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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0궁녀가 아닌 3000백성 부여잡고 최후를 맞이한 백제 부여(扶餘). 패망국이라 또렷한 기록도, 성한 유물도 없다. 철보다 강하여 끝끝내 버틴 오층석탑과 누가 뭉갤까봐 봉분을 하늘 높이 쌓은 무덤만 온전하다. 그마저 '껍데기'만 남았다.

정림사터 석불좌상 보호각문을 살짝 열고 부여를 들여다보았다. 백제의 상징, 정림사터오층석탑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2009년 촬영)
▲ '부여의 문' 정림사터 석불좌상 보호각문을 살짝 열고 부여를 들여다보았다. 백제의 상징, 정림사터오층석탑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2009년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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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년간 백제 도읍지였으나 우리는 부여를 잘 모른다. 우스갯소리로 부연(뿌연) 고장이라 부여라 이름지었다나. 문 두드려 손 내밀고 부스러기 유물과 유적을 하나씩 꿰맞추어 나아갈 때 부연 부여는 최남선 말대로 '보드랍고 훗훗한 부여'로 다가올 것이다.

가만 생각해보았다. 부여를 언제, 몇 번 가보았느니. 초상집에 들러 부연 부여 아닌 까만 부여를 보았고, 보령에서 넘어와 성주사터와 무량사를 보고 부여 옆구리만 살짝 스쳐간 적이 있다. 공주 갑사와 마곡사에 들렀을 때 내친김에 부여에 가보리라 마음먹고 무슨 죄지은 사람처럼 도둑방문 한 적이 있었다.

부여 문을 두드리며 제대로 찾은 건 2009년 여름, 벌써 6년 지났다. 정희성 시인이 '공주에서 부여로 넘어가는 길에 우금치가 있지요'라 노래한 대로 우금치 고개를 넘어 찾아간 것이니 그야말로 길섶 이슬을 묻혀가며 맘먹고 찾아간 것이다.

일찌감치 도둑맞아 주인은 알 길이 없다. 어미 잃은 아이 젖동냥하듯 찾아 들어갔다(2009년 촬영)
▲ 능산리 고분군 일찌감치 도둑맞아 주인은 알 길이 없다. 어미 잃은 아이 젖동냥하듯 찾아 들어갔다(2009년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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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먼저 찾아간 건 능산리 고분군. 봉긋봉긋 솟은 능산리 고분군은 어머니 앞가슴. 일찌감치 도굴되어 누구의 무덤인지 알 길 없어 배 곯은 아이 젖동냥하듯 더듬어 찾아갔다. 경주 석가탑은 볼수록 잘나가는 부잣집 맏딸 같고 정림사지오층석탑은 망한 집 장남 같아, 집안 망할 때 잃어버린 장남 찾아 헤매는 어머니의 절절한 마음으로 찾은 곳은 정림사지.

외적을 막아보겠다고 쌓은 부소산 토성은 제 역할을 잃은 지 오래, 이제 소나무 밥이 되어 거북등 같은 소나무 껍질에 모진 세월을 두텁게 쌓았다. 3000궁녀 원혼을 달래려 지었다는 백화정(百花亭)은 낙화암 바위 절벽 위에 아스라한데 낙화암에서 들려오는 백성들 마지막 아우성은 누가 달랠꼬?

낙화암 바로 위 바위절벽에 세운 정자로 전설 속 3000궁녀 원혼을 달래려 지었다는데 부소산까지 쫓긴 백성 아우성은 누가 달랠꼬? (2009년 촬영)
▲ 부소산성 백화정(百花亭) 낙화암 바로 위 바위절벽에 세운 정자로 전설 속 3000궁녀 원혼을 달래려 지었다는데 부소산까지 쫓긴 백성 아우성은 누가 달랠꼬? (2009년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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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란사 종소리에 이끌려 고란사를 찾았지만 종소리는 백마강 물에 묻히고, 한 번 먹으면 3년이 젊어진다는 고란약수로 허전함을 달랬다. 부소산 바위에 적힌 낙화암 붉은 글씨는 떨어진 꽃잎마냥 백마강 물에 비치는데 이내 나룻배 물살에 흩어졌다. 아 꿈같은 백제로다.

버드나무 가지에 매어놓은 놀잇배에 오르며 행복해 하는 백제 무왕(武王)을 궁남지에서 보았다. '4월의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고 목 놓아 부른 신동엽 선생의 시비(詩碑)며 시인의 파란 지붕 생가를 둘러보았다. 살짝 문 열고 찾아간 부여지만 그런대로 '껍데기'는 보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연못이다. 이곳에서 버드나무가지에 매놓은 배에 올라타며 행복해 하는 백제 무왕을 상상했다.(2009년 촬영)
▲ 궁남지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연못이다. 이곳에서 버드나무가지에 매놓은 배에 올라타며 행복해 하는 백제 무왕을 상상했다.(2009년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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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산 자락 판판한 땅에 들어서 금쟁반 위에 옥구슬 굴러간다는 금반형 명당이라는 말을 풍문으로 들었다
▲ 반교마을 전경 아미산 자락 판판한 땅에 들어서 금쟁반 위에 옥구슬 굴러간다는 금반형 명당이라는 말을 풍문으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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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연' 고장 부여냐, 보드랍고 훗훗한 부여냐

5월 1일 부여를 다시 찾았다. 6년 전 찾았을 때에 비하면 허망하기 짝이 없다. 여러 갈래 콘크리트 고속도로가 생기는 바람에 이제 우금치고개를 넘을 일도 길섶 이슬을 묻힐 일도 없다. 부여읍을 저만치 두고 외산면 반교마을로 곧장 들어갔다. 길이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다.

외산면은 '수려한 경치에 둘러싸인 고장'이라 자랑삼는다. 경치로 내세울 것 없는 부여라지만 외산은 다르다. 만수산과 아미산이 무량사와 반교마을을 품에 안아 다독이고 시샘하듯 웅천천과 반교천이 그 사이를 파고 들었다. 한마디로 산 좋고 물 좋은 고장. 

이런 외산 아미산 자락, 금쟁반같이 평평한 곳에 반교마을이 들어섰다. 금쟁반에 옥구슬 굴러다닌다는 금반형(金盤形) 명당마을이라는 소문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반교마을 뒤는 산이요, 앞과 옆이 물이어서 마을 다리는 다른 세상과 소통하고 폐쇄의 공포를 덜어주는 귀중한 존재로 여겨진다. 이런 걸 알고 나면 반교라는 마을 이름이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다.

원래 널판으로 놓은 다리가 있다 하여 널다리, 판교(板橋)라 부르다가 반교(盤橋)라 고쳐 불렀다는데, 분당 판교와 이름유래가 같고 둘 다 금반형 명당이라 들었다. 시쳇말로 요새 잘나가는 판교라는데 반교마을은 언제나 이름 덕을 보려는지.

마을 담은 온통 돌담. 밭에서, 냇가에서 캐낸 돌로 집담 쌓고 밭담 쌓았다
▲ 반교마을 돌담 마을 담은 온통 돌담. 밭에서, 냇가에서 캐낸 돌로 집담 쌓고 밭담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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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교마을 옛담은 모두 돌담. 돌이 얼마나 많았으면 '도팍골'로 불렸을까? 파고 또 파도 돌이 나왔다나, 세상에서 제일 돌 많은 곳이 여기라 마을 사람들이 얘기한다. 돌을 파내면 밭이 일궈진다 하며 징하게 파냈다. 돌이 밭을 일군 게다. 이렇게 캐낸 돌로 집담 쌓고 밭담 쌓았다.

돌담은 까무잡잡하다. 까마귀 돌, 오석(烏石)만큼 새까맣지 않아도 까무잡잡하고 거무스레하다. 돌 검은 것은 죽도록 일만 한 우리 아버지 그을린 얼굴 같아 애를 태우나, 태생부터 거무스레한 것이니 그렇게 볼 일도 아니다.

이 마을 돌담은 까무잡잡하고 거무스레하다
▲ 반교마을 돌담 이 마을 돌담은 까무잡잡하고 거무스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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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 사람처럼 왠지 친근한 느낌의 돌담

여기 돌담은 반질반질, 까무잡잡한 도자기 피부, 매력이 넘친다. 우리 옛 돌담은 지역마다 때깔과 모양이 달라, 제주 하가리마을 까만 돌담은 구멍이 숭숭하고 경북 군위 한밤마을 돌담은 둥글둥글 밤톨 같고 전남 영암 죽정마을 돌담은 뽀얀 것이 새색시 닮았다. 전북 정읍 상학마을 돌담은 바짝 마른 씨옥수수 같고 경남 고성 학동마을 돌담은 찹쌀시루떡 같다.

검정 옷처럼 검은 담은 아무하고나 잘 어울린다. 빨강, 파랑, 초록 지붕, 보라 매발톱, 자주 금낭화, 노란 황매화, 붉은 영산홍, 하얀 개꽃, 연분홍 산철쭉, 진녹색 양파, 연록 마늘, 노란 배추꽃. 처음 만나는 사람이 충청도 사투리를 쓰면 경계심이 없어지고 왠지 친근한 느낌이 들어 금방 친해질 것 같은데 이 담도 충청도 사람 닮은 겐가.

이 마을 돌담도 충청도 사람 닮은 겐가. 거문 돌담이라 아무하고도 잘 어울린다
▲ 반교마을 돌담 이 마을 돌담도 충청도 사람 닮은 겐가. 거문 돌담이라 아무하고도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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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끝, 계류 곁에 그럴싸한 집 한 채가 있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의 집이다. 당호는 휴휴당(休休堂), 정원은 아미산원림(峨嵋山園林)이라 이름 지었다. 집 주인의 추사(秋史)에 대한 애정이 남달라서 추사생가에 있는 '석년(石年)' 돌기둥을 복제하여 앞마당에 세워두고 휴휴당 서쪽처마에는 추사 글씨, '소창다명 사아구좌(小窓多明 使我久坐)'를 달아놓았다.

'작은 창으로 밝은 빛이 많이 들어오니 (나는) 오래 앉아 있게 되는구려'라는 뜻이다. 집 주인은 일주일에 이틀만 여기에 있겠다고 했다. 이틀 동안(小窓) 풍요한 시간(多明)을 보내고 더 오래 있고 싶은데 다시 도시로 돌아가야 되는 주인의 아쉬움(久坐)을 전하고 있는 듯.

키 낮은 돌담, 소박한 사립문과 휴휴당, 마을사람들과 어울리려 조심스러워하는 집주인의 마음이 엿보인다
▲ 아미산원림과 휴휴당 키 낮은 돌담, 소박한 사립문과 휴휴당, 마을사람들과 어울리려 조심스러워하는 집주인의 마음이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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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유곡에나 있을 법한 바위절벽과 풍부한 물은 보통 마을에서 구경하기 어렵다
▲ 아미산원림 계류 심산유곡에나 있을 법한 바위절벽과 풍부한 물은 보통 마을에서 구경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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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 연못과 계류는 소쇄원 풍광과 비견할 만하고 계류만은 명옥헌원림에 뒤지지 않는다. 정자 밑 바위절벽은 예천 초간정원림과 견준다 해도 누구 하나 토달 사람 없다. 

계류는 세 가지 물소리를 낸다. 맨 위 물소리는 아미산물이 처음 집주인에게 안부를 묻는 환한 소리요, 연못 두 갈래 물소리는 집주인이 내준 비단옷섶 스치는 소리다. 정자 밑 바위절벽 파도소리는 '잃어버린 영화' 찾아 험한 세상 속으로 길 떠나는 사내의 비장한 소리.

이 물 따라 내려오다 두 아이를 만났다. 한 아이는 유치원에, 다른 아이는 외산초등학교에 다닌다 하였다. 염소에 풀 먹이고 나에게도 '풀 장난' 걸며 재잘대는데 반교마을 주인이 나에게 전하는 환한 안부소리로 들렸다. 미래 반교마을 주인이 건넨 안부다. 나중에 또 와도 '비단옷' 내주겠는걸. 부여의 '알맹이'를 본 것 같아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 편집ㅣ최규화 기자



태그:#부여, #반교마을, #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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