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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
▲ 체르노빌 다크 투어리즘 가이드 책 표지
ⓒ 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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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 노동자들은 자부심을 느끼고 방사능이라는 거대한 적과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을 펼치고 있다. 체르노빌 원전에서도 후쿠시마 제1원전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위대한 노동자들이 역사 속에 묻히지 않도록 기록하고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 국민, 전 세계를 향해 알려야 하지 않을까. 현장을 직접 보며 세상과 삶에 대한 철학적 물음에 다가서게 하고, 두 번 다시 똑같은 재앙을 겪지 않도록 당사자 의식을 갖게 하는 것, 다크 투어리즘의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다. - 163,164p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에 대해 들어본 일이 있는가? 국내에는 생소한 개념인 다크 투어리즘은 전쟁과 학살 등 참상이 벌어진 역사적 장소나 재난·재해 현장을 돌아보는 여행을 가리키는 단어다. 뉴욕 월드트레이드센터 부지인 그라운드 제로, 아우슈비츠 수용소,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유적지, 히로시마 평화 기념관 등이 대표적인 다크 투어리즘 명소로 꼽힌다. 국내에선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4.3 평화공원, 국립 5.18 민주묘지 등이 해당된다.

체르노빌 존(출입금지구역) 역시 다크 투어리즘의 명소 가운데 하나다. 1986년 4월 26일 발생한 체르노빌 원전사고는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러시아 3개국에 걸쳐 막대한 피해를 발생시킨 비극적 사건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터빈발전기의 관성력을 이용한 실험 도중 정지 상태에 가깝게 떨어진 출력을 무리하게 높이려다 원자로가 폭주한 것이 밝혀진 사고의 원인이다. 사고 당시 원전근무자와 소방관 등 31명의 생명이 산화했고 모두 70만이 넘는 사람들이 피폭으로 피해를 입은 것으로 집계되었다. 지금까지도 존은 엄격한 규제 아래 통제되고 있으며 제한된 소수의 사람들만이 진입할 수 있다.

존 투어는 언론인과 전문가를 대상으로 제한적으로 진행하던 것을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에서 공동으로 개최한 유로 2012를 전후해 일반에 개방했다. 현재 약 스무 개의 여행사가 정부 허가를 받아 영업하고 있으며 신청만 하면 누구라도 존 안으로 진입해 체르노빌 참사로 폐허가 된 도시를 걷는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존 투어는 매력적인 풍광을 찾아가거나 디즈니랜드와 같은 즐길 곳을 찾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우리는 매우 위태위태한 세계에 살고 있다는 점을 관광을 통해 세상에 널리 호소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체르노빌 또는 후쿠시마를 방문하는 최대의 의미는 인간의 자기의식 고양에 있습니다."

2008년부터 체르노빌 투어를 진행해온 'Tour 2 Kiev'의 사장 안드레 자첸코의 말이다. 원자력 발전소가 지닌 위험성을 대중에 계몽하기 위한 목적으로 여행사를 꾸려왔다는 그는 다크 투어리즘의 진정한 가치가 여행의 즐거움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의식 고양에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마티에서 출간된 신간 <체르노빌 다크 투어리즘 가이드> 역시 이와 같은 목적에서 쓰인 책이다. 책의 집필과 편집을 맡은 아즈마 히로키는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지역의 미래를 구상하고, 사고의 기억을 다음 세대에 전하는 방법을 강구하고 싶어 체르노빌을 찾았다고 밝혔다. 그는 관광의 형태로라도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의 현장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아직 끝나지 않은 참사, '체르노빌 원전사고'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1부는 취재진이 체르노빌에서 보낸 1박 2일을 정리해 실었고 2부는 출입금지구역청 부장관, 체르노빌박물관 부관장, 작가, 비영리단체 대표, 여행사 대표, 박물관 디자이너, 자발적 귀향자 등 다양한 입장의 현지인을 만나 취재한 내용이 담겼다. 후쿠시마 사고를 현장에서 조사한 저널리스트, 사회학자 등이 직접 취재에 참여했으며 관광학자, 러시아 문학연구가, 구소련 연구자, 영상작가 등의 칼럼이 책 후반부에 실려 깊이를 더한다.

책을 읽으며 받는 첫 번째 충격은 체르노빌 원전사고가 아직 끝나지 않은 참사라는 점이다. 체르노빌 발전소는 사고 이후에도 13년간 발전을 지속하다 2000년이 되어 원자로 가동을 멈췄지만 지금까지도 여전히 송전기지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현역 전력 시설이다. 사고가 일어난 원자로는 강한 방사능을 내뿜는 상태 그대로 석관이라 불리는 거대한 콘크리트에 묻혀 봉인된 상태다. 체르노빌 발전소에는 하루 2800명의 노동자가 출퇴근하며 사고 처리와 송전 업무를 맡아 진행하고 있다.

책에는 참사 이후의 체르노빌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존 안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과 폐쇄된 마을에 돌아와 거주하는 사마셜, 다크 투어리즘을 진행하는 여행사 직원이 그들이다. 저자들은 체르노빌에서 각기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깊이 있게 인터뷰해 그들의 생각을 듣고 그로부터 후쿠시마의 미래를 살펴본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체르노빌에 방문한 저자들의 의도는 너무도 명확하다. 후쿠시마는 이제까지와 같이 앞으로도 일본의 영토일 것이다. 참사는 여전히 계속된다.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집과 일터, 가족, 건강을 잃은 이들이 현존하고 그들의 고통은 앞으로도 오래도록 계속될 것이다. 누구보다 후쿠시마의 현재를 잘 알고 있는 저자들이 25년 먼저 같은 고통을 겪은 체르노빌을 방문해 얻은 교훈은 이러한 참사가 결코 반복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참사의 기억이 가능한 많은 이들에게 이성적·감성적으로 공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015년 현재 23기의 원전이 가동 중인 한국의 상황에서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의 사례는 결코 가볍지 않다. 30년 이상 노후 원전인 고리 1호기, 월성 1호기의 수명연장 문제가 적지 않은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요즘 이 책은 많은 시사점을 독자들에게 던져줄 것이다.

"제가 체르노빌에 사람을 안내하는 것은 돈 때문이 아닙니다. 체르노빌은 누구나 한번쯤 직접 봐야 하는 곳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곳을 보고 나면 사람들의 세계관이 바뀔 거라 생각합니다. 참가자 열 명 중 한 명이라도 이곳을 보고 뭔가 마음의 변화를 겪고, 살면서 또다시 이런 곳이 생기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인다면 그것으로 성공이지요." - 215p

덧붙이는 글 | <체르노빌 다크 투어리즘 가이드>(아즈마 히로키 지음 / 마티 / 2015.03. / 2만원)



체르노빌 다크 투어리즘 가이드

아즈마 히로키 외 지음, 양지연 옮김, 마티(2015)


태그:#체르노빌 다크 투어리즘 가이드, #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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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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