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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한 사립대학 교정을 한 교수가 홀로 거닐고 있다.
▲ 교수는 스승이 될 수 있을까 서울의 한 사립대학 교정을 한 교수가 홀로 거닐고 있다.
ⓒ 하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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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번에 OO대 순위평가 성적 개판인 거 누구 책임이냐?"
"누구긴 철밥통들이지!"

각종 대학 순위평가 발표일, 각 대학 게시판은 자축 혹은 책임 소재를 논하는 분위기가 과열된다. 이날 만큼은 학생이 총장을 부르며 호되게 질책해도 용서가 된다. 왜냐하면, 스스로를 '고객'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기 대학의 순위로, '브랜드 가치'가 결정되고 수험생들과 기업 등에 체면이 선다는 식이다.

때론 분위기가 진지하다 못해 살벌해, 응어리진 감정이 대학 훌리건 문화로 굴절되기 일쑤다. 자신들의 '본진' 방어 전략을 짜고, 타대 게시판을 '공격'하기 위해 원정을 떠난다. 주로 자신들에 유리하고 타대엔 불리한 순위차트를 수집제작 및 유포하며 상호 비방 경쟁을 벌인다.

적은 내부에도 있다.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하므로 치열한 전쟁에 쓸모없는 '무임승차자'는 배제해야 한다. 논문 실적 C등급 교수가 연구실 방을 빼게 되면, 자세한 맥락은 관심 없지만 일단 환영한다. 대학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교수들에겐 '철밥통' 딱지가 붙는다. 교수의 논문은 숫자 '1'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높은 '기록'에 기여해, 학교 '순위'를 높여 '체면'을 살리면 그게 밥값을 하는 거다. 참스승 따윈 없다.

대학교육에 시장경쟁 도입하면 좋아지나? "등록금만 높아져"

옥스퍼드대.
▲ 하워드 홋슨 교수 옥스퍼드대.
ⓒ 옥스포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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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중심으로 시장논리가 전세계 대학교육에 확산된 이후, 많은 이들이 대학을 교육보단 취업을 위한 투자 상품 관점에서 보기 시작했다. 대학 순위평가는 고객인 수험생과 학부모, 정부와 기업에 제공되는 상품 카탈로그처럼 이를 더욱 부추긴다.

2010년 영국 정부는 대학들 사이에 공공성을 낮추고 시장경쟁을 도입하겠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러면 교육수준은 높아지고 가격(등록금)은 낮아질 거라는 발상이다. 당국자들이 내세운 주요 근거는 미국이 최상위권을 휩쓸고 있는 THE-QS 연간 세계대학순위였다. 하지만 그들은 옳았을까?

"NO!" 옥스퍼드대 하워드 홋슨 교수는 단호하다. 분석을 위해 수집한 데이터만 7년 치(2004~2011), 이미 4년 전 분석이 끝났다. 요지는 이렇다. 단순 비교는 평균적으로 상위 20위 대학 중 미국이 13군데로, 4군데인 영국보다 3배 이상 우위로 '보인다'. 하지만 두 나라 인구, 경제, 교육투자 등을 고려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우선 영국은 미국보다 인구 대비 거의 두 배 가까운 학생들이 상위 20위권 대학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는다(756명당 1명 대 1383명당 1명). 또한 미국이 고등교육에 영국보다 16배 이상의 돈을 쓴다는 것(약 4360억 달러 대 약 263억 달러)을 감안하면 고작 3배 정도의 효과는 초라하다.

순위를 상위 200위까지 넓히면 영국은 완만하고 점진적으로 분포하지만, 미국은 몇몇 부유하고 독점적인 사립대학들이 최상위권에 집중된다. 미국의 4년제 대학은 2774군데 중 2.6%, 영국은 165군데 중 약 17.6%가 상위 200위다.

이유는 불균등이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시장경쟁 언어로 미국 각 주에 위치한 소수 사립대학들은 투자를 빨아들인다. 공립대학이 사립대학과 거리가 멀수록, 높은 순위에 올라가는 경향은 이를 잘 드러낸다. 결국, 대학교육은 '선택과 집중'보다 '분배와 균형'이 적합하다.

서울 A모 사립대학의 한 교수 공동연구실 앞 풍경. 학교라기보단 오래된 산업연구소의 을씨년스러운 느낌이 나지만, 그 와중에도 '교수님 감사합니다'라는 스승의 날 맞이 데코레이션이 보인다.
▲ 명문대의 탄생(?) 서울 A모 사립대학의 한 교수 공동연구실 앞 풍경. 학교라기보단 오래된 산업연구소의 을씨년스러운 느낌이 나지만, 그 와중에도 '교수님 감사합니다'라는 스승의 날 맞이 데코레이션이 보인다.
ⓒ 하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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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시장경쟁을 도입하면 등록금은 높아진다. 명문대는 개방시장에서, 마치 명품 옷처럼 취급되기 때문이다. 더 자질있는 아이의 덜 부유한 부모들이 부담할 수 없는 수준으로의 수업료 인상 기회는, 덜 자질있는 아이의 더 부유한 부모들에겐 즐거울 수 있다. 낮은 등록금이 사회적 존경심을 훼손시킨다는 한 정치인의 말이 오버랩되는 건 기분탓은 아니다. 실제로 수업료와 기숙사비로 연간 최소 5만달러를 학생에게 부과하는 미국 사립대학은 100개 이상이다.

하지만 '유서 깊은 대학'은 경쟁을 도입한들 즉각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상품이 아니다. 따라서 영국보다 전통과 역사가 짧은 미국·한국대학들은,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해 더 많은 투자의 악순환을 겪게 된다. 어떻게든 '고객 심리'의 만족, 즉 '학생경험'을 제공하려면 건물공사·취업 및 사회적 행사 프로그램 등이라도 실시해야 한다. 물론 부담은 '고객'의 몫이지만.(하워드 홋슨, <미국대학 우위론을 다시 생각한다>)

대학 순위평가 '돈 되는' 조중동은 웃지만, 과연 도움 되나?

국내에서 언론사 대학 순위평가를 실시하는 대표적인 '조중동' 신문. 대학교육연구소에 따르면, 국내 대학들이 광고에 쓰는 돈은 2010년부터 평균 1000억원이 넘고 꾸준한 증가추세다. 묘하게도, 광고 횟수가 늘어나는 건 입시철과 조중동의 대학평가 발표 시점과 겹친다. 이들 신문 1면 우측 상단에는 모두 대학광고가 실려있었다.
▲ 조중동 국내에서 언론사 대학 순위평가를 실시하는 대표적인 '조중동' 신문. 대학교육연구소에 따르면, 국내 대학들이 광고에 쓰는 돈은 2010년부터 평균 1000억원이 넘고 꾸준한 증가추세다. 묘하게도, 광고 횟수가 늘어나는 건 입시철과 조중동의 대학평가 발표 시점과 겹친다. 이들 신문 1면 우측 상단에는 모두 대학광고가 실려있었다.
ⓒ 하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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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울하게도 이후 영국의 등록금은 상한선인 연간 9천 파운드(당시 한화 1620만 원)에 근접했다. 한국 교육학계도 대학 순위평가의 통계적 문제점을 인식하고 최근까지 비판을 진행하고 있지만, 논의 수준은 지표개선 단계에 머무르는 편이다.

<대학 순위평가와 대학의 몰락>의 저자 중앙대 고부응 교수는, 보다 근본적 차원에서 대학이 어떤 곳인지 질문을 던진다. 안주거리는 '중앙일보 대학평가'다. <중앙일보> 주장의 요지는 이렇다: 학생과 학부모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대학을 "선의의 경쟁"을 이끌어 "교육의 질과 연구역량을 강화"한다는 거다. 고 교수는 이를 반박한다.

우선 상위 20위권 이내 대학의 순위 만이 공개되는데, 10년 간(2003~2013) 데이터를 보면 순위 변화도 거의 없고 중·하위권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대학이 교육과 연구가 이루어지는 곳이라면, 정보는 그것들에 대한 정보라야 하지만 알맹이가 없다. 가령, 2012년 10월 8일자 보도에는 서울대가 교육여건 1위를 했고, 그 이유는 총장이 455억원의 기부금을 모았고 학부생 등록금 대비 장학금이 25%라는 설명이 전부다.

기부금이 어디에 쓰이고, 학생들이 어떤 교육을 받고 지적 성장을 이루는지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국제화 부문 순위가 높다는 게, 영어나 일본어를 잘하는 학생이 많다는 건지 세계 어떤 나라와 어떤 식으로 학문적 교류를 하고 있는지 아무 정보가 없다. 단지 '숫자'로 국제화 부문에 몇 점을 받았기 때문에 최고라는 식이다.

하지만 그는 확실히 경쟁(선의인지는 몰라도)을 부추기는 건 맞다고 일침을 놓는다. 4년 간(2008~2012) 상위 4개 대학의 교육여건, 교수연구, 국제화 부문의 종합점수는 50% 이상 상승했다. 이 말을 쉽게 바꾸면 대학의 재정, 논문 편수, 유학생과 외국 국적 교수 숫자가 경쟁적으로 팽창하고 있다는 거다. 특히 교수연구 부문은 논문이 몇번 인용됐는지도 평가하지만, 그것이 어떤 맥락에서 인용됐는지 비판을 위한 건지 혹은 인정을 위한 건지도 알 수 없다. 그저 교수들이 "얼마나 경쟁에 몰입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예증"일 뿐이라고 그는 말한다.

'스승'과 '논문 기계' 사이에 선 교수들

스승의 날 맞아 중앙대 학생들이 15일 서울중앙지검에 조사를 받기 위해 출석하는 박용성 전 두산그룹 회장이자 전 중앙대 이사장에게 건넨 카네이션이 바닥에 떨어져 있다.
▲ 바닥에 떨어진 카네이션 스승의 날 맞아 중앙대 학생들이 15일 서울중앙지검에 조사를 받기 위해 출석하는 박용성 전 두산그룹 회장이자 전 중앙대 이사장에게 건넨 카네이션이 바닥에 떨어져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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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업적은 물론, 다국적 미디어 정보 기업인 톰슨 로이터(Thomson Reuters)가 선정하는 목록(JCR)에 있는 학술지나 한국연구재단 등재 학술지(KCI) 등재 논문만 인정된다. 특히 영어로 쓰여져 등재되기 유리한 이공계 논문이나 점수가 높은 해외논문은 환영 받는다. 인문학적 저술이나 번역 사업, 신문·잡지를 통한 지식의 사회공급이나 사회참여는 '사치'가 된다. 성실한 강의 준비보단 "대중이 읽지도 않는" 논문을 많이 쓰는 게, '유능한' S등급 교수의 지름길이다.

대학이 '대학'과 '취업학원' 사이에, 또 학생이 '학생'과 '재고품' 사이에 서있는 만큼, 교수도 '스승'과 '논문 기계' 사이에 선다. 단순한 통계지표로 잡히지 않는 부분들, 경쟁을 제외한 대학의 가치: '자유와 진리', '정의와 평등', '아름다움과 덕' 등은 탈색된다. 배제된 부분들이 어떤 나비효과를 불러 대학의 몰락으로 치닫게 될지 그 징후를,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영어영문학' 전공 교수는 경고하고 있다.(고부응, <대학 순위평가와 대학의 몰락>)

'대학'이 다양한 학문과 가치담론을 통해 인격을 도야하는 장이며, 학생·교수·사회가 함께 저술하는 서사적 맥락이라면 결코 세계랭킹 상위권에 들 수 없으며 들 필요도 없다. 그러나, 영국과 같은 전통도 쌓지 못했고 미국처럼 많은 부를 낭비할 수도 없으면서 오직 세계랭킹을 위한 '명품'대학이 되려 한다면 언젠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후자를 '대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독자들 판단의 몫이다. 단지 후자에서 웃을 확률이 높은 건 미국 대학, 그것도 소수의 사립대학이다.

중앙대 교지편집위원회 <중앙문화> 67호에 실린 풍자만화 <교수일기>. 논문 성과로 닦달하는 대학 풍조를 해학적으로 풍자하고 있다.
▲ 교수 일기 중앙대 교지편집위원회 <중앙문화> 67호에 실린 풍자만화 <교수일기>. 논문 성과로 닦달하는 대학 풍조를 해학적으로 풍자하고 있다.
ⓒ 중앙대 교지편집위원회 중앙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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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전체보기 : 중앙대 교지편집위원회 <중앙문화>, 교수일기)



태그:#대학 순위평가, #대학순위, #대학랭킹, #세계 대학 랭킹, #세계 대학 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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