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솔직히 말하면 초보 여행자에 불과한 내게 로마와 이탈리아는, 아니 유럽은 단 며칠 사이에 명소 앞에서 사진 찍기만 하는 패키지여행 상품도 과분할 것입니다. 그런데 '미술 기행'이란 거창한 타이틀까지 달고 혼자서 한 달간의 모든 일정을 소화하려니 말그대로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 찢어지는 뱁새 신세 같습니다. 이제 겨우 나흘째인데 말입니다. 아직 이탈리아는 넓고, 봐야 할 것들은 많습니다. 

로마에서의 마지막 날, 오늘은 고대 로마의 흔적들을 천천히 둘러보고자 합니다. 보통의 여행자들과 마찬가지로 당연히 '콜로세움'이 오늘의 첫 일정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콜로세움' 또는 '콜로세오(이탈리아 원어로는 Colosseo가 맞는 말입니다)'는 로마, 아니 이탈리아의 상징입니다. 미술기행이란 타이틀에 맞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건축도 넓은 의미에서 미술이라고 자의적으로 해석하고는 길을 나섭니다. 

로마의 풍경

로마 '콜로세움'(또는 콜로세오)
▲ 콜로세움 로마 '콜로세움'(또는 콜로세오)
ⓒ 박용은

관련사진보기


선선한 아침 공기를 맞으며 이전과 다른 방향으로 길을 잡았습니다. 오늘은 되도록 지도에 얽매이지 않고 '콜로세움'과 그 주변 여기저기를 돌아볼 작정입니다. 사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 이 시각에 돌아다닌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10년 넘게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말그대로 해가 중천에 뜰 무렵에야 겨우 일어나곤 했습니다. 따라서 이 시간은 나에게 죽은 시간인 셈이지요. 여행은 이처럼 사람을 변하게 하나 봅니다. 

로마와 이탈리아를 여행한 이들의 공통된 의견 중 하나가 거리와 건물이 너무 지저분하고 정돈이 안 돼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내가 본 로마의 거리는 무척 지저분했습니다. 거리 곳곳에 치워지지 않은 쓰레기들과 담배꽁초가 너무 많았고, 벽이 갈라지거나 페인트가 벗겨지고 낙서로 가득한 건물들도 많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노숙자들이나 걸인들이 무시로 나타나 손을 벌리기도 하고 심지어 여행객들을 무슨 먹잇감 노리듯 바라보는 것 같았습니다. 세계 10위권 안에 드는 경제 대국이 맞나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어떤 이들은 이탈리아 공직 사회에 만연한 부패 구조와 무사 안일주의를 비판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선조들의 위대한 영광에 기대기만 하고 현실을 바꾸려 하지 않은 국민성을 탓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결국엔 외부자의 시선일 뿐 이탈리아 사회와 문화에 대한 진지한 성찰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겨우 나흘 동안 이탈리아를 느낀 주제에 그것들을 고민하기엔 아직 너무 이른 감이 있어서 생각을 접기로 했습니다.

단, 확실한 것은 그럼에도 로마인들 대부분이 활기차고 친절하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부러울 정도로 말입니다. 아, 참! 딱 한 가지 견디기 힘든 것은 담배 연기입니다. 로마 거리 어디를 가든 담배 냄새가 끊어지지 않는데, 마치 로마 전체가 거대한 흡연실 같은 느낌입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나로서는 정말 고역이었죠.

그렇게 많은 것들을 생각하면서 선선한 아침 거리를 걸어 '콜로세움' 앞에 섰습니다. 그런데 '콜로세움'은 그런 고민들은 정말 쓸데없는 것들이라 말하는 듯 보는 이를 압도합니다. 그것은 엄청난 크기 때문이었습니다. '콜로세움'이라는 이름부터가 거대하다는 뜻의 라틴어, '콜로살레(colossale)'에서 유래했다니 그 규모는 사진으로만 보던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콜로세움 안에 들어가니 다른 광경이 보인다

아래층부터 도리스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의 원기둥들이 80개의 아치를 끼고 늘어서있는 콜로세움의 외벽입니다.
▲ 콜로세움 2 아래층부터 도리스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의 원기둥들이 80개의 아치를 끼고 늘어서있는 콜로세움의 외벽입니다.
ⓒ 박용은

관련사진보기


높이 48미터, 전체 4층으로 이뤄진 외벽은 잘 알려진 것처럼 아래 층부터 도리스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의 원기둥들이 80개의 아치를 끼고 늘어서 있습니다. 이를테면 고대 그리스 건축 양식의 집합체인 셈입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미술 기행'이라는 주제로 바라볼 수 있는 '콜로세움'은 딱 거기까지밖에 없었습니다. '콜로세움'은 어쩔 수 없이 다른 방향으로 바라봐야 할 것 같습니다.

표를 사고 '콜로세움' 내부로 들어갑니다. 그러자 밖에서 보던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의 공간이 펼쳐집니다. 거대한 기둥들과 벽들이 마치 미로처럼 이어집니다. 안내 표지판을 따라 2층으로 올라서니 그 거대한 규모가 다시 한눈에 들어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콜로세움'은 공공건물입니다. 정식 명칭인 '플라비우스 원형경기장'(Amphitheatrum Flavium)'에서 알 수 있듯이 영화 <글래디에이터>로 유명한 검투사 경기뿐만 아니라 맹수 시합, 서커스, 연극 공연 등 다양한 볼거리들이 이어졌던 건물이죠. 황제나 귀족들뿐만 아니라 자유민, 여성, 노예들까지도 이용할 수 있는 문화, 스포츠, 유흥의 복합 건물인 셈입니다.

물론 고도의 통치술의 하나였겠지만, 그래도 그 시절에 황제의 궁전이나 신전이 아닌 공공건물을 이토록 거대하게(약 5만5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지었다니, 간단치 않은 고대 로마의 역사가 느껴집니다.

웅장한 콜로세움의 내부. 수없이 많은 검투사와 노예, 이민족, 이교도들의 피가 흐르고 있는 콜로세움을 바라보는 마음이 무겁습니다.
▲ 콜로세움 3 웅장한 콜로세움의 내부. 수없이 많은 검투사와 노예, 이민족, 이교도들의 피가 흐르고 있는 콜로세움을 바라보는 마음이 무겁습니다.
ⓒ 박용은

관련사진보기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고대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건물의 거대함뿐만이 아니라 피로 얼룩진 잔혹한 인류사입니다. 처음 개장 당시 희생당한 9000여 마리의 야생 동물들을 시작으로 수없이 많은 검투사와 노예, 이민족, 이교도들의 피가 '콜로세움'에 흐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피의 역사가 거의 500년 가까이 이어졌다고 하니 보는 내내 마음이 무겁습니다. 전 세계에서 찾아오는 수많은 여행자들은 거대한 폐허처럼 남은 이 비극의 현장에서 무엇을 보고 느낄까요?

콜로세움을 '여민락(與民樂)'의 광장이 아니라 '우민(愚民)'의 광장으로 본 신영복 선생의 지적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로마의 몰락이 이민족의 침입 때문이 아니라 "로마 시민이 우민화될 때" "로마가 로마인의 노력으로 지탱할 수 있는 크기를 넘어섰을 때"(신영복, <더불어 숲> 1권 중) 시작됐다는 선생의 지적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현대 이탈리아가 어떤 가치를 지향하고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어제 만났던 오르비에토의 '슬로시티 운동'이나 몇 년 전 우리나라에도 알려져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던 '협동조합 운동' 같은 긍정적 가치들을 떠올려 봅니다.

반대로 '콜로세움'으로 오는 도중 생각했던 부정적인 모습들도 다시 떠오릅니다. 한 달 간의 짧은 '미술 기행'으로 무슨 답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마는 그런 고민과 성찰이야 말로 저 거대한 '콜로세움'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이유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봅니다.

거대한 업적 홍보문

'콜로세움' 바로 옆에는 '콘스탄티노 개선문(Arco di Constantino)'이 있습니다. 이 문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기독교를 공인하고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긴 그 황제 말입니다)가 '밀비우스 다리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문입니다.

일화에 따르면, 312년 로마 사분치제(四分治制)의 경쟁 황제 막센티우스와의 결전이 이뤄졌는데, 그때 콘스탄티누스는 "정오의 태양 위에 빛나는 십자가가 나타나고, 그 십자가에는 '이것으로 이겨라'는 글자가 쓰여 있는" 환영을 봤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유세비우스의 창작 내지 뜬소문로 여겨지지만, 콘스탄티누스는 결국 밀비우스 다리에서 벌어진 전투를 대승으로 이끌었고, 이로써 로마 전체를 지배하게 되죠. 그 이후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하게 된 것도 물론입니다.

로마 사분치제의 혼란을 극복하고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업적을 기려 만든 개선문입니다.
▲ 콘스탄티노 개선문 로마 사분치제의 혼란을 극복하고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업적을 기려 만든 개선문입니다.
ⓒ 박용은

관련사진보기


코린트 양식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개선문'은 밀비우스 전투의 승리, 로마 입성, 베로나 포위 등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업적들을 다양한 부조들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황제의 위대한 업적 홍보문인 셈입니다.

고대 에트루리아인들로부터 시작된 이 '개선문'의 전통이 저 유명한 파리의 나폴레옹 '개선문(에투알 개선문)'을 거쳐, 심지어 평양의 '개선문'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자들에게 '개선문'은 정말 매력적인 아이템인가 봅니다.  

개선문을 뒤로 하고 본격적으로 고대 로마의 흔적을 찾아서 '팔라티노 언덕(Monte Palatino)'을 오릅니다. 로마 건국 신화에 따르면 로마의 시조 로물루스, 레무스 형제가 이곳 '팔라티노 언덕'의 동굴에서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다고 합니다.

이후 로마의 황제들이 궁전을 지어 로물루스의 정통성을 이어받으려 했던 곳이 '팔라티노 언덕'입니다. 낮은 언덕이라 생각하고 가볍게 올라섰더니 금세 '콜로세움'과 '개선문'이 옆으로 바짝 다가서서 새로운 풍광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언덕 여기저기에 펼쳐진 폐허들은 그 독특한 분위기로 고대 로마의 향기를 느끼게 해줍니다.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신화가 살아 있는 초기 로마의 중심지, 팔라티노 언덕입니다.
▲ 팔라티노 언덕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신화가 살아 있는 초기 로마의 중심지, 팔라티노 언덕입니다.
ⓒ 박용은

관련사진보기


언덕을 내려와 '포로 로마노(Foro Romano)'에 들어섭니다. 공공 집회 장소, 즉 포럼을 뜻하는 '포로'는 원로원 의사당과 신전 등의 공공 기관과 로마인들의 일상에 필요한 시설들을 갖춘 곳으로 고대 로마인들의 생활의 중심지였습니다.

특히 지붕과 한쪽 벽만 남은 '막센티우스 바실리카(Basilica Maxentius)'는 현재 이탈리아에 남아 있는 수많은 '바실리카' 즉 성당들의 원형이 되는 곳으로 르네상스 시절 미켈란젤로와 브라만테는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을 건축하면서 이 바실리카를 연구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서양 건축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곳이겠지요. 그런데 때마침 보수공사 중이라 그 면모를 제대로 확인할 수 없어 아쉽기만 했습니다.

"여행, 걷는 만큼 보인다"

콜로세움에서 바라본 '포로 로마노'의 비너스 신전입니다.
▲ 비너스 신전 콜로세움에서 바라본 '포로 로마노'의 비너스 신전입니다.
ⓒ 박용은

관련사진보기


'포로 로마노'에 있는 불의 여신, 베스타의 신전입니다.
▲ 베스타 신전 '포로 로마노'에 있는 불의 여신, 베스타의 신전입니다.
ⓒ 박용은

관련사진보기


로마를 짧게 여행하고 온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들 중 하나가 '포로 로마노'와 '팔라티노 언덕'은 "별로 볼게 없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여행을 대하는 입장의 차이 때문일 수도 있겠고, 짧은 일정에 맞춰 급하게 바티칸과 스페인 광장, 콜로세움 정도만 돌아보고 '포로 로마노'를 스쳐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물집 잡힌 발로, 급한 생리 현상도 참아 가며 미로와 같은 '포로 로마노' 이곳저곳을 걷다보면 조금씩 폐허 위에 고대 로마의 형상들이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마치 홀로그래피처럼 거리의 모습과 신전, 집, 개선문들의 환영이 떠오르는 듯한 묘한 기분에 휩싸입니다.

발길 닿는 곳마다 눈길 가는 곳마다 고대 로마인들의 호흡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오래 전 문화유산 답사 시절, 감은사지나 황룡사지, 미륵사지에서도 느꼈던 것과도 비슷한 것입니다. 결국 여행에서도 필요한 것은 상상력이 아닐까 짧게 생각해 봅니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라 걷는 만큼 보인다"라던 한 여행 선배의 말도 떠오릅니다.

오래된 미로처럼 이어지는 고대 로마인의 삶의 공간 '포로 로마노'입니다.
▲ 포로 로마노 오래된 미로처럼 이어지는 고대 로마인의 삶의 공간 '포로 로마노'입니다.
ⓒ 박용은

관련사진보기


캄피돌리오 언덕에서 바라본 '포로 로마노'의 모습입니다.
▲ 포로 로마노 캄피돌리오 언덕에서 바라본 '포로 로마노'의 모습입니다.
ⓒ 박용은

관련사진보기


지친 발과 허리를 이끌고 '포로 로마노'를 나와 '캄피돌리오 언덕'에 오르니, 흔히 '포로 로마노'의 소개 사진에서 봐왔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고대 로마의 미술을 만날 시간입니다.

윌리엄 터너 '근대 로마의 분지', 폴 게티 박물관 소장. 19세기 후반 영국의 풍경화가 터너가 그린 '포로 로마노'의 모습입니다.
▲ 근대 로마의 분지 윌리엄 터너 '근대 로마의 분지', 폴 게티 박물관 소장. 19세기 후반 영국의 풍경화가 터너가 그린 '포로 로마노'의 모습입니다.
ⓒ 위키피디아이미지

관련사진보기


(* 4-2로 이어집니다.)

○ 편집ㅣ김지현 기자



태그:#콜로세움, #개선문, #포로로마노, #로마, #이탈리아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이동조사원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