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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는 아이는 언제나 따사로운 마음이 됩니다.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라면 언제나 주눅드는 마음이 됩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서 살아간다면, 몸을 얻어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짝을 지은 어버이가 있기 때문이요, 열 달 동안 몸속에 고이 품으며 나를 돌본 어머니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낳은 어버이한테서 제대로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느낀다면, 어버이한테서 제대로 사랑을 받지 못하더라도 다른 수많은 이웃한테서 사랑을 받습니다.

날마다 먹는 밥과 늘 입는 옷과 기쁘게 잠드는 집을 일군 수많은 이웃이 있습니다. 버스를 모는 일꾼이 있고, 책을 쓴 어른이 있으며, 영화를 빚거나 만화를 그린 누군가가 있습니다. 공장에서 연필을 깎은 일꾼이 있으며, 가게에서 물건을 파는 일꾼이 있어요.

여기에 숲과 바다와 하늘이 있습니다. 숲에서 수많은 나무가 우리한테 푸른 숨결을 베풉니다. 바다에서 너른 품을 베풉니다. 하늘은 파랗게 물든 바람을 베풉니다. 새와 개구리와 풀벌레가 고운 노래를 베풉니다. 온누리를 가득 채우는 가없는 별이 밤마다 반짝반짝 빛납니다. 이 모두를 찬찬히 느끼든 못 느끼든, 이 모든 숨결과 넋과 바람이 우리를 둘러싸면서 흐릅니다. 그러니, 우리는 늘 모든 이웃한테서 사랑받는 목숨입니다.

겉그림
 겉그림
ⓒ 양철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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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들이 감당하기 힘든 일이 있으면 그저 사춘기라서 그렇다는 둥 반항기라서 그렇다는 둥 쉽게 말해 버리잖아. 그러면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아도 되니까 편하겠지."
"가스리도 그런 선생님을 만난 경험이 있나 보지?"
"있고말고요."

잘난 척하며 가스리가 대답하자, 미네코가 말했다.
"그런 말을 자랑스레 떠벌리는 애도 똑같이 둔해."
순간, 가스리는 발끈해서 곧바로 되받았다. "그런 말로 자기 자식을 탓하는 부모도 둔해."(<소녀의 마음> 10, 21쪽)

하이타니 겐지로님이 쓴 청소년문학 <소녀의 마음>(양철북, 2004)을 읽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소녀'는 열여섯 살입니다. 열여섯 살 나이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헤어집니다.

어머니는 새로운 사내를 맞아들여서 딸아이와 함께 삽니다. 아버지는 홀로 판화를 새기는 일을 하면서 삽니다. 어머니가 새로 맞아들인 사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집을 떠납니다. 열여섯 살 아이는 이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봅니다. 혼자 사는 아버지한테 생긴 새로운 짝을 한 번 만나는데, 아버지는 다시 혼인을 할 뜻이 없습니다. 아니, 다시 혼인을 하더라도 아이를 더 낳을 마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새롭게 생긴 짝을 떠나 보내고, 다시금 홀로 조용히 판화를 새기면서 삽니다. 이동안 '소녀'는 한 살을 더 먹고, 또 한 살을 더 먹습니다.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애쓰는 건 괜찮지만, 무조건 학교에 보내려고만 하니까 엣짱은 껍데기 속에 웅크린 달팽이가 되어 버렸어." 
"아이를 물질적으로나 금전적으로 고생시킨 적은 없고?"
"당연하지."
"아주 상식적인 사람들이겠지?"
"물론이야."
"이혼은 절대 하지 않을 사람들?"
"아마도." 가스리와 키쿠코는 얼굴을 마주보고 후후후 웃었다.

"보통 사람들은 그걸 행복이라고 말하겠지?"
"그렇겠지."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을 수 있잖아. 그런데 평소랑 조금 다른 걸 가지고 '왜 그래? 무슨 일이야?' 하고 꼬치꼬치 캐물으면, 엄만 좋겠어?"(본문 38, 39, 64쪽)

<소녀의 마음>에 나오는 아이는 '어머니 집'에서 살지만 틈틈이 '아버지 집'으로 나들이를 갑니다. 어머니 집에서 어머니와 늘 툭탁거리면서 마음이 다치면, 아버지 집에서 아버지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다친 마음을 풉'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갈라진 뒤 아이가 이렇게 지낼 수 있는 집은 얼마나 있을까 모르겠지만, 어머니와 아버지가 갈라지더라도 아이가 스스로 씩씩하게 살도록 이끌려는 마음이라면, 아이는 '기쁜 사랑'을 생각하고 찾으면서 앞으로 한 걸음씩 내딛을 수 있으리라 느낍니다.

그러니까, 아이가 기쁜 사랑으로 자라고, 어버이도 기쁜 사랑으로 살림을 꾸리는 길은 '이혼은 죽어도 안 해야 하는 집'이 아닙니다. 어버이가 돈을 많이 벌어서 아이들한테 돈 걱정을 안 시킨대서 아이가 기쁘지 않아요. 어버이가 언제나 맛난 밥을 잔치처럼 차려 준대서 아이가 기쁘지 않아요. 아이가 눈부시게 고운 옷을 늘 입고 다닐 수 있대서 아이가 기쁘지 않아요.

겉모습이나 겉차림 때문에 기쁠 아이는 없습니다. 어른도 이와 같으리라 생각해요. 겉을 아무리 잘 꾸민다고 해서 기쁠까요? 말끔한 옷과 번듯한 자가용을 남 앞에서 뽐내야 삶이 기쁠까요?

"오해하지는 마. 엄마, 엄마가 누굴 사귀든 그건 엄마 자유고, 그것 때문에 내 기분이 나쁘다면 그건 내가 이상한 거지. 다만 내가 조금 기분이 나쁜 건, 엄마가 그 사실을 숨기고 있다는 거야." 
"뭐 어때서? 고등학생이든 대학생이든, 시집을 가든, 난 아빠랑 손 꼭 잡고 다닐 거야. 그러니까 아빠, 너무 싫어하지 마." 
"난 아빠 닮을래."
"그러지 마." 사내가 힘주어 말했다.
"가스리는 아빠를 닮지도 않았고, 엄마를 닮지도 않았어. 가스리는 가스리야."(본문 67, 77, 110쪽)

놀이를 하면서 누릴 수 있는 밥 한 그릇이라면, 아이도 어버이도 언제나 웃는 하루가 됩니다.
 놀이를 하면서 누릴 수 있는 밥 한 그릇이라면, 아이도 어버이도 언제나 웃는 하루가 됩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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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한 그릇을 끓여서 한두 젓가락씩 나누어 먹더라도 깔깔 하하 호호 웃으면서 노래할 수 있습니다. 참말 놀라운 잔치밥을 차려서 먹더라도 아무 말을 않고 쥐죽은듯이 조용히 밥만 삼킬 수 있습니다. 콩 한 알을 두 쪽으로 갈라서 먹으면서도 배가 부를 수 있습니다. 수박 한 덩이를 혼자 먹으면서도 어쩐지 허전할 수 있습니다.

아이 마음이란 아이와 같은 눈길로 이곳에 서면 읽을 수 있습니다. 모든 어른은 처음에 아이였으니, 오늘 이곳에서 '나는 어른이야' 하는 생각으로만 선다면, 아이하고는 도무지 말을 섞을 수 없습니다. 모든 어른도 처음에 아이인 줄 슬기롭게 깨달으면서, 오늘 이곳에서 '너도 나도 똑같은 아이야' 하는 마음으로 눈길과 넋을 고요히 맞출 수 있으면, 아이가 오롯이 품은 마음을 함께 느낄 수 있습니다.

"우에노,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어. 세상 어느 누구도.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살아 있는 한 누구한테든 사랑받고 있어." 
"인간이란 원래 갈팡질팡하는 존재지만, 한 번 결정한 것을 쉽게 번복하는 모습은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에게 안타깝게 비치지 않을까? 그러니까 너는 그 모습을 민감하게 받아들인 거겠지." 
"아무리 남한테 신세를 져도 주눅 들 필요는 없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건 자기 자신이야. 신세도 갚고 인생도 즐기며 살면 천당에 간답니다."(본문 133, 195, 200쪽)

<소녀의 마음>에 나오는 아이는 '할 말을 숨기는 사람'을 달가이 여기지 않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채 움직이는 사람은 하나도 반갑지 않습니다. 제 어머니라 하더라도 속마음을 숨긴 채 겉으로는 아닌 척하면 영 못마땅합니다.

아이는 사람들이 왜 속마음을 자꾸 꽁꽁 감추려고 하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아직 아이라서 이를 모를 수 있겠지요. 그러나, 아이 눈길로 바라보고,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우뚝 서는 마음길로 바라본다면, 우리가 서로 속내를 숨겨야 할 까닭은 딱히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 기쁨을 함께 나누는 사이입니다. 우리는 서로 슬픔을 같이 나누는 사이입니다. 기쁨만 함께 나누어야 하지 않습니다. 슬픔은 꽁꽁 가두어야 하지 않습니다. 생채기나 아픔을 홀로 삭인다고 해서 사라지거나 줄어들거나 아물지 않습니다.

<소녀의 마음>에 나오는 아이는 바로 이 대목을 바랍니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모두 스스럼없이 털어서 나누기를 바랍니다. 아버지하고 헤어진 어머니가 '새 남자친구'를 사귀든 '새 애인'을 만나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어머니 삶'이라고 여기니까요. 그런데, 이를 꽁꽁 숨기거나 감추려고 하면 답답합니다.

무엇이든 더 잘 해야 한다는 삶이 아닌, 무엇이든 늘 즐겁게 누리는 삶이 될 때에, 함께 웃고 노래할 수 있으리라 느낍니다.
 무엇이든 더 잘 해야 한다는 삶이 아닌, 무엇이든 늘 즐겁게 누리는 삶이 될 때에, 함께 웃고 노래할 수 있으리라 느낍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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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리가 조그맣게 말했다. "부모가 이혼한 것 때문에 아이들이 고통받는 건 싫어."
사내가 말했다. "그것은 네가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겠지." 
"너희 아버지, 말을 안 하고 있으면 무서워 보이지만, 일단 대화를 나누면 상대방을 편안하게 만들지? 그게 가난한 사람들의 냄새거든." 가스리의 입가에 살짝 웃음이 번졌다.
"가난해서 무척 힘든 시절이었을 텐데도 그 시절 얘기를 할 때면 아빠가 얼마나 즐거워 보이는지 몰라."(본문 226, 241쪽)

즐겁게 살려고 할 적에 즐거운 삶입니다. 사랑스레 살려고 할 적에 사랑스러운 삶입니다.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돈을 많이 벌면서 살려고 하면 돈을 많이 벌면서 꾸리는 삶입니다. 노래하며 살려고 하면 노래가 흐르는 삶이요, 꿈으로 가득한 하루가 되기를 바라면 언제나 꿈으로 가득한 하루가 흐르는 삶입니다.

어버이는 아이한테 사랑스러운 삶을 물려주는 넋입니다.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사랑스러운 삶을 물려받는 숨결입니다. 어버이는 아이와 함께 기쁜 살림을 알뜰살뜰 가꾸는 넋입니다. 아이는 어버이와 함께 씩씩하게 자라면서 집일을 돕고 집살림을 거들다가 어느새 홀로서기를 배우는 숨결입니다.

가시내도 사내도 모두 따뜻한 마음일 때에 사랑입니다. 어버이도 아이도 서로 따뜻한 마음으로 만날 적에 사랑입니다. 청소년문학 <소녀의 마음?은 열여섯 살에서 열여덟 살 나이로 흐르는 아이 목소리를 빌어서 '삶을 사랑하는 하루를 짓는 마음'이 어떻게 태어나서 자라고 뿌리를 내리는가 하는 대목을 가만히 짚습니다.

이 땅에서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라면, 아이가 어느 대학교에 붙을까 하는 근심이나 걱정보다는, 아이가 스스로 씩씩하게 서는 길을 돌아보는 마음이 될 수 있기를 빕니다. 이 땅에 태어나 어버이와 하루를 누리는 아이라면, 어버이하고 마음을 여는 이야기꽃으로 기쁘게 노래할 수 있기를 빕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글쓴이 누리사랑방(http://blog.naver.com/hbooklove)에 함께 올립니다.

책이름 : 소녀의 마음
하이타니 겐지로 글
햇살과나무꾼 옮김
양철북 펴냄, 2004.1.30.



소녀의 마음 - 개정판

하이타니 겐지로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양철북(2008)


태그:#소녀의 마음, #청소년문학, #하이타니 겐지로, #책읽기, #삶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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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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