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청년에게 다가가 인사를 하고 그 청년의 손을 잡았다.

"안녕하세요? 어떻게 살아남았어요? 참 장해요."
"……?"
"예, 저 경상도 사람입니더. 미안합니더."

아픈 몸을 이끌고 꿈틀버스 행사장으로 출발

눈물이 마구 쏟아졌다. 시누이도 옆에서 같이 울었다. 청년은 얼른 내 손을 맞잡으며 빙그레 웃었다. 나중에 마음먹고 금남로를 다시 찾으리라 다짐하며 집으로 돌아왔는데, 35년이 지난 지금에야 '꿈틀버스(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가 지난해 진행한 '행복한 우리 만들기' 전국 순회강연 때 만난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꿈틀거리는 사람과 단체들을 만나러 가는 행사)' 덕분에 금남로를 다시 찾은 것이다.

나는 여행은 무척 좋아하는데 정해진 날짜에 출발하는 여행이나 출장은 엄청 부담을 느끼는 스타일이다. 마음으로 부담을 느끼다 못해 경우에 따라서는 몸이 반응을 보일 때도 가끔 있다.

이번 꿈틀 버스 1호의 탑승객이 되려고 신청을 하고 입금까지 마쳤다. 그런데 날짜가 다가올수록 마음에 부담이 생기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감기가 찾아왔다. 이번 여행의 부담은 처음 보는 사람들과 시간을 같이 해야 된다는 데서 비롯된 것 같다. 이럴 줄 미리 알고 처음 신청할 때부터 잠은 집에 와서 자겠다고 양해를 구했지만, 그렇다고 부담이 줄었을 뿐이지 없어진 건 아니었나보다.

자기 소개 하는 시간에 잠시 한눈을…!
▲ 오연호 대표님과 친구들 자기 소개 하는 시간에 잠시 한눈을.....!
ⓒ 김경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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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 낮 동안 감기로 끙끙 앓다가 오후가 돼서 억지로 몸을 움직여 광주광역시로 향했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그 스케줄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오연호 대표가 궁금해서다. 나는 오마이뉴스 창간 때부터 오늘까지 오마이뉴스를 보면서 내심 오연호라는 사람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꼭 한 번 보고 싶었다.

오후 7시 20분, 황룡강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하니 마침 참가자들이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이었다. 여신님을 찾아서 살짜기 인사를 하고 조금 헐렁한 틈새를 찾아가 앉았다. 좌중을 한번 둘러보고 한 곳에 시선이 머물렀다. 바로 오연호 대표님. 깔끔하고 깐깐해 보이는 첫인상과는 달리 무척 재치 있는 재담으로 사회를 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한사람씩 개개인을 모두 다독이며 아우르는 모습을 보고 오늘의 오마이뉴스가 탄생하고 잘 운영되고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선운중학교 사람들

선운 중학교 아이들이 폐품을 활용해서 창작활동을 하는 방 입구의 현판
▲ 선운 중학교의 꼬물(고물)방 선운 중학교 아이들이 폐품을 활용해서 창작활동을 하는 방 입구의 현판
ⓒ 김경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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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저녁은 그렇게 인사만 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밤새 기침과 콧물을 훌쩍이고 다음날 다시 꿈틀버스 1호 승객들을 만난 곳은 광산구의 선운 중학교.

선운 중학교를 다녀 온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건만 학교를 떠올리니 또 가슴이 먹먹하니 콧잔등이 시큰거리다가 슬며시 웃음이 나기도 한다. 가슴이 먹먹한 것은 '세월호 참사' 문자 때문이고, 웃음이 나는 것은 '꿈틀'교실 때문이다.  요즘은 문명이나 문화가 발달하면서 살기가 좋아지고 의식수준도 높아져서 남의 안 된 사정에 성금을 내거나 봉사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하지만 진정으로 남의 슬픔에 남의 사연에 뼈아프게 동참하고 위로하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내가 본 선운 중학교는 학교장을 비롯하여 교사, 교직원, 무엇보다 학생들이 한마음이 되어 세월호 참사를 슬퍼하고 아직 해결되지 않은 법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동참하는 마음이 침묵 속에서 행동하는 양심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못쓰는 얼개미(채)로 만든 시계
▲ 선운 중학교 아이들 작품 못쓰는 얼개미(채)로 만든 시계
ⓒ 김경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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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사연의 글이 있었지만, 복도에 써서 붙여놓은 글 중에 '엄마가 새로 사 준 스마트폰이 긁혔어, 엄마 미안해'라며 엄마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문자의 문구를 보고는 그만 주책없이 흐느끼고 말았다. 선운 중학교는 그렇게 교내에서 뿐만 아니라 외부의 손님을 초대해서까지 세월호의 아픔을 함께 하며 참사의 진실을 밝히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또 선운 중학교는 열린 교육의 중심에 서 있었다. 학생들에게 주입식 교육이 아닌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창조하는 <꼬물>교실을 운영하고 있었고. 참여하는 학생들 작품은 참으로 기발한 것들이 많았다. 꼬물은 버리는 폐품을 활용해서 창작활동을 하고 있었다. 선운중학교 견학을 마치고 윤상원 열사 생가에 들러서 '더불어락'으로 이동했다.

35년만에 다시 걸은 금남로

그의 명쾌한 강의는 열열한 박수를 이끌어 냈다
▲ 강위원 관장님 그의 명쾌한 강의는 열열한 박수를 이끌어 냈다
ⓒ 김경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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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락은 구태의연한 '노인복지관'이라는 명칭에서 탈피해 특별하게 이름 지은 노인복지관이다. 더불어락이란 이름을 지어놓고 강위원 관장은 택시를 타고 택시기사에게 물었단다. '더불어락이란 곳이 광산구에 생겼다는데 아느냐'고. 택시기사 왈, '언제부턴가 노인복지관이 있던 자리에 오리집이 생겼더라고요'했단다. 그 소리를 듣고 재미있게 웃긴 했지만, 이 얼마나 기발한 아이디어인가! 강위원 관장은 그렇게 재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강연 또한 재미있게 해서 그 내용이 귀에 쏙쏙 들어왔다.

재미있다고 해서 농담을 하거나 실없는 소리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주민들의 더불어 즐거운 삶을 위해 자발적으로 어르신들이 복지관의 모든 일을 주도해 나가자'라는 딱딱한 주제를 가지고 하는 강의가 '재미 있어봐야 얼마나 재미 있겠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수업료를 내고 배울 수 있는 것이라면 배우고 싶을 정도의 명강의였다. 더불어락에서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2일차의 마지막 일정인 YMCA무진관으로 향했다.

나는 YMCA가 금남로에 있는 줄 모르고 갔다. 무진관에서 먼저 광산구 민형배 구청장의 '이제는 5.18의 암울한 기억에서 벗어나 행복한 광주, 행복한 광산구를 만들어야 된다'는 기조연설이 있고 난 다음 곧이어 오연호 대표의 '행복특강'이 있었다. 강의를 듣는 내내 '역시 오연호 대표다'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흐뭇했다. 15년 전에, 아니 그 이전에 기자시절부터 지켜봐 왔었는데 실망 시키지 않아서 참 고마웠다.

17일, YMCA무진관에서 '꿈틀버스' 2일차 일정까지 모두 마치고 일행은 저녁식사 장소로 자리를 옮겨 미처 나누지 못한 정담을 나누었다. 나는 빨리 식사를 끝내고 먼저 나와서 35년 전에 걸었던 금남로로 향했다. 마침 5.18전야제로 금남로는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붐볐고 임시로 마련한 무대에서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졌다.

나는 겪지도 않은 35년 전 그날을 떠올리며 아픔의 질곡을 겪고 그 아픔을 딛고 일어선 광주 시민에게 마음에서 우러나는 박수를 보내며, 임을 위한 행진곡이 제창되는 그날을 기다리며 금남로 통을 걸었다. 이렇게 나를 일깨우듯이 꿈틀버스는 많은 사람들의 살아 있음을 다시금 일깨우며 꿈틀꿈틀 2호차 준비를 하겠지.


태그:#꿈틀버스, #광주 광산구, #더불어락, #강위원 관장, #선운 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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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는 시원한 청량제, 겨울에는 따뜻한 화로가 되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쓴 책 : 김경내 산문집<덧칠하지 말자> 김경내 동시집<난리 날 만하더라고> 김경내 단편 동화집<별이 된 까치밥> e-mail : ok_0926@daum.net 글을 써야 숨을 쉬는 글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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