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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불편한 히어로 영화

어릴 때부터 나는 히어로가 등장하는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어쩌다 인연이 닿아서 보게 되면 재미있게 감상은 했지만, 즐기거나 찾아서 보는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릴 때 보았던 수많은 히어로 영화나 만화 영화 중 두 작품의 두 장면이 떠오른다.

하나는 크리스토퍼 리브가 주연한 미국 영화 <슈퍼맨>이다. 어릴 때 TV에서 우리말 더빙본으로 방영한 것을 보았는데, 어린 마음에도 걸리는 장면이 하나 있었다. <슈퍼맨> 2편에서 외계인이 지구를 침략해 위기에 빠진 상황이었다. 그때 외계인의 강압에 못 이겨 미국 대통령이 TV에 출연했는데, 외계인에게 저항하며 슈퍼맨에게 빨리 와서 지구를 구해달라고 호소하는 장면이 있었다.

영웅 슈퍼맨을 부각시키기 위해 그렇게 설정했겠지만, 영화 속에서 지구의 모든 행정, 국방, 치안 시스템은 무력하기만 했고, 슈퍼맨이 오자 모든 문제가 단번에 깔끔하게 해결되었다. 와! 정의가 승리했다. 재미있다! 라고 슈퍼 히어로물 마니아들이 환영할 만한 장면이었지만 나는 어린 마음에도 거부감을 느꼈다. 수십 억 명의 사람이 사는 거대한 지구가 위대한 영웅 한 사람에게 매달리는 게 말이 되나? 뭐, 이런 식의 거부감이었던 것 같다.

<슈퍼맨 2> 포스터
 <슈퍼맨 2> 포스터
ⓒ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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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는 초등학생 무렵에 본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만화 영화다. 외계인이 침략하고 지구에서 만든 로봇이 싸워서 물리치는 당시에 흔했던 공상 과학 만화 영화였다. 그런데,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이 만화가 기억나는 것은 마지막 부분 때문이다. 대부분의 공상 과학 만화 영화는 마치 오늘날의 히어로 영화들처럼 로봇 혼자서 외계인과 싸우고 위기를 겪다가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는 서사 구조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 만화는 달랐다. 당연히 로봇이 주로 싸우지만 지구의 군인들도 최종적인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며 함께 힘을 합쳐 침략자 외계인을 물리쳐냈다. 왠지 어린 마음에 이 만화가 당시의 그런 류의 만화 영화 중 가장 맘에 들었다.

어릴 때의 이런 기억은 중요한 내용이 아니기에 오랜 동안 잊고 살았다. 그런데, 지난 5월 20일(수)에 새로 시작한 드라마 <복면검사>를 보다가, 갑자기 내가 왜 천만 관객이 보았다는 영화 <어벤져스 : 에이지 오브 울트론>을 보고 싶어 하지도 않고, 다른 히어로 영화도 즐기지 않는지 이유를 알게 되었다. 바로 히어로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이루어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해 주는 히어로는 어차피 상상 속의 존재이고, 가상의 이야기를 즐길 뿐인데, 이런 걸 뭐 하러 심각하게 보느냐고 하겠지만, 그렇게 가볍게 보아 넘겨도 될 만한 문제는 아니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히어로물이 적지만...

<다크 나이트> 포스터
 <다크 나이트> 포스터
ⓒ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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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히어로 영화인 <배트맨> 시리즈에는 고담시라는 범죄로 얼룩진 도시가 나온다. 배트맨은 고군분투 하면서 이 도시의 부정부패와 악을 없애기 위해 범죄와 열심히 싸운다. 이 시리즈를 별로 즐기지 않기에 히스 레저의 유작이 된 <다크 나이트>만 우연히 보았을 뿐인데, 내가 느낀 이 영화의 주장은 "법으로는 정의를 구현할 수 없다" 였다. 그래서 히어로인 배트맨이 영화적 설정에 꼭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영화 입장에서만 본다면, 정의 구현도 악의 응징도 법으로는 되지 않는 세상을 보여주고 나서 배트맨이 악당과 싸워 통쾌하게 물리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훨씬 더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영화적 상상력으로만 그치지 않고 현실이라면 어떨까? 이보다 더 한심하고 끔찍한 세상은 없는 것이 아닐까?

몇 년 전 <시티헌터>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그 안에는 반값 등록금 등의 사회 문제가 하나의 소재로 들어갔는데, 한국형 히어로(?)인 시티헌터가 탐욕스런 대학 총장의 돈을 몰래 가져간 후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으로 해결했다. 최근 시작한 <복면검사>를 보니 대충 스토리가 검사가 법으로 처벌할 수 없는 힘 있는 자들을 복면을 쓰고 주먹으로 응징하는 내용으로 가는 것 같다.

통쾌하고 재미있는 이야기지만 이 속에서 불평등해져 가는 우리나라의 현실이 보이는 것 같아 씁쓸하다. 겨우 드라마 따위에 무슨 조국의 현실 운운 하느냐며 어이없어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느 시대든 대중이 즐기는 이야기에는 그 시대의 모습이 투영된다. 조선 시대의 탈춤에 양반에 대한 풍자와 조롱이 노골적으로 들어가고, 판소리 <흥부전>에 천한 신분이었다가 돈을 벌어 양반 행세를 하는 놀부의 이야기가 나오며, <춘향전>에서 어쨌든 천민 신분인 춘향이가 양반과 합법적으로 결혼해 정경부인까지 승진하는 등 하층민들의 꿈을 대신 실행해 주는 것을 보면 말이다.

외계인이 쳐들어와서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지구가 운석과 충돌하거나 자연재해가 일어나 히어로가 지구인들을 구하며 활약하는 영화라면, 저것이 영화적 상상력이 아니고 현실이라면 어쩌고 하는 필자의 이야기는 별 쓸데없는 걱정이라며 핀잔을 받고도 남을 소리다. 하지만, 배트맨부터 시작해서 최근 등장하는 몇몇 히어로물을 보면 왠지 필자의 기우가 꼭 쓸데없는 거라고 안심할 수만은 없다.

작품은 사회의 현실을 반영한다

<복면검사> 포스터
 <복면검사> 포스터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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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당무계하게 외계인과 싸우는 히어로가 아닌, 현실의 부패한 고위층을 혼내주는 히어로가 등장하는 작품이 나온다는 것은 사람들이 대리만족을 위해서라도 그런 류를 원한다는 것이다. 서민들이 법이 해결해주지 않는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하거나 목격을 하고,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복면검사 같은 히어로의 주먹질 한방에 풀어버리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닐까?

겨우 한두 편 나온 걸 가지고 한국형 히어로물의 발목을 잡고 싶은 것이냐? 우리도 미국처럼 폼 나는 히어로를 한국 버전으로 갖는 게 뭐가 나쁘냐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외계인과 싸우거나 괴물과 싸우는 히어로라면 말리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사회의 부조리와 싸우는 신분을 감춘 한국형 히어로 영화나 드라마를 만들어서는 절대 안 된다고 강요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죄를 지으면 그 누구든 그 죄에 합당한 벌을 받고, 우리 사회는 공정하고 정당하게 운영되고 있다고 느낀다면, 법망을 빠져나가는 악독한 특권층을 단죄하는 드라마나 영화가 나오더라도 사람들이 비현실적이라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내용을 담은 드라마가 큰 인기를 얻고 누구나 공감하며 보는 작품이 된다면 우리나라는 법과 원칙에 따라 운영되는 나라가 아닌 것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이제 새로 시작한 드라마의 흥행에 찬물을 끼얹는 소리만 한 것 같아 제작진 모두가 서운해할 수도 있겠다. 개인적으로 <복면검사>는 스토리도 괜찮았고 출연 배우들도 모두 내가 좋아하는 이들이라 마지막 회까지 열심히 볼 생각이다. 탄탄하고 재미있는 드라마로 완성되어 내가 재미있게 보았던 <각시탈>에 필적할 성과를 거두기를 기대한다.

다만 먼 미래를 살아갈 우리의 후손들이 그 시대에는 사회가 하도 불평등해서 우리 조상님들이 슈퍼 히어로 드라마나 영화를 보며 울분을 해소했다고 역사 시간에 배우는 불행한 상황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소수 의견을 제시해 본 것뿐이다. 드라마나 영화가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대중 예술은 당시 대중의 생각과 정서와 바람을 담았을 뿐이다. 만약 문제가 있다면 대중 매체에 그런 내용이 들어가도록 잘못 굴러가고 있는 사회가 책임져야 하지 않을까?


태그:#히어로, #복면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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